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51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51화
051 도제와 천기(2)
한동안 아물지 않을 땅의 상처는 도제의 일격에 얼마만 한 힘이 들어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 바닥에 같이 갈라져 누워 있어야 할 자는 보이지 않았다.
도제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무혼이 보였다. 내력을 가다듬으며 가라앉은 눈으로 무혼을 훑어보던 도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술을 쓰느냐?”
“사술이 아니오. 선배님이 모르면 다 사술입니까?”
다시 숨을 고르는 무혼이었으나 이미 몸을 날려 도제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제를 상대로 멈추면 죽는다.’
강맹한 기세로 도제의 정수리를 노리며 달려드는 혈랑검을 본 도제는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풍아도를 이끌어 무혼의 검을 튕기며 그 반동력으로 무혼의 오른팔을 노린다.
그러나 무혼은 이미 몸을 낮추고 걸음을 옮기며 도제의 옆구리를 향해 혈랑검을 찔러 갔고 도제는 몸을 돌리고 그의 오른팔을 휘둘렀다.
허리를 쓸어오는 도의 강맹한 기운에 무혼은 몸을 다시 세우며 검로를 바꾸고 도제의 풍아도를 혈랑검으로 막아갔으나 풍아도에 담긴 기세를 보아 이미 자신의 검과 몸이 무사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안 돼!
무혼이 보는 것을 같이 보고 있는 아이네스가 도제의 살기에 가득한 도를 보자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으며 아이네스의 비명을 머릿속으로 들으며 무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무혼은 세상이 느리게 움직인다고 생각을 했다. 도제의 한없이 빠른 도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고, 혈랑검은 검로를 따라 도를 막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혼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내력을 품고 붉은 기운을 온몸에 감싸고 있는 혈랑검의 검날에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하고 맑은 흰 기운이 얽혀든다.
두 개의 기운이 검을 감싸자 기운은 점차 투명해졌다.
‘검기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었다. 아주 약한 붉은 기류와 흰 기류가 보이는 곳에는 분명 혈랑검을 휘감고 있는 새로운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무혼은 느낄 수 있었다. 이 기운이라면 도제의 풍아도에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엇일까?’
찰나의 순간은 지나고 무혼의 검은 희고 붉은색의 여운을 남기며 도제의 도와 다시 한번 격돌했다.
콰콰콰쾅!
갑자기 밀려오는 폭발적인 기운에 무혼은 뒤로 쭉 밀려나다 바닥에 검을 꽂고서 멈추었다. 눈을 돌려보니 자신의 오른팔에 있는 소매가 모두 찢겨져 너덜너덜해져 있다.
‘내가 진 것일까?’
오른팔에 다시 힘을 주고 검을 뽑았다. 하지만 내상도,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혼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먼지의 반대쪽에 있을 도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가 밀려나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른쪽의 소매가 너덜너덜해진 도제의 모습이 보였다.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도제는 무혼을 노려보며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으으으, 네놈 화경지검이더냐!”
“모르겠습니다. 다만 선배님이 이 후배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확실한 것은 오늘 저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도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조금 전 그의 손에 느껴진 반탄은 화경에 든 자의 것이었다. 하지만 도제는 인정할 수 없었다.
협을 추구하는 백도의 무사도 아니고 더러운 흑도의 무사가 어린 나이에 어찌 화경을 깨달을 수 있는가?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제는 이를 갈며 신음하듯 이야기를 했다.
“어림없다! 너처럼 이름도 없는 녀석에게 내 목을 줄 성싶더냐?”
“그건 선배님의 생각일 뿐입니다.”
무혼은 다시 검을 들었다.
“나는 선배님의 목을 거두겠습니다.”
무혼은 마음으로 아이네스에게 말했다.
- 아이네스 소저, 미안하지만 도와주시기 바라오.
- 괜찮겠어요? 무혼 경이 괜찮다면 저는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이네스는 무혼의 긍지를 잘 알고 있었다. 검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무혼을 보며 자신도 마법에 매진할 수 있었다. 무혼과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어느새 무혼의 행동과 생각 그리고 기분을 많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네스의 물음에 무혼은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혼자서 도제를 상대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만일 정당한 승부였다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제는 자신들을 무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손자들의 눈요깃감으로 무혼의 일행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마교 외당의 무사들에게 도제라는 존재는 정당한 승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 이것은 결코 비겁한 행동이 아닙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무인으로서 우리를 상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네스는 이번에도 무혼의 마음이 직접 느껴졌다. 그리고 멀리 있는 귀접 9조의 무사들을 보았다.
비록 무혼이 있는 중원에서 어둠을 표방하는 자들이라고 하나 십수년 동안 그들의 모습을 봐온 아이네스에게 마교의 사람들은 가이오스트의 어둠의 신을 믿는 자들과는 달랐다.
또한 무혼과 같이 여행을 하며 본 중원의 백도는 빛의 신을 추종하는 연합군의 사람들과도 달랐다. 신을 모시며 정의를 위하는 세력이 아닌 그들의 기준에서 빛인 자들이다.
‘우리와는 다른 기준으로 나누어진 사람들.’
무혼의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들이 아이네스의 의지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몇 번째의 합격술이 좋을까요?
- 3번째의 합격술이 좋을 듯합니다. 이제까지 연습하던 대로.
- 우리가 이길 거예요.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제를 향해 힘차게 달리며 외쳤다.
“그럼 목을 받겠소!”
도제도 그의 몸에 있는 모든 기운을 뽑아 올리기 시작했다. 흉흉한 공기의 흐름이 도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었고 무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눈앞의 상대는 모든 것이 그보다 떨어지고 약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이런 자가 마교에서 어찌 이름이 나지 않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힘으로 서열을 정하던 네놈들이 어찌 저런 놈을 숨겨두고 있었느냐!’
이미 무혼과 생각보다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긴 시간이 허락된다면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앞에 있는 자의 힘을 빼며 경험의 차이를 이용하여 쓰러뜨릴 것이다.
하지만 도제의 등 뒤에서 손자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시간을 길게 끌게 된다면 그는 손자들의 시체를 구경해야 할 판이었다.
도제는 이를 꽉 물며 온몸에 내력을 돌렸다. 그리고 평생을 쥐고 살아온 풍아도를 다시 한번 고쳐 쥐고 내력을 밀어 넣은 뒤 무혼에게 부딪쳐갔다.
아이네스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심장을 둘러싼 마나가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흐르는 것을 느끼는 무혼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지금 무지막지하고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상대하지만 혼자가 아닌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같이한다는 느낌이 무혼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
‘최고의 느낌.’
자신 역시 십수 년을 보며 느껴온 아이네스를 떠올리자 살짝 미소까지 얼굴에 떠올랐다.
‘자신의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림인에게 크나큰 행운이라고 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생긴 것인가?’
도제의 존재감이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혈랑검을 쥐고 있는 무혼의 팔에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갔다.
‘이긴다. 이길 수 있다!’
무혼은 도제의 도를 흘리며 자세를 낮추고 그의 목을 향해 검을 질렀다. 풍아도가 혈랑검의 검로를 막으러 다가오고 도제의 발이 무혼의 머리를 향해 쏟아진다. 무혼은 검로를 다시 바꿔 다리를 베어갔다.
그러자 도제는 다리를 회수하고 몸을 틀어 돌린 후 무혼의 등을 향해 도를 내리그었다.
“이번엔 못 피한다. 죽어랏!”
도제의 공력이 풍아도 끝에 걸리며 강맹하게 공기를 가르며 무혼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아아아앙!
‘제길, 또 걸리지 않았다. 이형환위가 아니야!’
도제는 똑똑히 보았다. 풍아도가 닫기 직전에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혼의 모습. 등을 갈랐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이런 보법이 있었나?’
하지만 더 이상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등 뒤에서 살기를 띤 검이 사혈을 노리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몸을 날려 자리를 피하니 길게 검이 지나갔다.
“이놈!”
또다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느다란 인기척과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열기. 그를 몰아붙이는 어린놈의 검에도 열기가 서려 있었다.
‘이번에는!’
모든 내력을 집중하여 도제는 지체하지 않고 풍아도로 베었다.
콰콰쾅!
이번에는 느낌이 있었다. 분명 무혼의 모습을 베었고 풍아도를 통해 촉감도 전해졌다. 하지만 도제의 느낌은 벤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또 하나, 열기를 뿜고 달려온 것이 혈랑검이 아니었다. 산산이 부서지는 불의 파편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대체?’
무혼에게 고개를 돌린 도제는 의외의 상황에 멈칫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무혼은 4명이었다.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느낌만으로 서로의 무공을 나누어야 할 때는 구분하기 힘든 인기척을 내는 것들이다.
‘불의 화살? 분신술? 그럼 진짜는?’
그 생각이 도제의 마지막이었다. 무엇인가가 뒤에서 목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도제에게 전달되어 왔다. 날카로우며 뜨겁고 단단한 것이다.
도제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그의 풍아도와 맞서가던 혈랑검의 끝부분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그의 목으로 되돌아가며 눈에서 사라졌다.
‘이럴 수가!’
침착히 대응했다면 지지 않았을 것이었으나 급한 마음과 생각지 못한 상황에 잠시 멈칫한 것이 도제의 마지막을 결정했다.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진동시키던 도제의 몸은 풍아도를 오른손에 꼭 쥔 채 앞으로 기울어지며 대지에 몸을 눕혔다.
- 와아! 이겼어요!
- 아이네스 소저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 무혼 경의 실력이 없었으면 이 요괴를 이길 방법은 없었을 거예요.
- 감사합니다, 아이네스 소저. 그리고…….
- 그리고?
- 아, 아닙니다.
무혼은 얼굴이 붉어진 채 다른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앗! 궁금하게 만들 거예요?
무혼은 그냥 빙긋 웃으면서 도제의 손자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도제의 손자들은 절규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도제가 협행을 행하는 것을 보러 온 것이다.
그런데 천하 9대 무인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할아버지인 도제가 무명의 마교인에게 목을 내어주는 것을 눈앞에서 본 그들은 혼백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9명의 귀접 9조원들은 도제의 손자들을 살려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도제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본 그들은 더 이상 불안한 마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놈들의 목을 쳐라! 이놈들은 우리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러 온 놈들이다!”
“흐흐흐, 네놈들 특별한 구경을 하겠구나? 바로 네놈들의 목이 떨어지는 구경을 말이다.”
귀접 9조의 조원들의 눈에 살기가, 몸에는 마기가 피워 오르며 더욱 거세고 날카롭게 병장기를 날리고 있다.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귀접 9조의 조원들은 무혼이 도제에게 당하기 전에 한 놈이라도 베기 위해서 급하게 서둘렀으나 자신들의 내력과 무공을 상회하는 도제의 손자들 목을 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 시간은 그들 편이었다.
반면에 도제의 손자들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들의 실력이 더욱 높다고 하지만 큰 차이가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살행을 오랫동안 한 악마 같은 마교의 외당 무사들이다. 할아버지인 도제만 믿고 시간만 끌었는데 도제가 아니라 도제를 쓰러뜨린 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