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76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76화
076 무인(1)
제갈운혜는 처음으로 흑도의 고수를 자세히 볼 기회가 생겼다.
‘세가의 사람들은 흑도의 고수들이 악랄한 심성과 잔혹한 손속을 가졌으며 욕심이 많고 음심에 눈이 번들거린다고 했었는데…….’
그러나 그녀의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혈랑환검의 어디에도 그러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조금 전의 격전을 보지 않았다면 의협심이 가득한 백도의 청년고수로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흑도의 특유의 모습은 있긴 했다.
“멈춰라!”
어느 산을 통과하는데 무혼과 제갈운혜의 앞길을 막는 자들이 있었다. 무혼이 보니 일신에 약간의 무공이 있으나 무인이라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실력인 듯했다.
“무슨 일이오?”
“이곳을 통과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치러야 하는 것이 있지.”
일곱 명의 사내 중 중간에 서 있던 어깨가 벌어진 자가 누런 이를 내보이며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게 무엇이오.”
“당연히 통행료다. 그리고 네놈 옆의 계집은 두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으흐흐, 고것 참… 쓰읍.”
스스로를 파산신력이라 부르고 있는 과동량은 제갈운혜를 보며 흐르던 침을 닦고 무혼을 다시 훑어보았다.
비록 무림인들이 주로 입는다는 경장무복과 등의 자루에 든 것이 검인 듯하였으나 그다지 실력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흐흐, 네놈보다 곱절은 강해 보이는 녀석에게도 난 이겼다.’
뒷골목에서 건달 짓을 하다 우연히 파철도법(破鐵刀法)을 익혔고 타고난 신력과 맞물려 검을 들고 행세를 하는 많은 자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과동량은 그가 한 번도 무림의 고수라 불리는 자와 겨룬 적이 없다는 것을 몰랐기에 자신감이 언제나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들의 대장이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자 과동량의 수하들도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마구 내뱉으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제갈운혜는 기가 막혔다. 그녀의 눈으로 보아도 허접한 무공실력을 가진 듯한 자들이 그 무공실력을 믿고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채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후회는 없나?”
제갈운혜가 옆을 보니 무혼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를 대할 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오호, 이 자식 봐라. 감히 어르신께서 이야기하는데…….”
과동량이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의 손에 있는 거대한 도를 휘두르며 무혼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는 눈앞에서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눈앞에 있는 애송이의 몸을 붉은 기류가 둘러싸고 있었고 등에서 뽑은 검날에 붉은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퍼어어억!
무혼의 장검과 부딪친 자칭 파산신력은 그의 몸에 밀려드는 엄청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2장의 거리를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무혼이 고개를 돌리니 파산신력의 부하들은 무혼의 살기가 가득한 시선을 받자 몸을 떨며 다리에서 힘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무혼의 검을 감싸고 있는 붉은 기운이 말로만 들었던 검기라는 것을 짐작한 그들은 진짜 고수를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처음 겪은 무시무시한 살기에 억눌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자 본능적으로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온몸을 떨면서 반으로 잘린 그의 도를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던 과동량은 무혼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힘겹게 움직여 절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고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 그럼 죽을 테냐?”
‘헉.’
이야기꾼의 이야기에서 나온 대사를 읊었을 뿐인 과동량의 머릿속에서 위험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 검기라는 것을 보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야 믿게 된 이야기를 떠올려 본 과동량은 앞에 있는 무혼이 흑도의 고수라고 생각을 했다.
‘잘못 걸렸다. 백도의 고수는 빌면 용서를 잘해 준다고 했었는데, 흑도의 고수는 인정사정없다고 했었지.’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그 말을 들은 과동량은 용서를 받았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엄청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분명 목숨만 살려주겠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무혼의 검이 과동량의 팔과 다리의 힘줄을 자르며 지나갔고 뒤이은 무혼의 발길질이 그의 무릎과 팔꿈치의 뼈를 사정없이 조각냈다.
“끄아아아아!”
과동량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바로 아혈을 점해 목소리를 막았고 마지막으로 단전을 강하게 차 완전히 부순 후 무혼은 그의 부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놈들도 목숨만 살고 싶나?”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가오는 무혼을 산적들은 망연자실하게 보았다.
무혼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고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팔이나 다리의 뼈를 하나씩 분지른 후 단전을 파괴하여 무공을 폐해버렸다.
“다음에 다시 걸린다면 그때는 어깨 위에 있는 것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무혼은 제갈운혜와 그 자리를 떠났다.
“저렇게 심하게 할 필요는…….”
“죄송합니다. 저들은 무공이 없는 민초들에게 더욱 악랄하게 대할 것입니다. 약간의 힘으로 남을 핍박하며 유세를 떠는 자들을 결코 봐 넘길 수가 없군요.”
무혼의 말에 제갈운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주위에 정파의 후기지수가 있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아마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무혼의 다른 면도 볼 수 있었다. 작은 마을에 잠시 지났을 때 점소이의 실수로 제갈운혜에게 음식을 엎질렀고 그것을 무혼이 대신 막아주었다.
‘그저 실수일 뿐인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허리를 숙인 점소이를 제갈운혜는 안타깝게 보았다. 그러나 무혼은 옷에 묻은 음식을 털며 짧게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닦을 수건을 하나 가져다주게.”
생각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무혼에게 제갈운혜가 의아하다는 듯 눈길을 던지자 그는 난처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갈 소저, 저 점소이는 단지 실수를 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무공도 익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녀의 기분을 살피는 듯한 의견을 구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제갈운혜였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혼은 다가온 점소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 소저께서 자네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게.”
무혼과 여정을 떠나는 며칠 동안 그를 관찰한 제갈운혜는 무혼의 행동기준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무공을 지니지 않고 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예의 바르고 온순한 편이고, 자기 힘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 자들에게는 용서하지 않는 성격, 적아에 대한 기준이 뚜렷하고 손속에는 거침이 없지만, 함부로 자신의 무공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
이것이 여행을 하며 제갈운혜가 본 무혼의 모습이었고 정파의 협행과는 차이가 있지만 흑도에도 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둘의 여행은 한결 편해졌다.
‘혈랑환검만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흑도의 고수들도 이런 걸까?’
제갈운혜를 보고 있는 아이네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힘들여 해독해준 이유도 무혼의 곁에서 빨리 사라지라고 해 준 것이다.
그런데 몇 번을 와서 봐도 제갈운혜가 아직도 무혼의 주위에 머물며 헤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마음이 불편했다.
- 무혼 경.
- 예, 아이네스 소저.
- 저 여자랑 언제까지 같이 다니실 거예요? 더욱이 저 여자는 적이잖아요.
- 하하,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곧 헤어질 생각입니다.
- 그래도 무혼 경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 제갈 소저는 명문의 여식입니다. 아이네스 소저의 말대로 적대하지 않는다면 결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문이 괜히 명문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세력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세력에 대한 믿음과 신의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간혹 그 명문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무혼이 본 제갈운혜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림주까지 하루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무혼과 제갈운혜는 산 중턱의 바위에서 나란히 앉아 쉬고 있었다.
서로의 세력에 관한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피했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만 나누며 왔던 제갈운혜는 무혼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공야 소협께서는 마음에 두고 계신 소저가 있으신가요?”
묻고 나자 은근히 부끄러워진 제갈운혜는 살며시 얼굴을 내렸으나 그의 대답이 궁금해 귀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무혼은 콧등을 살짝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 무혼 경, 저도 궁금해요. 대답해 봐요.
‘윽.’
그냥 두루뭉술 넘기려던 무혼은 머릿속을 울리는 아이네스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어 제갈운혜는 별다른 점을 눈치채진 못했다.
“그럼 어떤 소저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보신 적은 있나요?”
이 말을 하며 살짝 고개를 든 제갈운혜는 허공을 보고 있는 무혼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노래라…….”
무혼은 아이네스를 위해 부른 자장가가 떠올랐다. 아이네스가 원해서 부른 것이긴 하였지만 그녀를 위해서 부른 노래이기도 했었다.
“그런 적은 있군요.”
“예, 어느 소저이신지 좋아하였겠어요.”
“그랬을까요?”
“그럼요. 강한 남자가 자신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 그것은 많은 여인들의 작은 꿈이기도 하답니다.”
제갈운혜는 림주에 가까이 갈수록 어쩐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그녀가 막아야 할 사내였다. 그러나 미워하기 어려운 사내였다. 제갈운혜는 살며시 눈을 들어 무혼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무혼은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 어머? 무혼 경, 그 숙녀가 누구예요? 알려주세요.
- …….
- 피이… 무혼 경이 그런 면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밝은 달이 떠오른 밤에 창문 밑에서 불렀나요?
‘검을 들고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욱 용기를 내어 부른 것이었는데 아이네스 소저는 기억을 못 하는 것인가?’
그치지 않고 질문과 불평을 털어놓는 아이네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억을 하지 못하는 아이네스가 왠지 원망스런 무혼이었다.
스스스.
귀에 작은 바람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무혼은 제갈운혜의 앞을 지키며 검을 뽑았다. 그러자 무혼의 앞을 막으며 내려서는 자들이 보였다.
‘라마승들은 아닌데?’
무혼이 보기에 한 명, 한 명이 고수가 아닌 자들이 없었다. 특히 눈앞에 보이는 검을 든 자를 보니 눈에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이 이미 자신만의 검로로 들어선 자이다.
일대일의 대결에서라면 겨루어 볼 만하겠지만 비무하는 것도 아니고 또 뒤에는 제갈운혜가 있으니 힘든 싸움이 될 듯했다.
“오라버니?”
긴장을 하며 앞을 노려보던 무혼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반가운 빛을 띤 제갈운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소저의 가족이십니까?”
“예, 저의 사촌 오라버니가 되십니다.”
그러자 무혼은 일단 검을 다시 넣었다. 구태여 상대에게 경계심을 줄 필요는 없다.
무혼이 경계를 거두니 약간은 초췌한 모습이긴 했으나 무사한 제갈운혜의 모습에 그녀를 찾고 있던 제갈세가의 무사들과 중간에 합류했던 남궁장천, 팽조덕 그리고 교해도 자신의 병장기를 넣었다.
특히 제갈상휘는 며칠 만에 보는 여동생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출발할 때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던 가주의 모습이 여동생의 행방을 찾는 동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