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67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67화
067 복수(1)
미라크네 왕국이 공주에 대한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할 때 어둠의 동맹국에서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무모한 전쟁을 이끌었다고 하지만 모레스 성에 많은 타격을 안겨준 점과 정보대에서 파악하지 못한 중요한 전력인 아이네스 공주의 실체를 파악했다는 점에서 동맹군의 수뇌부는 베트란에게 면책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맡고 있는 3군단의 충성도와 그가 이제껏 이끌어온 승리의 전과를 동맹군의 수뇌부가 무시하지 못했다는 점이 더 컸다.
“흥.”
3군단의 본부로 찾아온 수뇌부의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웃으며 그들을 등 뒤로 하고 집무실을 나간 베트란은 문밖에서 기다리던 호레이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잘 해결되었다. 호레이스, 이제 베르노의 명예를 짓밟은 녀석들의 명단을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호레이스도 베트란의 뒤를 따라가면서 슬쩍 웃음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그도 기다리던 베르노의 명예 회복을 위한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 기고만장하고 꼴 보기 싫은 몇몇 귀족의 목이 달아나리라.
그는 후방에서 느긋하고 유유자적하는 생활에 빠진 다른 귀족들에게 검술 실력과 전쟁터에서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아 올린 얼음귀족 베트란이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며칠 뒤 전선에 가까운 동맹군의 도시 산마에스에 바퀴까지도 검은색으로 된 마차가 화려한 파티가 진행 중인 한 건물 앞에 멈추었다.
그 마차에서 내린 베트란은 화려한 무도회장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얼굴을 찡그렸으나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교는 베트란의 모습을 보고서 눈을 크게 뜨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붙였다.
“어서 오십시오. 3군단장님.”
“수고한다.”
초대장을 장교에게 넘겨주고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널찍한 공간으로 들어가니 연락을 받은 건물의 주인인 클리프리 백작이 뛰어나오며 반겼다.
“오! 베트란 군단장, 어서 오시오.”
파티를 여는 모든 사람들이 초대장을 발부하나 참석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베트란이 그가 개최한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자 백작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이렇게 방문해 주신 것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소. 들어가시오.”
베트란의 모습이 보이자 파티장은 잠시 술렁였다. 후작의 공자라는 지위와 3군단이라는 막강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그는 동맹국 최고 신랑감 중의 하나였고 자연스럽게 많은 숙녀의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란은 숙녀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눈길을 보내지 않고 포도주로 목을 축이며 파티에 참여한 남자들을 쭉 훑어갔다.
“저기 있군.”
찾는 사내를 발견한 베트란은 다른 장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눈에서 놓치지 않고 있었다.
‘아이누켈 백작이 제일 처음 베르노 님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가장 맹렬하게 비난했던 자입니다.’
호레이스의 말을 떠올리며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던 베트란은 파티가 끝나자 그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아이누켈 백작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차를 향해 걸어가던 아이누켈 백작은 뒤돌아섰다.
그는 냉정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베트란을 보며 등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베트란의 부친인 스토미온 후작이 살아 있어 아직 작위를 받지 않았으나 후작의 계승내정자로서 이미 백작의 대우를 받고 있는 베트란이었기에 함부로 말을 놓지도 못했다.
“베르노 3군단장, 파티에 참여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인 듯하오.”
“그 기억이 맞을 겁니다. 아이누켈 백작, 파티를 6년 만에 참석한 것이니까요.”
끝까지 냉랭한 목소리에 백작은 불안감을 감추며 살짝 웃고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베르노 3군단장이 나에게 볼일이 있소?”
“예, 백작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이누켈은 베트란의 눈빛에서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얼음귀족이라 불리는 그와 그동안 제대로 된 대화도 없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내뱉은 베트란은 갑자기 장갑을 벗더니 아이누켈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백작은 그 장갑을 피하고 싶었다. 장갑을 맞게 된다면 실력으로 3군단장에 오른 베트란의 칼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력한 검사인 베트란의 손을 피할 수 없었고 눈이 번쩍하더니 왼쪽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짓이요.”
갑자기 마차를 타고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멈추며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아이누켈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많아 당황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요?”
이미 결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아이누켈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듯 큰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베트란은 한쪽 입가를 슬쩍 올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베트란과 내 동생 베르노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결투의 이유다.”
그 말에 아이누켈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장갑으로 맞을 때 짐작을 했었지만, 이제껏 몇 달 동안이나 침묵을 하던 베트란을 보며 안심하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내 동생 베르노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것은 나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과 같다. 나는 베르노가 납치에 실패한 미라크네 왕국의 아이네스 공주와 직접 겨루어보았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실력의 소유자였고 또 정보대에서 베르노는 충분히 냉정하게 움직였다는 증명서도 받았다. 백작, 당신이 비난한 베르노가 어떤 상대와 싸웠는지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그의 마차에 몸을 싣는 베트란을 보며 아이누켈의 얼굴은 퍼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베트란의 검술 솜씨는 그로서는 대적할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명분이 있는 결투 신청이었고 그는 거부할 경우에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이제 그는 8일 이내에 결투 날짜를 베트란에게 통보해야만 했다.
그를 보며 몇 명의 귀족들도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아이누켈과 같이 동조하며 베르노의 험담을 일삼았던 그들로서는 남의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복 결투 신청이 되지 않기에 오늘 베트란이 아이누켈에게만 결투를 신청하고 돌아갔을 뿐, 아이누켈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그다음 누구에게 결투를 신청할지 모를 일이었다.
결투일이 되자 많은 귀족들이 오랜만에 벌어진 결투를 보기 위해 모였다.
물론 베르노를 험담했던 귀족들은 그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결투가 끝난 뒤 그들에게 와서 다음 결투를 신청할까 봐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결투장으로 선택된 산마에스시의 외곽에 있는 평지에서 베트란과 아이누켈은 서로를 마주 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증인으로 나온 자들이 주위에 서 있었고 시에서 파견한 3명의 결투 심사관 중 중앙에 서 있던 심사관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확인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결투를 시작하십시오.”
베트란은 눈앞의 아이누켈을 신중한 눈으로 보았다. 이제까지 상대를 경시하며 싸운 적이 없는 베트란이다.
언제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아는 아이누켈은 오늘도 다르지 않은 그의 모습에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저놈은 빈틈이 없는 것일까?’
베르노와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손에 쥔 롱소드를 느끼며 베트란을 노려보던 아이누켈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러자 베트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오며 검을 이끌었다. 두 개의 검이 부딪치는 순간 베트란의 롱소드가 아이누켈의 검을 타고 오르며 얼음을 타고 미끄러지듯 아이누켈의 팔을 노린다.
황급히 몸을 옆으로 날린 아이누켈은 등 뒤를 노리는 서늘한 검기에 살짝 떨었다. 다시 몸을 돌리며 쫓아오는 롱소드를 그의 검으로 막고 베트란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갔으나 베트란은 희미한 잔상을 남기고 그의 허리를 가르며 쇄도해 왔다.
‘괴물 같은 놈!’
아이누켈이 몸을 뒤로 띄우며 물러서자 베트란은 그를 따라 앞으로 달려오며 검을 계속 질렀다.
막는 것에 급급해진 아이누켈의 이미에서 한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베트란의 검을 보면 목숨을 앗고자 하는 뜻이 확실히 담겨 있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팔 하나라도 가지고 가겠다.’
아이누켈의 눈이 독해졌다. 그의 다리를 노리는 검을 무시하고 베트란에게 검을 휘두르니 베트란이 검로를 바꿔 그의 검을 막았다.
“허헛!”
그의 검을 막은 베트란의 검이 쏜살같이 목을 노리고 다가오자 아이누켈은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나려 하였으나 이미 다가온 베트란의 검을 완전히 피해내지는 못했다.
‘제, 제길.’
왼쪽 가슴의 윗부분을 찔린 아이누켈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베트란의 아쉬워하는 눈빛이 그의 머리에 각인되다시피 한다.
“내가…….”
갑자기 베트란의 입이 열리며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뭐냐?”
“요즘 수련을 게을리한 것 같군. 도망 다니기에 급급한 너 따위를 상대로 이렇게 시간을 끌다니.”
주위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아이누켈은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졌다.
“빌어먹을 놈! 너보다 실력이 낮다고 하나 나 역시 동맹군의 지휘관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아아, 예비 전단의 전단장이었지? 건방진 놈. 감히 전단장 따위가 군단장에게 맞먹으려 드나? 그것도 부하들을 오합지졸로 만든 대장 따위가?”
“이, 익.”
전단보다 군단이 5배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전선에서 활동 중인 부대는 후방의 부대에 비해서 지휘관의 격이 높았다.
귀족의 작위만 아니었다면 아이누켈은 베트란에게 얼굴을 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네, 이놈.”
“이제 죽어라.”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를 내면서 베트란은 재빠르게 롱소드를 질러왔고 아이누켈은 대답을 할 새도 없이 그의 검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베트란의 검은 다시 미끄러지듯 검을 타고 왔고 기겁한 아이누켈이 몸을 돌렸으나 옆구리에 검이 찔렸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이를 꽉 물은 아이누켈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으스스한 기운이 회오리치듯 올라오며 그의 몸을 감싸 돌았다.
“블랙 블러디다.”
옆에 한 사내가 소리를 치듯 입을 열자 베트란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잠시 검을 거둔 베트란은 그가 블랙 블러디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확실한 절망으로 떨어뜨려 주마.’
베트란은 지금 복수심이라는 달콤한 마약 속에서 온몸에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냉정했기에 이런 온몸이 풀어지는 듯한 기분은 처음 맛보다시피 하는 것이다.
어느새 온몸을 검은 기운으로 둘러싼 베트란은 완전한 블랙 블러디로 변화한 아이누켈을 보며 슬쩍 웃어주었다.
그것을 본 아이누켈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검사로서의 생명을 걸고 블랙 블러디를 일으키는 동안 베트란은 그를 먹이로 생각하고 있는 야수로 변했던 것이다.
‘최악이다.’
제어되지 않는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리며 검을 휘두르니 베트란이 검을 맞대어왔다.
챙!
강렬한 충격을 느꼈지만 아이누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적응이 잘되지 않는 몸의 움직임은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고 있었다. 아마도 블랙 블러디를 한 것에 대한 부작용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분은 베르노를 비난했던 그의 생각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면 베르노를 비난하지 않을 텐데.’
베트란의 검을 쳐내며 그런 생각이 들자 아이누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베트란과 싸우게 되지 않았다면 평생 이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블랙 블러디를 펼치고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이 싸움에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하다.
‘개죽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베르노가 그의 왼팔을 베어버렸다.
“크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편안하게 비명을 지를 기회도 주지 않는 베트란이었다. 이미 베트란의 롱소드가 그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살고 싶다!’
이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운 아이누켈은 눈빛이 암울해졌다. 그리고 그의 기억이 끊어졌다.
“후…….”
베트란은 롱소드를 검집에 넣고서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누켈의 절망에 찬 눈빛을 보니 온몸이 나른해지고 있다. 이제껏 그의 감각에 이러한 기분이 잡힌 적은 없었다.
‘이게 복수심이라는 것인가? 위험하다고 느껴지지만 달콤한 그 느낌은 유혹적이군.’
베트란은 아이누켈의 팔을 베었을 때 시합 중단을 외치려 하였으나 그럴 시간을 주지 않고 베어버린 그를 멍하게 보고 있는 심사관에게 짧게 목례를 취하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다음 대상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는 베트란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서늘한 감정을 느끼며 피바람이 한동안 멈추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