이계남녀 3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5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3화
003 무림의 남자와 판타지의 여자(1)
공야패는 옷장을 열고 옷장의 아래쪽에 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에는 자신이 필사한 4권의 비급이 들어 있었다.
공야세가의 가전무공인 혈랑검법(血狼劍法)과 그 혈랑검법과 짝을 이루는 역혈 내공심법인 혈령마경(血靈魔勁), 그리고 혈령마경의 과도한 극양지기를 막아주기 위한 극한 내공심법인 냉혈공(冷血功), 마지막으로 또 다른 가전무공인 경공 혈난보(血亂步)였다.
감회가 어린 눈으로 그것을 보던 공야패는 잠시 서글퍼졌다. 공야세가가 온전하게 있었다면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그들의 후손인 공야무혼에게 영약을 먹이고 벌모세수를 시켜줬을 것이다.
공야패 자신은 벌모세수와 함께 영약을 취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내공을 바탕으로 마교 서열 1,200위가 될 정도로 무공을 높이게 되었고, 마교 3위의 무력단체인 월야천귀단의 8전대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교 서열 500위인 자들도 자신의 아들에게 벌모세수와 영약을 취하게 해주는 것이 어려웠다. 마교는 무림맹에 대한 복수심으로 힘을 기르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모든 물자가 조금씩 부족했던 것이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아들에게 자신이 받은 혜택을 베풀어주지 못하고 다만 자신이 필사한 4권의 책을 쥐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혼아가 근골심사에 들기만 하여도, 벌모세수와 영약을 받을 수 있을 터인데…….’
마교가 기재를 발굴해 최고수로 키우기 위해 만든 근골심사는 신분에 관계없이 새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을 조사하여 무골 기재일 경우 총단에서 벌모세수와 영약을 책임지고 있었다.
예외적이라면 100위 안에 드는 간부의 자녀들은 그의 부모들이 능력껏 벌모세수와 영약을 주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두 딸이 그러했듯 자신의 아들인 공야무혼도 무골이지만 근골심사에 통과할 정도의 기재는 아니었다.
‘공야패야, 평소에는 아들 하나만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더니, 욕심이 끝이 없구나.’
한숨을 쉰 그는 가지고 온 상자를 아들의 옆에 두고 안타까운 눈으로 무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벌모세수와 영약을 취하지 않은 것이 공야무혼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떻소?”
궁정 수석마법사 스토레무에게 라에뮤 3세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허허, 전하께옵서는 너무 성급하시옵니다. 이제 태어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아이의 재능은 누구도 알 수가 없사옵니다.”
“아, 그렇다고 했죠?”
소탈한 성격의 왕은 자신의 뒷머리를 잠시 긁었다. 세자 때부터의 버릇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이번이 5번째인데……. 설마 5번이나 묻지는 않으시겠지 했더니만…….’
늙은 궁정 수석마법사는 속으로 중얼중얼거렸다. 왕비에게서 아기만 태어나면 정신을 못 차리는 라에뮤 3세였다. 물론 태어난 지 10여 일이 지나면 총명한 왕의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5번의 출산에서 보인 왕의 모습은 항상 똑같았다.
‘끌끌… 왕비님이 매년 아기님을 낳으시면 이 왕국은 혼돈에 빠지겠어. 연년생을 낳지 않으셨던 게 정말 다행이지…….’
세월은 언제나 유수와 같아 지나갈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돌아보면 시간만큼 빠른 것을 찾기도 힘들다. 어느덧 무혼의 열 번째 생일이 되자 비록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공야패는 자신의 뜻을 열심히 따라주는 아들을 위해 많은 음식을 마련하고 무혼의 친구들과 자신의 친우 중 무혼과 친한 한기제를 초청했다.
공야패의 친우인 한기제는 기관진식과 무기제작 그리고 강시제조에 능통해 그가 만드는 모든 것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다 하여 강호에서 탈명귀(奪命鬼)라는 별호로 통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실력이 천하제일이라 부르기엔 부족함이 있어도 여러 방면의 실력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공야패와 한기제는 무혼의 생일축하를 마치고 그가 자신의 친구들과 마당에서 노는 것을 보며 방에 앉아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다.
“그래, 머리에 이런 점이 있다고?”
“그렇다네.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는가?”
한기제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자신 앞에 있는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그 그림은 공야패가 무흔이 태어났을 때 봤던 머리의 점들을 그려둔 것이다.
“흠, 글쎄? 10줄과 12줄은 천간(天干)과 십이지(十二支)를 뜻하는 것 같긴 한데, 24개의 점? 나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네.”
“천간과 십이지, 이 점들이 무엇인가를 뜻한다면 혼아가 갑자(60년)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인가?”
“확신은 할 수 없네. 자네가 보기에 혼아에게 뭔가 특이한 게 있는가?”
“흠… 두 가지가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이 드네.”
“두 가지?”
한기제의 물음에 공야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했다.
“보통 애들보다도 양기가 강하다네. 양기가 강하면 극양의 무공을 강하게 펼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정도가 과하면 몸에 해로운 일이 생길까 그게 은근히 걱정된다네.
“흠. 그렇군. 아무리 극양의 무공을 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몸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법인데… 의원에게 진찰은 받아봤나?”
“몸에 특별한 이상은 찾을 수 없다고 하더군. 건강하다고 하던데?”
“그래도 가끔 의원에게 데려가 보게.”
“나도 그럴 생각이야.”
한기제는 고개를 돌려 마당에서 놀고 있는 공야무혼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또 한 가지는 뭔가?”
“총명하다고 할까, 아니면…….”
한기제가 의문에 찬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공야패는 말을 이었다.
“평소에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이해가 두 딸들보다 빠른 편이지만, 오후가 되면 훨씬 이해력이 좋아진다네.”
“오후가 되면?”
“그렇다네. 점심을 먹기 조금 전부터 해서 저녁때까지는 하나를 가르치면 상당히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지.”
무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한기제는 다시 한번 무혼의 머리에 있다는 점들이 그려진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을 들어보니, 이 점이 해롭다는 생각은 안 드네. 정확히 뭐라고 말할 만한 것은 없지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시간은 유시(酉時)가 된 지 두 식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평화로운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놀라 마당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무혼이 머리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지금 무혼은 눈앞은 흐려지며 어지러워졌고, 극심한 두통이 머리를 휩쓸고 다녔다.
“아아악!”
무혼의 모습에 놀란 공야패와 한기제는 냉큼 달려와 무혼을 안아 들었다.
“무슨 일이냐?”
공야패가 주위에 무혼과 같이 놀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이들도 이유를 모르는 듯 놀란 눈으로 모두 고개만 휘젓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의원에게 데려가 보세.”
한기제의 다급한 목소리에 공야패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혼의 수혈을 눌렀다.
“이런, 수혈도 안 통하는군.”
잠시 마주 보던 두 사람은 의원을 향해서 힘껏 달렸다.
같은 시간. 미라크네 왕궁 내의 9별궁이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공주가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이유를 알지 못하다니!”
라에뮤 3세는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쳤고 그의 옆에는 왕비의 품 안에 있는 아이네스 공주가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왕의 호통을 들은 왕실 의사와 고위 사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의사의 치료도, 고위 사제의 신성력도 공주의 두통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주의 마나가 보통 사람보다 차가운 기운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들었다. 혹시 그것과 무슨 연관이 있나?”
“그것과는 상관이 없사옵니다, 전하.”
궁정 수석마법사 스토레무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말을 했다.
“오… 스토레무 경. 그렇다면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소?”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전하, 그러나 제가 보기에 공주의 두통은 마나와는 상관없는 듯하옵니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이오? 사제는 마기와 상관이 없다 말하고, 의사는 병과 상관이 없다 말하고, 마법사는 마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하면 대체 왜 공주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이오? 휴…….”
한숨을 내쉰 라에뮤 3세는 공주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왕비는 안쓰러운 얼굴로 공주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공주의 주위에 있는 시녀들은 연신 찬 수건으로 공주가 흘리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고통에서라도 벗어나게 해주고자 왕이 직접 슬립 마법을 시도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 의사와 사제도 공주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하니 더욱 답답했던 것이다.
“공주야…….”
그때였다. 공주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더니 눈을 천천히 뜨고 있었다.
“공주야.”
“공주야.”
왕과 왕비는 동시에 공주를 불렀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공주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두통은 괜찮니?”
“두통? 무슨 두통 말이옵니까?”
공주의 말에 왕과 왕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아플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진맥을 하던 의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을 했다.
“무슨 말이오? 아이가 이렇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이상이 없다니?”
“내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외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몸에서 열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맥도 정상적인데. 거참…….”
“그럼 수면제라도 주시오. 벌써 일각이 다 되도록 고통 속에 있으니 잠이라도 재워야 하지 않겠소.”
공야패의 흥분한 얼굴을 보던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공야무혼의 비명 소리가 작아지더니 살며시 눈을 떴다.
“혼아야.”
“혼아야.”
공야패와 한기제는 둘이 동시에 무혼을 부르며 다가갔다.
그러나 무혼은 잠시 멍청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공야패에게 물어보았다.
“아빠, 여긴 어디예요?”
“약방이다. 네가 갑자기 아프다고 해서 데리고 왔지.”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혼은 말했다.
“제가… 아팠나요?”
“기억이 나지 않느냐?”
“예, 아이들과 마당에서 놀고 있었던 기억까지 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네요?”
“허참.”
공야패는 허탈하기도 했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는 무혼을 업고서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두통이 찾아올까 봐 저녁 내내 지켜보았으나 무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밝게 뛰어놀고 있었다.
‘정말 아무 일이 없는 것일까…….’
공야패의 걱정을 모른 채 무흔은 자신의 10번째 생일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