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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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2화
002 태어난 두 아기
어둠이 살짝 깔리기 시작한 유시(酉時), 마교의 총단이 있는 십만대산 안의 마을 중 하나인 작은 마을에 불빛이 보인다. 그 불빛을 따라가니 마당에서 중년인이 서성이는 집이 있다.
그 중년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방문을 바라보고 있고 방문 안에서는 그의 아내가 산고의 고통에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빠!”
옆을 돌아보니, 자신의 두 딸이 걱정스러운 듯이 보고 있었다. 귀여운 두 딸을 본 혈야적랑 공야패는 빙긋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 너희들의 동생이 태어나는 것이란다.”
“피~ 그 말은 아까부터 들었어요. 저 태어날 때도 이랬나요?”
둘째 딸의 재롱 같은 대답을 들으며, 자신이 그 애들에게 얼마나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네가 태어날 때도 이랬었지.”
공야패는 자신의 두 딸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호북에서 팽가와 대등한 세력을 자랑하던 흑도 공야세가가 번성하고 있을 때였다면 이 귀여운 딸들에게 공주 같은 생활을 누리게 해주었을 것이다.
비열한 정파의 술수에 가주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고 마교에 투신한 지 30년이 흘렀다. 급습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 세가의 마지막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그는 하루도 복수를 잊지 못했다.
‘마교가 중원에 진출할 때,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 마음은 공야패뿐만이 아니라 정사대전 때 목숨을 잃은 흑도인들의 혈육들이 마음 깊이 품고 있었다.
아아악!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공야패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아들이면 좋겠는데.’
세가를 잇는 문제라면 데릴사위를 두고 외손자에게 공야의 성을 잇게 해도 된다. 문제는 공야세가가 자랑하는 혈랑검법은 양강무공이라 여자가 익히기 힘들다는 데 있었다.
두 딸이 무공을 익히는데 좋은 재질을 타고난 것을 볼 때마다, 그애들이 여자라는 아쉬움이 항상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혈랑검법이 이대로 실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간혹 잠에서 깨기도 했었다.
이미 마교에서는 마존만이 들어갈 수 있는 마존무고를 제외한 모든 무고를 열어 신진 마도인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무공을 익힐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오랜 역사가 지나는 동안에 모인 많은 패도적인 무공에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혈랑검법의 후계자로 삼을 만한 인재를 찾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원하는 인재를 찾았다 해도 혈랑검법의 후계자는 곧 공야세가의 후계자를 뜻하니, 다른 가문의 젊은이에게 전수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들려오는 아내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공야패는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언제나 밤하늘을 보면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하늘을 가리키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해 준 것이 기억이 난다.
“패아야, 바로 저 별이 우리 공야세가의 별, 혈랑성이다. 저 별이 빛나는 한 강호는 공야세가와 혈랑검법이 있음을 잊지 않을 거란다.”
할아버지가 언제나 자랑스러운 눈으로 보시던 혈랑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붉은 기운의 빛을 반짝이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응? 색깔이?”
순간 그의 눈에는 혈랑성이 붉은빛과 흰빛에 어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으아아아앙!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방문을 보던 공야패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혈랑성은 여전히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보았나 보군…….”
그가 한걸음에 방문 앞으로 다가가니, 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산파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노파를 자세히 보자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드님입니다.”
공야패의 얼굴이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결혼한 지 20여 년만에 드디어 혈랑검법을 이을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으하하하! 나의 모든 것을 이어받아 만천하에 혈랑검법과 공야세가가 살아 있음을 알려줄 아들이 태어났구나! 으하하하.”
그는 붉은 마기를 휘날리며 광천대소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웃던 그는 기쁨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산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자신의 처가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수고했소, 나의 사랑이여.”
평소의 행동이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서슴지 않는 그는 마교 내에서도 얼굴에 어울리는 다혈질의 포악함과 함께 애처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산파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공야패가 뒤를 돌아보자, 웃고 있어도 험악한 얼굴을 본 노파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드님의…….”
산파가 아이를 보면서 좀 걱정스럽게 이야기하자 산모는 눈을 크게 떴다. 간신히 생긴 아들에게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아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아들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길을 가다 만난 어린 사내아이를 보는 그의 눈빛은 부러움과 갈망이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제껏 그녀를 위해서 어떠한 일도 마다치 않고 해준 남편을 위해서 그와 닮은 아들을 낳아주고 싶었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자 했었지만, 말을 하는 순간 사실이 될까 두려웠다.
더욱 두려웠던 것은 실망하게 될 남편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공야패의 사랑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고, 그의 슬픔은 그녀의 아픔이 되었기 때문이다.
“머리에 이상한 점들이…….”
공야패는 노파에게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기의 머리를 살펴보니, 머리 꼭대기에 있는 백회혈(百匯穴)에서 뒷머리에 있는 뇌호혈(腦戶穴) 사이에 24개의 기이하게 생긴 작은 점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다.
그 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떤 그림 같기도 하고 글자 같기도 한 것이 그로서는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이게 뭘까?’
다른 곳도 아니고 백회혈에서 뇌호혈까지 거의 같은 크기의 기묘한 점이 24개가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점들이 이루고 있는 모양이 언뜻 보기에는 아(牙) 자와 비슷해 보이나 그 또한 아니었다. 게다가 그 점들은 가로로 10줄 세로로 12줄에 맞추어서 배열이 되어 있었다.
그 외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들에게서 이상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문득 눈을 돌려 아내를 보니 몹시 불안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그는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눈치가 빠른 아내가 자신이 얼마나 아들을 원했다는 것을 알 것이며, 20년 만에 생긴 아들에게 문제가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하리라는 것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파가 말하는 것은 별거 아니오. 아주 건강한 공야세가의 후계자라오.”
공야패는 아들이 다칠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아내에게 아들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공야패가 자신의 옆에 아들을 두자, 이리저리 살펴보니 막 태어난 아기의 근골은 잘 모르지만, 이제까지 낳은 두 딸에 비해서 확실히 건강해 보이는 아기였다.
“휴우.”
비로소 마음을 놓으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띠우는 아내를 보자 공야패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 점들은 무엇일까요?”
“사실 나도 모르겠소. 뭐 점은 누구에게라도 있는 것이 아니겠소. 게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자라 머리가 길어지게 된다면 보이지도 않을 테니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요.”
남편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아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당신을 닮은 것이 무엇보다도 기뻐요.”
“아니, 내가 보기엔 당신을 닮았소. 그래서 더 기쁘다오.”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공야패의 머릿속은 방금 태어난 아들의 수련에 대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정했나요?”
아내의 물음에 공야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공야무혼(公冶武魂)!”
가이오스트 대륙의 빛의 연합에 소속되어 있으며 백설(白雪)의 신 스노샤니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백설의 미라크네 왕국.
아침 6시가 되기 조금 전, 새벽이라 아직은 사람들이 잠에 빠져 있을 이 시간에 미라크네 왕궁의 한쪽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고, 불빛 아래에서 서성이는 남자가 보인다.
수계 마법과 빙계 마법이 발달되어 있는 이 왕국을 상징하는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로브를 입고 하얀 지팡이와 푸른색의 보검을 허리에 찬 그는 이 나라의 왕인 라에뮤 3세였다.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
왕이 굳이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위에 있는 신하들은 딱히 다들 얼굴만 보고 있을 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지금 왕이 있는 곳이 왕비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들리는 산방 앞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10번 넘게 물으셨지?’
끄덕끄덕.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져 왕의 로브와 비슷해 보이는 로브를 입은 신하들 중 2명이 왕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나누었다.
그들의 로브에 큰 차이가 있다면 왕의 로브는 금색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고, 신하들은 은색으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응애응애~
드디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왕은 반사적으로 방의 손잡이를 잡았으나 아직 잠겨 있었다.
“내가 이곳을 지나기를 원하노니, 내 앞의 문은 더 이상 나를 막지 못하리라. 노…….”
“전하…….”
왕은 문이 잠겨 있자 급한 마음에 무의식중으로 문을 여는 마법인 노크(Knock)를 시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위의 많은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을 부르자 멈추었다.
“전하, 그곳은 산실이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는 왕을 보면서 한숨만 쉬는 신하들이었다. 이번으로 5번째 겪는 일이다. 왕비의 해산일만 되면 항상 겪다 보니 이젠 신하들도 어지간히 무덤덤해졌다.
“전하, 산실에는 어둠의 기운을 막기 위해서 결계가 쳐져 있사옵니다.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신다면 결계가 작동되오며…….”
“아, 알아요.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되었소.”
흰 수염이 가득한 노신의 말에 왕은 자신의 행동이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산을 보았다.
두 개의 달이 아직 하늘에 떠 있지만, 왕의 눈에 담겨진 산 위로 아침 해가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아침 해의 빛에 산 위의 만년설은 은은히 반짝이며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스노샤니의 딸이 저렇게 아름다울 것이리라.
“아이네스.”
그의 입에서 스노샤니의 19명의 딸 중 하나인 아이네스의 이름이 떠올랐고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나온 시중을 들던 시녀가 왕에게 다가왔다.
“신성한 흰 눈의 사랑을 받으시는 전하시여, 귀여운 공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왕비가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작고 귀여운 아기가 보인다.
“수고했소.”
라에뮤 3세는 아이를 안아 보았다. 작고 가녀린 생명,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며 왕을 바라보는 아기의 모습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그런데 공주님의 머리에…….”
옆에 있던 시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에 이상한 생각이 든 라에뮤 3세는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아기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아기의 머리에 여러 개의 점이 보였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머리 뒤까지 이어져 있는 알 수 없는 문자 같기도 한 24개의 점들은 가로로 10줄, 세로로 8줄로 배열되어 아기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R’ 자를 닮은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형태였다.
“이러한 것은 처음 보는데 무엇일까? 흠, 마법의 기운은 없는데……. 여봐라, 어르신들을 모셔라.”
라에뮤 3세가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3명뿐이다. 스노샤니 신전의 대신관 라이노혼과 궁정 수석마법사 스토레무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며 지금도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는 현자 로디나우였다.
세 노인은 소리를 듣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길 좀 봐주시오. 이 점들이 무엇인지 아시겠소?”
왕이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노인들에게 다가갔다. 아기의 머리에 있는 점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3명의 노인들은 의견을 나누더니 현자 로디나우가 대표로 나서서 대답을 했다.
“제 일생에 처음 보는 현상이옵니다. 다만…….”
“다만, 뭔가요?”
“24개의 점의 의미는 알 수가 없사옵고, 점들이 배열된 숫자인 가로 10줄과 세로 8줄은 10성로(星路)와 8성좌(星座)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왕은 안심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10성로와 8성좌는 모두 빛의 신들의 형상. 그 말이 사실이라면 빛의 신들의 축복일 테니 축하해야 할 일이군요. 그리고 많은 점이 있다고 하나 머리가 길게 자라면 숨겨질 터이니, 아기에게 해로울 일은 없겠군요.”
라에뮤 3세가 아기를 다시 왕비 옆에 눕히자 왕비는 아기의 볼을 쓰다듬어 주며 물어보았다.
“전하, 아기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투명하고 맑은 피부를 가진 아기의 모습을 유심히 보던 라에뮤 3세는 자상한 웃음 속에 대답했다.
“아이네스.”
아기들은 자기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물고 배부르게 먹은 다음 자신을 사랑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기들의 눈에는 공야세가의 사람들과 미라크네 왕실의 사람들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보고 있는 아기들도 기억을 못 할 것이다. 그것을 구분하고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그들은 곧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