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86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2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86화
086 흉계(凶計)(1)
아이네스가 만년목과 만나기 며칠 전, 천기의 각성이 있었을 무렵, 많은 전각들이 줄지어 있는 제갈세가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마교의 준동만으로도 부족하여 서장의 세력들까지 중원에서 날뛰려는 것인가?”
얼마 전에 서장의 라마승들에게 기습을 당한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건물들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쉰 제갈두휘는 옆에 있는 자들을 다시 흘깃 보았다.
짙은 푸른색의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왼손을 얹은 모습에 무림인의 기상이 느껴지지만 두 눈 사이가 좁고 눈매가 가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경계심이 일어나게 하는 인상의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가 사천의 강자 중 하나인 점창파의 사일철검(射日鐵劍) 문종후(聞綜侯)다.
“이보게,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제갈두휘가 고개를 돌리니 공동파에서 즐겨 입는 푸른색의 도사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문종후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에게 말을 건 자는 공동파의 속가제자인 추청령(秋淸靈)이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듯하여 잠시 감상에 빠졌을 뿐입니다.”
“후후. 이 친구, 누가 무림의 문사가 아니랄까 봐 먹물 냄새가 나는 소리를 하는군.”
잠시 유쾌하게 웃던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건넸다.
“혈랑환검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실력을 지닌 게 아니라는 말은 틀림없겠지?”
그 말에 제갈두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이번 일만 잘되면 우리 이름을 날리는 것은 시간문제군.”
뒤에서 사일철검이 다가오며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주 보고서 기분 좋은 듯 웃음을 계속 흘렸다.
“제가 한 말을 잊지 말고 절대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혈랑환검을 이 세상에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이네. 계곡으로만 몰아넣는다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혈랑환검은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할 것이네. 우리의 말을 의심하나?”
그들은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며 제갈두휘를 보았다.
고개를 저은 제갈두휘는 홀로 말을 달려 제갈세가로 내려왔다.
계획대로 그들을 포섭하고 혈랑성의 주인을 중원에서 사라지게 만들고자 협조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은 성공했다.
그들과 함께 세운 계획대로 혈랑환검을 중원 땅에서 지워버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 계획의 첫걸음을 위해 이곳 제갈세가까지 돌아왔다.
‘후우, 하지만 이 불안감은 뭐지?’
지금 그는 세가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진식 사이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진식들은 수백 년간 세월이 흐르면서 계속 바뀌었지만, 제갈세가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말을 달리며 진식들을 보던 그는 진식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식을 모두 재배치해야 할 때인데, 모두들 정사대전에 모든 신경을 쓰고 있어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그러나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자랑스러워했고 무림 최고의 문파로 키워갈 것을 결심했던 제갈세가의 안식처가 점점 다가오자 제갈두휘의 마음은 조금씩 편해져 왔다.
그리고 속으로 다시 한번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제갈세가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제갈두휘가 다가오자 간단한 질문을 던졌을 뿐 어느새 말에서 내려 정문을 들어가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비밀리에 갔다 와야 한다.’
본래 세가로 돌아오면 문주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이는 제갈세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가에서 당연히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제갈두휘는 문주가 있는 본전(本殿)이 아닌 제갈운혜가 머물고 있는 별채로 발길을 돌렸다.
별채로 향하는 길은 아름답고 우아한 곡선으로 보이지만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기락신령진(起落身靈陣)이 길을 따라 쭉 설치되어 있다.
라마승들이 침입했을 때 별채의 안전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가 기락신령진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마승들이 별채로 들어왔다는 말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알고 진법을 뚫고 들어왔을까?’
만일 그가 지금 같이 온 두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세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자그마한 단서라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마승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기 힘들 것이다.
제갈두휘가 생각에 잠겨 걷는 동안 그는 어느새 별채에 도착했다.
제갈운혜가 하늘의 별을 편안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긴 의자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눈앞의 풍경이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제갈두휘의 눈에는 별채의 정원이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가 변한 모양이군.’
혈랑환검이 무림에 등장한 지 겨우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제갈두휘의 인생은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
어디에도 급격한 변화는 좋지 않듯이 길지 않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한다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다.
잠시 그의 눈앞을 막고 있는 문을 보며 망설였지만, 그는 문을 두들겼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니 그 안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다, 두휘다.”
“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제갈두휘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제갈상휘와 함께 앉아 있는 제갈운혜의 모습이 보였다.
납치되었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사이에 오히려 건강이 좋아진 듯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 혈색이 돌았고 그녀의 온몸에서 전에 느껴지던 병색은 더 이상 온데간데 찾을 수 없었다.
제갈운혜의 모습을 보는 두휘의 얼굴에서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고마워요, 오라버니.”
“어떻게 해독을 할 수 있었느냐? 그동안 수많은 명의를 불렀지만, 해독이 되지 않던 독이 아니더냐? 독제 어르신이라도 방문하셨더냐?”
현재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인 독제 당허주(唐虛宙)는 은거에 들어가 당가에서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해 속을 태우는 상태였다.
제갈운혜의 독을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유일한 인물로 생각이 되었기에 제갈세가는 개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들 그의 행방을 찾고자 몹시도 노력했지만 찾는 데 실패했었다.
“그분이 오신 것이 아니오라…….”
그의 물음에 제갈운혜는 잠시 말을 흐리며 제갈상휘의 얼굴을 보았고 제갈상휘 역시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제갈두휘는 잠시 대답을 기다렸으나 끝내 아무 말이 들려오지 않자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러는 것이냐? 설마 나에게 비밀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닐 테지?”
그제야 할 수 없다는 듯 제갈운혜가 그를 바라보았다.
“혈랑환검이 소녀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소녀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한순간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말이 여동생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제갈두휘도 잠시 아연해진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눈길을 돌려 확인하듯 제갈상휘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제갈상휘 역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제갈두휘는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백도와 무림맹의 적이다. 어찌 그가…….”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그는 소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악독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피를 좋아하는 마인도 아니었습니다. 정파와는 다른 협의 길을 걷는 한 명의 무인이었습니다.”
무혼을 변호하려는 듯 제갈운혜의 입에서는 갑자기 많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변했구나. 이제까지 누구보다도 그를 막는 데 적극적이었는데.’
제갈두휘는 그녀의 모습에서 혈랑환검을 없애기 위한 자발적인 도움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치자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끝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느냐?”
목소리 속에 냉기가 느껴지자 제갈운혜는 잠시 흠칫하며 몸의 자세를 바로잡고 불안한 눈초리로 제갈두휘를 보았다.
“그건 왜 물으시는 건가요?”
“운혜야, 설마 네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아닐 테지? 그는 어디에 있지?”
제갈운혜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제갈상휘는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형님, 그는 운혜를 도와준 은인입니다.”
상휘는 운혜를 위해 입을 열었으나 두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가 두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어떠한 일을 했어도 그가 흑도의 인물로서 백도와 무림맹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휘가 그에게 시선을 똑바로 던지자 한숨을 내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은혜를 입었다 하여 제갈세가의 운명을 고스란히 그에게 갖다 바칠 생각이더냐?”
두휘의 목소리에서 그의 생각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상휘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비록 무혼을 봤을 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었지만 그를 위해 두휘와 언쟁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다.
“운혜야,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그가 너를 도와준 것은 나도 고맙게 생각한다만 그것은 사적인 일이다. 제갈세가가 포함된 무림맹의 운명을 위협하는 자라는 사실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그건 어제 밤하늘을 봤을 때도 알 수 있었지?”
두휘의 말에 운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좀처럼 움직이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휘가 그의 앞에 중원의 지도를 가져다 놓자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그녀의 친오라버니를 보다 마지못해 소매 사이에서 섬섬옥수(纖纖玉手)를 꺼내 지도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눈을 감은 그녀는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무혼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세가가 이대로 중원 땅에서 내쳐지는 것을 보고 있을 생각이냐?”
“아니에요. 오라버니, 우선 오라버니께서 그의 행방을 알면 어찌하실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
운혜는 두휘가 무혼의 행방을 알게 된다면 무혼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그의 의지를 꺾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드디어 제갈운혜의 섬섬옥수가 중원의 사천을 향해 옮겨가며 손을 짚고 입을 열기 시작하자 두휘는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고 눈을 따라가 살펴보았다.
“지난 며칠간 그가 움직여간 경로에요. 이곳 청천(靑川)에서 평무(平武)를 거쳐 계속 서쪽으로 움직였어요. 그리고 흑수(黑水)에 머무르다 어제는 이곳을 지나갔어요.”
운혜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의 마을 이름을 속으로 외운 제갈두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도움이 되었다. 역시 제갈세가의 재녀답다.”
며칠간의 그의 행적을 소상히 알고 있자 기쁨에 칭찬을 하고자 했던 두휘는 그녀의 눈에서 슬픈 빛이 보이자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나 보구나.’
아무래도 제갈운혜는 사명감에서 혈랑환검의 행적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도움을 받고 며칠간 같이 지낸 그에게 어떤 식으로라도 친분이 생겼을 것이고 정이 들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연정을 품은 것은 아니겠지.’
그녀가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던 두휘의 머릿속에 있는 계획대로라면 혈랑환검은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운혜의 마음속에서 혈랑환검의 존재도 지워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겠다.”
“그는…….”
운혜의 목소리가 들리자 제갈두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뿌리치듯 제갈두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혈랑환검은 이 땅에서 백도를 쫓아낼 운명을 가진 자다. 그것을 결코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서는 그의 등 뒤를 제갈운혜의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냉정히 외면한 제갈두휘는 다시 길을 따라 제갈세가의 문을 나섰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몸을 돌려 제갈세가를 보았다.
“이제 이대로 길을 떠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랑환검을 없애겠습니다. 그리고 제 잘못이 있다면 돌아와 스스로 벌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재촉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나?”
“예, 지금 흑수를 지나 금천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금천이라고? 사실인가? 훗. 잘 되었군.”
추청령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킬킬거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을 맡길 만한 자가 있지. 내 부탁이라면 그는 거절하지 못할 걸세.”
제갈두휘가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던 제갈두휘는 속으로 다짐했다.
‘어차피 내친걸음이다. 이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 사람은 말을 달려 무혼이 있다는 금천을 향해서 말을 몰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