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미스 12화
무료소설 카르미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카르미스 12화
제4장 이계(異界) (3)
‘아싸!’
드디어 들려오는 메시지에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른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퀘스트를 받을 건지 말 건지 물어오지 않아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어차피 수락할 것이었기에 신경 끄고 넘어갔다.
“좋아. 어떤 내기지?”
따로 퀘스트 창을 열어 확인할 필요 없이, 세리안의 입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었기에 여전히 날 째려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당신이 말한 내용에 저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고개를 숙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제 부모님을 모욕한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법물품의 가격은 마탑에서 정하는 것. 당신이 직접 마탑에 찾아가 마법주머니의 가격이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하고 가격을 낮추면 여기 있는 모든 마법주머니를 드리도록 하죠.”
“잉?”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이론을 중시하는 마탑에서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말이 허언임이 증명되는 것이니, 저와 제 부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세요.”
“…….”
이건 뭔가 이상했다.
마법주머니를 하나 주는 게 아니라 전부 준단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퀘스트를 수행했을 경우.
마탑.
마법사들이 집단을 이뤄 각자의 학문을 공유하는 곳으로, 그 어떤 나라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마탑이었다.
마법사라는 직업을 가진 유저들조차 마탑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그런 곳을 검사인 내가 가서 마법주머니의 가격이 비싸다고 항의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실제 마법주머니의 가격은 마탑이 아니라 판타지월드를 만든 (주)프리즈였다. 1:1문의를 통해 비싸다고 항의할 수는 있겠으나, (주)프리즈에서 들어줄 리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인벤토리의 공간을 한 칸 차지하는 것과, 다섯 칸 차지하는 것에 따라 그 효율성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절대 수행할 수 없는 퀘스트라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 퀘스트가 쉽다고 했어?’
내가 너무 조건을 과하게 충족시킨 결과였지만, 그것을 모르는 이상 처음 퀘스트를 공유한 유저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다시 받을 수도 없었다. 퀘스트는 오직 한 번만 주어지며, 포기했을 경우 그와 관련된 퀘스트가 전부 날아가기 때문이다.
“퀘스트 확인.”
힘없는 목소리로 퀘스트 창을 열어본 나는 이내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절망 퀘스트 - 세리안과의 내기]
세리안이 정말 화가 났을 때 발생하는 퀘스트.
마탑을 찾아가 마법주머니의 가격을 낮춰야 한다.
그냥 세리안과 그녀의 부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자.
퀘스트 보상 : 세리안의 잡화점에 있는 모든 마법주머니.
퀘스트 실패 : 세리안의 잡화점 이용불가.
“맙소사…….”
퀘스트에도 여러 가지 등급이 존재했다.
전직 퀘스트나 특정 시나리오 퀘스트의 경우는 따로 등급이란 것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일반적인 퀘스트라면 D급부터 SSS급까지 난이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다.
등급에 따라 보상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너무 어려운 퀘스트를 받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훗날을 기약해 남겨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등급 외에도 또 다른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특수 퀘스트와 절망 퀘스트였다.
특수 퀘스트는 말 그대로 특이한 경우 발동하는 퀘스트로, 보통 이벤트나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파티를 구성해서 클리어 해야 하며, 그 보상도 일정하지 않은 랜덤이기 때문에 가끔 대박 아이템을 받는 경우도 있어 많은 유저들이 커뮤니티를 이루어 함께하곤 했다.
하지만 절망 퀘스트는 말 그대로 절망이었다.
퀘스트를 얻기 위해 NPC들을 상대로 다소 난폭한 짓을 하는 유저들 때문에 생긴 것으로, 그 내용은 절대 수행 불가능한 것들로만 이뤄지는 것이다.
결국 절망 퀘스트를 받은 유저는 관련 퀘스트까지 전부 포기하거나, 아니면 실패 시 주어지는 페널티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이에 NPC에게 무리한 행동을 하는 유저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해당 퀘스트로 인한 페널티가 상당했기에 항의도 적지 않았고, 결국 페널티의 강도를 줄이는 것으로 패치 되었기에 나 또한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다.
세리안의 잡화점을 이용하지 못한다지만 어차피 다른 마을의 잡화점을 이용하면 되었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휴~ 할 수 없나?”
이대로 포기해 버리면 관련 퀘스트까지 전부 받을 수 없겠지만, 어차피 관련 퀘스트가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과감히 허공에 떠 있는 퀘스트 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세리안과의 내기’ 퀘스트를 포기하면 이후 연관되는 32개의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포기하겠습니까?]
멈칫!
포기하려던 나는 32개의 연관 퀘스트가 있다는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판월 홈페이지에도 퀘스트에 대한 정보가 일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퀘스트가 연관 퀘스트인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32종류나 되는 퀘스트를 전부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중에는 분명 좋은 보상을 주는 퀘스트도 있을 것이고, 그 퀘스트에 따른 연관 퀘스트도 존재할 것이기에 결국 최소 32개라는 말이었다.
“아, 아니.”
서둘러 퀘스트 포기를 취소한 나는 다시 난감한 표정으로 세리안을 바라보았다.
“뭐죠? 자신 없으면 사과하시고요.”
“흠흠.”
여전히 표독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세리안의 태도에 짧게 헛기침을 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굽혀갔다.
‘끄응… 무릎 꿇는 것은 싫지만 뭐, 대상이 NPC라면…….’
라는 생각을 하며 무릎을 꿇으려던 나는 이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서둘러 다시 일어났다.
벌떡!
“맞아! 제한시간이 없었지?”
아까 퀘스트 창을 확인해 보았을 때 분명 제한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은 내가 원할 때 수행하거나 실패하면 된다는 뜻.
비록 그동안 연관된 퀘스트가 발동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사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잘하면 퀘스트를 클리어 할 방법까지 생각났으니…….
‘마법주머니를 얻는 퀘스트가 공유된 이상, 최소 10골드나 하는 마법주머니를 살 유저는 거의 없다. 그렇다는 것은 (주)프리즈 측에서 가격을 낮출 수도 있다는 뜻!’
어떤 온라인 게임에서든 유저가 가지는 평균적인 돈의 단위가 낮아야 밸런스도 오래 유지된다. 돈만 많고, 살 게 없으면 누가 재밌어 하겠는가?
때문에 회사 측에서는 틈틈이 유저들이 돈을 소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아이템을 등장시키는 것이고, 지금처럼 팔리지 않는 아이템의 경우 가격을 낮추거나 기능을 추가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많은 유저들이 구입한 물건의 가격이나 기능을 수정하는 일은 없겠지만 마법주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고렙이나 부자로 불리는 유저들만 가끔 한 개 더 구비해서 들고 다닐 뿐. 그 외에는 비싸다는 이유로 거들떠도 보지 않았으니, 결코 가능성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좋아! 마탑을 찾아가 설명하고 오지.”
“에? 뭐, 뭐라고요?”
내가 한 말이 의외였을까? 세리안의 당황스런 대답이 들려왔지만 나는 힘껏 고개를 치켜든 채 당당한 발걸음으로 잡화점을 나왔다.
“에휴~ 이러다가 평생 못 깨는 거 아닌가?”
막상 나오고 나니 살짝 후회되기도 했지만, 까짓것 1년이 걸리더라도 마법주머니의 가격이 낮춰지기만 하면 되었기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걱정을 떨쳐버렸다.
사실 마법주머니를 얻으려 했던 이유는 이계의 세상에서 팔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계에서 방문한 잡화점에는 일절 마법물품을 판매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귀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이곳에서 얻은 마법주머니를 이계에 되판다면 엄청난 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다른 물건으로 알아봐야겠네.”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344론이 전부였다. 이걸로 살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지만, 그나마 재료에 관련된 아이템은 사람들이 싸게 거래했기에 내 발걸음은 유저들이 몰린 시장으로 향했다.
“쌉니다! 싸요~! 내구력 17이나 남은 어쌔신 단검이 단돈 5실버!”
“판월 접어요! 재료템 전부 합쳐서 1실버에 처분합니다!”
“늑대 가죽 장당 1론에 삽니다!”
“내구력 빵빵한 양검 구해요!”
웅성웅성.
시장에 도착하자 수백 명의 유저들이 저마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거나 판매하고 있었다.
이곳이 활성화된 이유는 간단했다.
경매 게시판을 이용하면 보다 쉽게 물건을 팔고 살 수 있었지만, 최소 경매 시간이 24시간이다 보니, 급히 팔거나 사야 할 물건은 따로 이곳에 가져와 개인상점 형식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어디 보자…….”
매의 눈처럼 주변을 둘러본 나는 이계에 가져가면 비쌀 거라 생각되는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늑대 가죽이 괜찮겠군.”
늑대 가죽은 가죽 방어구 제작에 필요한 것으로, 관련 직업을 가진 유저들이 찾는 재료이기도 했다.
하지만 늑대를 잡을 때 거의 90%에 육박하는 확률로 드랍이 되었기에 상당히 많은 양이 돌아다녔고, 때문에 한 장에 1~2론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거래되었다.
“쳇, 1론짜리는 못 사겠군.”
이미 한 곳에 자리 잡은 유저가 장당 1론에 구입을 하고 있었기에, 같은 가격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한 나는 즉시 장당 2론에 판매하는 유저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아, 어서 오세요. 무엇을 찾으시나요?”
유저들의 개인상점은 참 초라했다. 그저 앞에 돗자리 깔아놓고, 판매할 물건을 진열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스템에 의한 기능이기 때문에 함부로 가져가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물건을 고를 때 쭈그리고 앉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늑대 가죽을 사려고 합니다만…….”
“아! 늑대 가죽 말이군요. 여기 쓰여 있듯이 장당 2론이고요. 현재 522장 남았는데…….”
“50장만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90론입니다.”
“네? 아, 감사합니다.”
난데없이 가격을 깎아주는 상대방의 행동이 의아했지만,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나는 이내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서려던 모습 그대로 굳어야 했다.
“하하. 아름다운 아가씨에게까지 제값 받을 순 없죠.”
흠칫!
아름다운 아가씨? 도대체 누가? 설마 내가?
“누, 누가…….”
“누구긴요. 제가 이래봬도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아, 혹시 현실에서는 헤어스타일이 다르신가요? 그래도 꽤 미인이실 듯한데…….”
“컥!”
불안이 현실로 다가왔다.
실제로 머리를 기르지 않은 이유도 저런 소리 듣기 싫어서였지 않은가? 그런데 게임에서까지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캐릭터 생성 과정에서도 머리를 짧게 했을 것이다.
“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하. 네~. 안녕히 가십시오, 아가씨.”
여전히 나를 여자로 오해하는 유저를 뒤로한 채 부리나케 한적한 골목으로 이동한 나는 상태 창을 열어보았다.
“상태 창 오픈!”
상태 창의 기능은 내 캐릭터의 정보 외에도 현재 내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온다.
때문에 확대 기능을 이용해 상세하게 얼굴을 살펴본 나는 점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이건 완전 여자잖아?”
그랬다.
처음 캐릭터를 생성할 때만 해도 머리 긴 남자를 떠올리며 만들었었다.
붉은색 긴 머리를 휘날리며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사내. 그것이 내가 바란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뭘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무잡잡했던 피부가 백옥같이 하얗게 변해 있는 것이다.
캐릭터 생성 때도 피부색이나 여드름 등은 수정이 불가능했다. 아니, 커다란 흉터나 심할 정도의 여드름은 (주)프리즈에 문의를 통해 없앨 수 있지만, 그 외 잡다한 것들은 현실의 모습 그대로 반영되었다. 너무 큰 변화는 비매너 행위를 불러오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그런데 지금 내 얼굴은 기존에 있던 잡티조차 사라지고, 여자들보다 더 매끈한 피부를 가지게 되었으니 누가 봐도 오해할 만했다.
“설마… 로그아웃!”
혹시 이계에 갔던 일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 나는 서둘러 로그아웃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