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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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91화
091 망인곡(亡人谷)(3)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감시하는 자들을 따돌린 듯하자 걸음을 멈춘 무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일까요?”
무혼의 말에 고명우와 다른 무사들도 주위를 보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지형과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군.”
주위에서 대답을 기다리던 고명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감시하는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들은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싼 낭떠러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분지… 인가?”
낭떠러지가 원형을 이루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울창해 보이는 숲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 주위를 살피던 무혼은 가슴에 불안감이 맴돌고 있었다.
‘뭐지?’
그러나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뒤에서 많은 자들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로 남궁장천이 이끄는 신룡대의 기척이었다.
“자네도 느꼈나?”
“예.”
무혼이 나무에서 내려오자 고명우와 공극소도 같은 기척을 느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며칠 전의 그들인 듯합니다. 처음에야 방심한 틈을 타서 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계를 할 것이니 같은 방법을 사용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우선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혼의 말에 동의를 한 그들은 날아가듯 숲속 더욱 깊이 들어갔다.
그들이 숲으로 몸을 감추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자 남궁장천과 그가 이끄는 신룡대가 무혼이 있던 곳으로 내려섰다.
“이곳에서 떠난 지 한 시진이 되지 않습니다.”
바닥을 조사하던 신룡대의 대원이 얘기하자 남궁장천도 고개를 끄덕이고서 눈앞의 숲을 보았다.
아마도 숲 깊숙이 들어간 것이리라.
“그들 외는 다른 사람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나?”
“다른 사람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 말에 남궁장천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갈두휘의 말대로라면 다른 추격대가 지금쯤 보이든지 아니면 무혼의 일행과 싸우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추적하면서 아직 다른 무림맹의 무사들을 보지 못했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갈 아우가 실수했을 리는 없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것일까? 아니야. 그자들이 가져온 서신은 분명 제갈 아우의 필체였고 그의 인장이 찍혀 있었어. 그럼 어디서인가 길이 어긋났거나… 아니면 숲의 안쪽에서 매복 중?’
생각을 정리한 남궁장천은 다시 주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진을 구성하고 그 진을 유지한 채 추격을 한다. 서둘러라. 우리가 망설이고 있을 때 다른 추격대가 그들과 싸우다 몰살당할지도 모른다.”
그의 외침과 함께 진을 구성하고서 신룡대도 무혼의 일행을 쫓아 숲 속 깊이 들어갔다.
“정말 이곳으로 들어간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죠?”
“확실해. 이곳에 들어간 이후 돌아온 사람은 없어.”
제갈두휘의 눈 앞에 펼쳐진 계곡은 망인곡, 들어간 모든 사람이 잊혀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잠시 제갈운혜의 눈빛을 떠올렸던 제갈두휘는 살짝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리고서 다시 한번 계곡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다른 계곡과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는데요?”
“내가 봐도 그러네. 하지만 들어간 사람 중에 나온 자는 한 명도 보지 못했네. 이 계곡에 들어선 순간 그 사람과는 영영 이별이지.”
두휘는 낄낄거리고 있는 두 공자를 보았다. 그리고 두 공자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가 실종된 사람들 혹시 그들도 이 계곡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없어.’
두휘의 눈은 무혼과 함께 움직이는 흑도의 청년들과 남궁장천이 이끄는 신룡대가 사라진 계곡의 숲으로 향했다.
‘이제 해결된 것일까? 천기가 바뀌어 백도의 운명에 변화가 생기게 될까?’
해가 지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제갈두휘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바스락.
숲을 헤쳐나가고 있던 무혼은 발아래의 풀이 내는 소리에 무릎을 굽히고 바닥의 흙을 만져보았다. 흙은 메말라 있진 않았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이상해.”
무혼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고명우는 그도 바닥에 앉아 잡초를 꺾어 보았다.
딱.
잡초가 꺾이는 소리가 아닌 마른 나뭇가지가 꺾어지는 소리가 나자 무혼과 고명우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확실히 이상하죠?”
무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고명우는 다시 일어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함정에 빠진 듯하군.”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하는 고명우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한가득하였다.
임무 중에는 다른 일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깬 후 계속되는 사건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혼은 그런 마천태풍도에게 괜찮다는 듯이 살짝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뒤를 돌아보니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흑도의 무사들도 괜찮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고형님 말대로 우리가 함정에 빠진 듯한데 언제부터 빠진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모두들 조심하시오. 심상치가 않습니다.”
무혼의 이야기에 주위에 있던 흑도의 청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의 무사들과 괜한 시비가 붙으면서 시작된 터라 모두들 긴장을 하고 있었다.
“꼭 우물에 들어온 것 같군요.”
녹허주의 말에 무혼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뿌연 안개와 함께 동그란 형태의 분지가 있었고 기괴하게 뒤틀린 주위의 풍경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공야 소협의 생각은 어떠시오?”
“본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위험한 곳에 있다는 것이며 한순간의 방심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무혼의 말을 들은 흑도의 무사들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며 침을 삼켰다.
“공야 아우, 설마 같은 무림맹의 무사들도 들어와 있는데 큰일이 나겠나?”
무혼을 따라온 고명우가 무혼을 보고 입을 열었다.
“글쎄 말입니다. 저들이 자신들의 동료까지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모두 같지가 않으니…….”
무혼의 줄임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고명우는 얼굴을 굳히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궁장천의 신룡대도 무혼의 일행과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남궁 대장님, 아무래도 우리가 볼 때 이 숲이 이상합니다.”
신룡대의 무복을 입은 한 대원이 심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자 남궁장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쫓고 있는 흑도의 무사들을 조심할 게 아니라 우리가 있는 이 숲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날카로운 눈빛으로 숲의 구석구석을 훑어보던 남궁장천은 제갈두휘를 떠올렸다.
“설마 우리를 위험한 곳으로 빠트린 것은 아니겠지.”
제갈두휘의 전서를 받고 급하게 추격을 해온 그들이었으나 전서에 있는 다른 무림맹의 추격대도 제갈두휘 본인도 보이지 않는다.
앞을 막았다면 지금 신룡대와 마찬가지로 이 숲에 있어야 할 그들이 없다는 것에 남궁장천은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들 이 숲에서 나간다. 저들을 놓친 것에 대해 추궁이 있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남궁장천의 명령에 신룡대는 발걸음을 돌렸다. 나름대로 오랜 시간을 수련해온 그들로서도 지금 이곳의 느낌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던 중이다.
그러나 분명 오던 길을 밟아 왔음에도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같은 길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처음 겪는 일에 남궁장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웅원의(熊元儀)가 입을 열었다.
“남궁 대장님, 이 길은 우리가 온 길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우리는 왔던 길로 되돌아왔는데?”
“아닙니다. 저도 잠시 속을 정도로 같아 보이나 실은 전혀 다른 풍경입니다.”
환령신투(幻靈神偸)의 제자인 그의 눈을 의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남궁장천은 되물어보았다.
“그럼 자네는 길을 찾을 수 있나?”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오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이미 제가 알고 있는 길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후우.”
남궁장천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 사람들을 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혹시 흑도의 무사들을 만나게 되면 일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 섣부른 공격은 피하라.”
남궁장천과 웅원의의 이야기를 들은 신룡대의 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인 후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숲을 헤매던 그들은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혼의 일행을 발견했다.
“모두들 멈춰라!”
10여 장의 거리를 두고 남궁장천이 명령을 내리자 흑도의 무사들도 백도의 무사들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병장기를 뽑지는 않았다.
무혼과 남궁장천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던 그들의 침묵은 남궁장천이 입을 열면서 깨졌다.
“공야 소협, 혹시 이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도 이곳은 처음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곳으로 오게 한 것은 그대들이지 않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우리입니다. 이곳은 대체 어디입니까?”
그 말에 남궁장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누구 짓입니까?”
무엇을 물어보는지 짐작한 남궁장천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생각을 말하였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가 이러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계략에 빠진 것은 맞는 듯하니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 서로 공격을 자제하도록 합시다.”
남궁장천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자 무혼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넓게 산개하여 숲을 조사하던 그들은 한 신룡대의 대원이 외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흑백의 모든 무사들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모였다. 그것은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원형의 공터를 둘러싼 커다란 바위들이 기둥처럼 있었고 바위의 바깥쪽에는 기묘한 문자가 새겨진 원이 바닥에 그려져 있다.
무혼은 공터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검붉은 색의 바위를 유심히 보았다.
그 바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바위는 무혼을 부르고 있는 듯했다.
‘아이네스 소저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마법진과 흡사하군. 게다가 저 바위에 새겨진 문자도 마법의 문자라고 부르는 ‘룬’과 비슷하게 생겼어.’
몸을 날려 공터로 뛰어든 무혼은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귀에 울리는 박동 소리를 들었다.
‘원래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거였나?’
아니었다. 무혼의 귀에 심장 박동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무혼은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지금 귀에 들리는 것은 무혼의 심장 박동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바위에서 나는 소리?’
어느새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무혼의 다리가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공야 아우, 왜 그러나?”
고명우는 무혼이 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으나 그곳에는 빈 공터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혼의 손길은 자신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검붉은 바위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어느새 주위의 사람들도 몽롱함 속에서 무혼이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고명우의 눈길도 한순간에 초점을 잃은 채 그저 무혼의 뒤를 쫓고만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더라?’
고명우는 그가 잊은 행동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인데 잊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무혼의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고명우는 정신이 갑자기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서 무혼의 손이 점점 다가감에 따라 선명하게 나타나는 검붉은 색의 돌이 고명우의 눈에 가득히 들어오며 본래의 정신을 찾은 것이다.
“공야 아우, 멈춰!”
그러나 때는 늦어 무혼의 손이 검붉은 바위에 얹어졌다.
바위는 무혼의 손이 닿은 부분을 시작으로 환한 붉은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고 거대한 돌로 둘러싸인 공터와 바위 바깥쪽의 바닥에 그려진 원형의 그림들이 일제히 검은색으로 변하며 검은빛이 솟아올랐다.
모두들 몽롱했던 느낌은 사라지고 무혼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깨어났다.
“공야 아우!”
“공야 소협!”
고명우와 남궁장천이 동시에 무혼을 불렀지만 무혼은 뒤돌아보는 동안 온몸이 투명해지며 사라졌다.
놀란 고명우는 무혼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지만 남궁장천이 앞길을 막았다.
“비키시오.”
“더 이상 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바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조금 전 검은빛을 발했던 그림이 있었다.
팍 !
고명우는 서 있는 자리에 검을 꽂았다. 그리고 자책을 했다.
“내가 괜히 나서지만 않았더라도…….”
눈앞에서 그의 의제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비록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비통한 심정이 되었다.
“고소협.”
옆에서 보던 남궁장천이 말을 붙이자 고명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남궁 소협, 이 흉계를 누가 꾸민 짓인지 알아야겠소. 무인으로서 정정당당히 무예를 겨루다가 이리되었다면 비통하지라도 않소. 나의 의제가 간악한 흉계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소.”
고명우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장천도 얼굴을 굳혔다.
그도 팽조덕이나 다른 친우들이 무예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쓰러졌다면 지금의 고명우처럼 분개하리라.
“우선…,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도록 합시다.”
옆에서 화룡마편이 입을 열자, 고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공야 아우가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나는 이곳을 지키겠소.”
“며칠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몇 년이라도 나는 이곳에서 공야 아우를 기다릴 것이오.”
그의 결의에 찬 얼굴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분지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꼭 데리러 오겠소.”
남궁장천의 말을 끝으로 다른 사람들이 사라지자 고명우는 중얼거렸다.
“공야 아우, 무사한 거지?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라도 돌아오게.”
그의 눈길은 무혼이 사라진 곳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