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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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75화
075 운명과 만남(5)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갈운혜가 힘없는 목소리였으나 또렷한 음성으로 입을 열자 무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웃어주었다.
“다행입니다. 제가 늦지 않았던 듯합니다.”
악의나 다른 의도를 느낄 수 없는 그의 얼굴에 제갈운혜는 잠시 말을 잊었다.
해독의 방법도 그리고 누군지도 물어보아야 했지만 이젠 물어볼 수 없었다. 무혼이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검 자루를 쥐고 일어나 뒤쪽으로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마승!’
제갈운혜의 감각에 며칠 동안 그녀를 끌고 갔던 자들의 기세가 느껴졌고 곧 그녀를 추적하던 7명의 라마승이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흐흐흐, 우리를 얄팍한 잔꾀로 따돌릴 수가 있다고 생각했나?”
“꼬리를 달고 다닐 생각은 없다. 다만 소저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잠시 따돌렸을 뿐이다. 네놈들은 중독된 소저를 왜 끌고 가려 하였느냐?”
“훗,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이군. 지금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네놈의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러니 당장 꺼져라.”
타마우는 눈앞을 막아선 자가 그들의 기세를 고요히 흘려보내자 손속을 나눌 경우 꽤나 귀찮아질 것임을 짐작했다. 그러자 무혼은 헛웃음을 쳤다.
“너희들이야말로 서장으로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로는 안 될 놈이로군.”
타마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제히 공격해 오는 석장의 사이로 파고든 무혼은 사방에서 잔상만 보이는 석장들의 기세를 읽고 있었다. 순식간에 무혼을 목표로 좁혀오는 석장들을 향해 혈랑검은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혈향구회!’
곡선을 이루며 무혼을 둘러싼 검기들이 사방의 석장들을 베어나갔고 순식간에 두 토막이 난 석장을 잡고 뒹구는 라마승들이 생겨났다.
“뭐야?”
타마우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반로환동의 고수라고 생각할 수 없는 외모에 그들의 합격이라면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젊은 사내의 무공실력이 경악스러울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타마우보다 더 경악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다. 제갈운혜는 무혼이 라마승들을 상대로 혈랑검법을 펼치기 시작하자 내심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를 치유해 준 빛과 그의 태도에 백도의 고수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무공을 펼침과 동시에 온몸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 마기가 그녀의 믿음을 깬 것이다.
‘흑도의 고수였었다니……. 내가 몸이 불편하여 잘못 느낀 것일까?’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그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제갈운혜의 눈이 한 차례의 격돌을 마치고 라마승들을 주시하고 있는 무혼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하다 그의 오른손이 쥐고 있는 검에서 멈추었다.
‘설마?’
다시 무혼의 왼손에 있는 검집으로 눈길을 돌린 제갈운혜는 그녀의 머리가 비어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혈랑환검.’
실물은 처음 보지만 그동안 숱하게 그림으로 확인한 자색의 혈랑검이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잠시 보았었지만, 그 사내의 눈에는 정광이 서려 있었다. 타락하고 흉폭한 자에게서는 보기 힘든 신념이 가득한 맑은 눈빛이었다.
‘저 사람이 천기를 어지럽히는 혈랑성의 주인일 리가 없어.’
하지만 그 생각은 다음 순간 더욱 약해졌다. 그녀의 눈앞에서 무혼의 환검술이 펼쳐졌던 것이다.
타마우는 무혼의 눈치를 살폈다. 첫 격돌에서 같이 온 여섯의 라마승 중 세 명이 쓰러져 이제는 그를 포함하여 네 명의 라마승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눈은 슬며시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제갈운혜의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자를 인질로 삼는다.]
다른 라마승들에게 전음을 보낸 타마우는 스스로 무혼의 정면을 맡기로 했다. 다른 자들에게 맡긴다면 제갈운혜를 인질로 삼기 전에 모두 쓰러질 가능성이 있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그의 등장으로 일이 한층 어렵게 돌아가자 타마우는 이를 갈며 무혼을 노려본 후 다른 라마승들과 신호를 맞추고 다시 무혼을 향해 순식간에 쇄도해 갔다.
또 한 차례 혈랑검과 라마승들의 석장들이 어우러지기 시작했고 무혼은 석장들 사이로 혈난보를 펼치며 다시 한 명의 라마승을 베어냈다.
- 무혼 경, 뒤의 숙녀가 위험해요.
- 부탁합니다, 아이네스 소저.
말이 아닌 생각의 전달만으로 아이네스는 무혼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냈고 순식간에 마나를 끌어낸 아이네스의 시동어가 무혼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블링크.”
무혼의 혈랑검이 또 다른 라마승의 목을 꿰뚫으며 몸이 사라졌을 때 타마우의 석장이 꿰뚫으며 지나갔다.
“어디 갔지?”
무혼을 찾고자 고개를 돌리던 그는 날아드는 열기에 놀라 석장을 바로 세운 후 몸을 돌리며 길게 후려쳤다.
콰쾅!
뜨거운 열기운이 폭발을 했고 거센 힘에 타마우는 1장의 거리를 튕겨 나갔다.
“이게 뭐야?”
타마우가 열기가 날아온 곳을 보니, 20여 장 떨어진 곳에 제갈운혜를 향해 달려가던 라마승이 심장을 찔린 채 서서히 몸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제길,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잠시 고민을 했으나 혼자서 무혼을 공격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모두들 다 불러와야 해.’
일단 마음의 결정을 내리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물론 안전한 도주를 위해서 제갈운혜에게 암기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치잇!”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나 무혼은 무의식적으로 제갈운혜에게 날아가는 암기를 막기 위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혈랑검으로 그의 수리검을 쳐낸 무혼은 이미 작아진 그의 모습을 보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또 한 번 귀찮아지겠군.”
하지만 이미 놓친 자에 대해서 더 이상 연연해하고 싶진 않았기에 검을 검집에 넣고 다시 검을 숨기는 자루에 넣은 후 몸을 돌려 제갈운혜에게 다가온 무혼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갈운혜는 정면으로 무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식이 없는 순수한 표정을 지녔고 그의 눈에서는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예, 괜찮아요.”
제갈운혜는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아직 몸이 불편하여 비틀거리자 무혼이 허리를 받쳐주며 부축을 해주었다.
사내의 강건한 팔이 허리에 느껴지자 얼굴을 붉히며 제갈운혜는 몸을 바로 한 뒤 물러났다.
그것을 본 무혼도 살짝 한 걸음을 물러나며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눈앞의 소녀를 천천히 살펴보니 무공을 익힌 흔적은 느껴졌으나 무림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마 건강을 위해 약간의 무공을 익힌 것이리라.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제갈운혜는 살짝 웃었다. 마기를 뿜어내며 싸울 때의 모습과 다르게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무혼의 모습에 내심 마음을 놓으며 생각했다.
‘혹시 이 사람이 혈랑환검을 처치하고 검을 뺏은 것은 아닐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혼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천기를 어지럽히는 혈랑성의 주인은 음흉하고 악랄하며 색정으로 눈이 번들거릴 것이라 믿어왔는데 눈앞의 청년은 어딜 봐도 그러한 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어제도 혈랑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럼 이 사람이 정말 혈랑환검?’
“너무 폐를 끼친 듯합니다. 게다가 이번의 중독으로 오랜 시간을 병상에 눕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치료를 해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 어머나, 무혼 경. 눈앞의 숙녀를 괴롭히는 독이 독특해서 전 꽤 애먹었는데요.
- 중원에서는 원래 이렇게 이야기하는 법입니다.
- 아아, 그런 거예요?
- 그렇습니다. 대신 제가 나중에 감사의 보답을 하겠습니다.
그 말에 아이네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무혼과 단둘이 거닐며 즐기고 있는 중원의 풍경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 기대할게요, 무혼 경.
- 예, 아이네스 소저.
즐거움에 약간 들뜬 듯한 아이네스의 목소리에 듣자 무혼의 기분도 흡족했고 눈앞의 제갈운혜를 보며 다시 웃음을 보여 주었다.
제갈운혜는 무혼의 웃음을 보고 그녀의 생각이 더욱 헷갈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무혼의 미소에는 묘한 매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의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확인을 해야겠어.’
제갈운혜는 그녀의 생각을 마쳤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협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그저 약간의 무공을 익힌 자일 뿐입니다.”
“큰 은혜를 받고도 은인의 성함을 모르고 지난다 함은 소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무혼은 당혹감을 느꼈다.
중손세가에서는 혹시 모르니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받았으나 이렇게까지 묻고 있는데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실례인 것 같았다.
보아하니 무림인이라고 생각되기보다는 그저 건강을 위해서 무공을 약간 익힌 문사의 여식 같아 보이자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난 무혼은 입을 열었다.
“저는 공야무혼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름을 물었으니 당연히 대답을 해야 했지만, 그의 순수한 얼굴과 진실한 대답에 제갈운혜는 본명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거짓을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저는 제갈운혜라 합니다.”
“예…….”
대답을 들으면서 무혼은 내심 당혹감을 느꼈다. 제갈운혜. 즉 제갈세가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물론 산동의 제갈세가의 여식이 아닐 수도 있었다.
“혹시 산동 제갈세가가 소저의 세가인가요?”
제갈운혜도 얼굴을 굳힌 채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무혼은 아이네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곤란하게 되었군요.
- 무슨 일인가요?
- 제갈세가라면 백도 무림의 두뇌와 같은 세가입니다. 그곳의 아가씨라면…….
- 같은 성을 가진 다른 가문일 수도 있지 않나요?
- 아닙니다. 산동의 제갈세가라 불리는 곳은 단 한 군데뿐입니다. 제 본명을 들었다면 저에 대해서 알지도 모르는데…….
아이네스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무혼이 이름을 밝혔을 때 만일 꺼려진다면 제갈운혜가 가명을 사용해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본명을 밝혔다.
‘이런 경우에는 무혼 경보다 훨씬 강하거나 아니면 무혼 경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 무혼 경, 눈앞의 숙녀가 무혼 경보다 강하나요?
자신을 보고 있는 제갈운혜를 살짝 훑어본 무혼은 다시 대답을 했다.
- 아닙니다. 저의 오초지적도 되기 힘들 것입니다.
- 그렇다면 무혼 경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 그렇습니까? 어째서 그런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그건…….
그러나 아이네스는 더 이상 말하기가 싫었다. 눈앞의 소녀가 무혼에게 호감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 예소소인가 하는 계집애도 무혼 경을 보면서 살살 눈웃음을 치던데…….’
다행히 무혼이 이런 쪽으로는 둔감하니 슬쩍 넘겨도 될 듯했기에 아이네스는 대답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 무혼 경보다 약하면서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무혼 경을 적으로 삼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 아! 그렇겠군요.
아이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무혼은 제갈운혜을 보며 말했다.
“소저의 몸이 불편하신 듯하니, 가시는 곳이 멀지 않다면 제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정체를 안 후 무혼의 행동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제갈운혜는 무혼의 말에 내심 안도를 했다.
오래전부터 그녀는 혈랑성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그녀의 빈약한 무공실력으로 혈랑성의 주인 앞에 나섰다가는 인질이 되거나 살해를 당할까 해서 다가오지 못했던 것이다.
‘잔인무도한 흑도의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아.’
비록 무림세가의 여식이라고 하나 일신의 무공이 약하고 아직 어린 나이라 혼자서 산을 헤매고 다닌다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었다.
“이쪽으로 간다면 림주(林州)라 불리는 마을이 하나가 나오니 그곳까지만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제갈운혜가 말한 마을은 무림맹의 추격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림주가 보이는 곳에서 헤어진다면 무혼에게도 위험이 없을 것이고 그 마을에 가면 무림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무혼은 흔쾌히 대답을 했고 두 사람은 림주를 향해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