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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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74화
074 운명과 만남(4)
그렇게 며칠이 지나 저녁이 되자 라마승들은 밤을 지낼 공터를 발견하고 노숙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제갈운혜의 눈빛이 반짝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정한 거리로 배치되어 있는 나무와 바위를 보며 제갈운혜는 탈출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여긴… 진식을 사용했던 곳이야.’
지금 노숙을 하고 있는 장소를 가두기 위한 진식이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몇 개의 바위가 자리를 이탈했기에 진으로서 활동을 못 하고 평범하게 있는 것이다.
‘네 개의 바위만 옮긴다면 한동안 눈을 속일 수 있어.’
라마승들을 다시 살펴본 제갈운혜는 모두가 바쁘다는 것을 확인하고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 것이냐?”
한 라마승이 묻자 제갈운혜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입을 열었다.
“볼일을 봐야 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처음 제갈운혜에게 말을 걸었던 라마승이 품에서 알약이 든 병을 꺼내어 흔들며 말했다.
“우리가 감시할 수 있는 곳에서 해결해라. 도망가면 며칠 내 시체가 되어 어느 산골짜기에서 썩어 갈 것이다.”
라마승 타마우의 음침한 목소리에 제갈운혜는 얼굴을 굳히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했다. 이대로 끌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공포에 떨며 구출만을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탈출을 감행해 가장 가까운 무림맹의 지부로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할지 생각을 해 보았다.
분명 이미 추격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3일이 지났음에도 설청묘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라마승들이 제갈세가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으며 그녀의 몸에 있는 만리향의 냄새를 없앴다는 말이기도 했다.
‘망설일 수는 없어.’
제갈운혜는 살며시 바위를 밀기 시작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독과 새로운 독이 온몸을 괴롭혔으나 입술을 깨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바위를 진식이 발동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긴 후 일어서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다른 바위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움직이던 라마승들은 그런 제갈운혜의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 한 번씩 쳐다보았으나 그녀가 숨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볼일을 보기에 마음에 드는 찾는 것 같자 고개를 돌렸다.
몸에서 일어나는 독기에 온몸이 점점 더워졌으나 제갈운혜는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완성이었던 진식을 완성시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이 바위만 옆으로 옮긴다면…….’
이제 약간 남은 공력을 끌어올리니 독의 기운이 넘실거렸으나 심호흡을 한 그녀는 마지막 바위를 진식에 맞는 곳으로 밀었다.
그러자 바쁘게 움직이는 라마승들의 주위가 삽시간에 안개로 가득 찼다. 라마승들은 그들이 진식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이 계집애가?”
진식과 계책의 세가인 제갈세가의 여식이라는 것을 잊었던 것이 실수였다.
즉시 진식에서 빠져나오고자 하였으나 이미 진식은 그곳을 모두 휘감고 있었고 라마승들은 그 속에서 우왕좌왕할 뿐 진식을 빠져나오진 못했다.
“생문을 찾아라. 급하게 만든 진식이라 그다지 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지휘하는 타마우의 외침에 다른 라마승들도 진식을 파악하기 위해서 자세히 조사를 했다.
“삼형환환진(三形幻幻陣)이다.”
한 라마승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모양이 바뀌는 이 진식의 생문을 찾기 시작했고 2시진이 걸린 후 그들은 드디어 생문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계집이 도망을 갔군. 제길 빠져나오는데 무려 2시진(=4시간)이나 걸렸으니… 모두들 그년의 흔적을 찾아라. 놓쳐서는 안 된다.”
타마우의 외침에 다른 라마승들이 합장을 한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타마우도 한쪽 방향으로 달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길, 가능한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셨는데……. 그 계집이 숲속에서 죽어버리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사승의 노호성이 귀에서 울리는 듯하자 타마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의 사승은 타마우의 껍질을 모두 벗길지도 모른다.
‘그럴 수야 없지.’
타마우가 그 생각을 하며 숲을 샅샅이 조사하는 동안 제갈운혜는 한 시진을 달려온 뒤 평탄한 곳에 작은 진식을 펼치고 독의 기운을 억눌렀다.
오는 동안 추적해 오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자 흔적을 지웠기 때문에 그들이 찾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운기를 마치고 밤하늘을 본 제갈운혜는 혈랑성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혈랑성. 도제를 꺾은 마교의 신성.”
운이 없어 무림맹의 지부에 도착하기 전에 혈랑성을 마주치게 된다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흑도의 정점인 마교, 그들의 영웅이 된 혈랑성의 후계자는 얼마나 잔혹한 인물일까?”
하늘의 천기를 흩트릴 만큼 마공에 심취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펼쳐놓은 진식 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라마혈교의 승려들은 결국 그녀를 찾지 못하고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봐야 했다.
“후.”
다음 날 무림맹의 지부가 있는 마을로 걸음을 재촉하던 제갈운혜는 갑자기 강하게 심장을 압박하는 독 기운에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예상보다 훨씬…….’
두 개의 독이 상승작용을 한 듯 며칠 동안은 발작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기대를 저버리고 그녀에게서 힘을 뺏어가자 제갈운혜는 바닥을 기어 수풀 아래로 몸을 숨겼을 때 그녀가 입고 있던 고운 옷은 이미 엉망으로 더럽혀지고 고운 얼굴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나 임시방편일 뿐 그녀의 근처를 쫓고 있는 라마승이 지나간다면 금방 들킬 것이다.
제갈운혜는 누워서 독의 발작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렸으나 독의 기세는 수그러질 줄을 모르고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것일까?’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건만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산속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본가에서 드디어 온 것일까?’
작은 희망을 품고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고 옆을 보니 노란색 가사를 입은 라마혈교의 승려가 비웃음을 띈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다.
“으흐흐, 우리를 그렇게 애먹이더니 이곳에서 발광을 하고 있었군.”
‘끝이로구나.’
오늘까지 4일이 지났고 라마승들이 활개를 치는데도 아직 무림맹의 구출대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대로 끌려간다면 다시는 제갈세가에 있는 가족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눈이 점점 흐릿해지며 노란 잔영으로 변해 갔고 라마승의 목소리는 귀를 통해 머리에 울리고 있었다.
‘괴로워.’
피이이이이익-
뒤를 보며 내력을 실은 휘파람을 길게 분 라마승은 제갈운혜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장의 독이 네년을 고통스럽게 하느냐? 감히 도망치려고 했던 벌이다. 흐흐흐, 네년의 만리향은 이미 제 역할을 못 하니 구해주러 올 녀석이 있을 리가 없다.”
“그 믿음을 깨서 미안하군.”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제갈운혜의 눈에 노란색 잔영의 뒤로 검은색이 어른거렸다.
“누구냐?”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라마승이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날을 반짝이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챙!
가까스로 손에 쥔 석장으로 검을 막은 라마승은 눈앞의 사내를 보았다.
그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기세를 내보여 무공의 수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만일 옆에 있는 중원 소녀를 끌고 갈 임무만 없었다면 손속을 나누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임무가 우선이라고 생각한 라마승은 석장을 몸 앞으로 돌려 비스듬히 두고 무혼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미 내가 부른 휘파람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시간만 끌면 된다.’
무혼은 앞에서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승려를 훑어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가사는 중원의 승려들이 입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서장의 라마승.’
마교도들은 정파의 위선자들도 싫어했지만, 서장의 무사들에게는 더욱 강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승려의 옆에 쓰러져 있는 중원의 소녀는 중독이 된 듯 얼굴과 온몸이 검푸른 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분명 서장의 독이라고 했었지.’
라마승을 향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낸 무혼은 검로를 떠올리며 검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라마승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검은 선장에 부딪히며 불꽃을 튕겼다.
‘빠르다. 하필이면 쾌검수라니!’
라마승은 수비만 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쾌검을 상대로 수비만 고수한다는 것은 목을 받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석장을 휘두르며 서장의 무술을 펼쳐 무혼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수라분천(修羅焚天).’
서장 라마교의 무공으로 상대의 사혈만을 노리며 일시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수라분천이 펼쳐지자 라마승의 온몸에서 황금색이 옅게 흐르기 시작했고 석장은 여러 줄기로 나뉘어 무혼의 사혈을 향해 탐욕스럽게 달렸다. 그러나 석장이 휘감은 것은 무혼의 잔상뿐이었다.
공격에 성공한 것으로 잠시 착각을 한 라마승은 순식간에 사라진 듯한 무혼을 찾아 고개를 돌렸을 때 목이 섬뜩해지며 그의 머리가 공중으로 튕겼다.
서서히 무너지는 몸보다 더 빨리 땅에 떨어진 머리는 놀라움을 가득 담고 있었고 잠시 바닥에 무너진 라마승의 몸을 보던 무혼은 뒤쪽을 보았다.
‘다가오는 자들이 있다.’
지금 쓰러뜨린 라마승과 비슷한 기세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다가오고 있는 자들도 모두 라마승일 것이다.
눈길을 돌려 중원의 소녀를 살펴보았다. 이제 15세를 갓 넘겼을 듯한 중원의 소녀였다.
- 무혼 경, 숙녀는 중독된 것 같아요.
- 그런 것 같습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해독을 해야겠습니다.
제갈운혜를 가슴에 조심스럽게 안아 올린 무혼은 곧 혈난보의 귀조비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것에 목적을 둔 귀조비보는 무혼의 의지에 따라 라마승들의 기척을 따돌리고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빌어먹을!”
목이 구르는 라마승의 시체를 본 타마우는 거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기척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멀리 사라진 자를 상대로 경공 대결은 무의미했다.
“가자. 그년이 중독되어 있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년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마승들은 타마우를 따라 무혼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무혼은 라마승들이 몸을 날려 달리고 있는 방향과 다른 곳에서 제갈운혜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미 얼굴이 까맣게 타올라 있었고 보라색의 입술 사이에서는 독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 아이네스 소저, 해독마법을 부탁드립니다.
- 맡겨두세요.
아이네스는 무혼의 마나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무혼이 잡고 있는 검집 끝에 달린 수정이 무혼의 마나를 흡수하며 오색찬란한 빛을 쏟아 내었다.
주문은 마친 아이네스는 시동어를 외쳤다.
“뉴트럴라이즈 포이즌(Neutralize Poison : 해독마법)!”
고통 속에 눈앞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던 제갈운혜도 그 빛을 느낄 수 있었다.
포근하고 따스한 빛이 그녀를 휘감자 그녀는 머리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지며 온몸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뭘까?’
치유를 받는 중에서도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러한 빛을 내는 무공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해독마법이 몸에 스며들자 제갈운혜는 그 빛에 담겨 있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맑고 순수한…….’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백도의 고수일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무공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각의 시간 동안 계속 빛이 몸을 감싸자 온몸을 괴롭히던 고통이 거의 사라졌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자 마법의 빛은 제갈운혜의 몸에서 녹색의 기운을 뽑아내며 공중으로 떠올라 사라졌다.
온몸을 갉아먹던 고통과 독 기운이 사라져 숨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자 제갈운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키고자 하니 옆의 사내가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나무에 기대앉을 수 있었던 제갈운혜는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이미 중독의 특징인 검은 반점은 보이지 않았고 거의 남지 않은 내력으로 온몸을 돌려보니 독의 뿌리까지 뽑은 듯 독 기운은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독을 한 것일까?’
중원의 수많은 명의들의 치유에도 완치하지 못했던 독이다. 게다가 서장의 독이 섞여 더욱 심해지자 1년 이상을 요양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불과 일각이라는 시간 동안 지독한 독을 완전히 몰아내 준 것이다.
얼굴을 돌려 그녀를 치료해 준 사내를 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강건한 기상과 온화한 성품이 대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듯 편안함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