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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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화
11화 아라스 전차전 (4)
마주친 상대가 독일군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시간이 멈췄다.
갑작스런 조우에 당황한 건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내 일생에서 가장 무거우면서도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침묵이 오갔다.
실제로는 몇 초 남짓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체감상 1시간은 넘을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건 한 발의 총성이었다.
포로가 된 아군 병사들을 감시하던 한 명의 독일군이 나를 노리고 쏜 것이다.
"영국군이다!"
당황해서 제대로 조준도 않고 쏜 탓에 총알은 전차의 포탑에 맞고 튕겨 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번개처럼 포탑 안으로 들어와 외쳤다.
"애덤! 전진해!"
"예?"
"전진하라고! 들이박아!"
"아, 알겠습니다!"
애덤이 기어를 넣고 전차를 전진시키자 멍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던 독일군 운전병의 얼굴이 공포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쿵!
전차가 그대로 행렬 선두의 트럭을 들이박았다.
즉시 운전석에 있던 독일 병사가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곤 걸음아 나 살려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조수석에 있던 장교도 마찬가지로 트럭 밖으로 몸을 던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길이 막히자, 뒤에 있던 트럭의 운전병들도 차량을 버리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편, 포로들을 감시하고 있던 독일군 병사들은 내 전차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어둠 속에서 십여 개의 노란 불꽃이 반짝 피어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총탄은 장갑판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죄다 튕겨 나갔다.
"애덤, 해치 닫아! 그리고 뒤로 후진해!"
"예!"
애덤이 해치를 닫고 후진기어를 넣는 동안, 나는 포탑을 돌려 총을 쏘아대는 독일군들을 조준했다.
총구에서 불꽃이 일 때마다 적병의 희미한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격.
빅커스 기관총의 총알 세례를 받은 독일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춤을 추듯 비틀거리며 나자빠지는 적들의 모습이 B급 무협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보였다.
하지만 땅바닥에 흐르는 붉은 피는 설탕과 식용색소로 만든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
사방은 순식간에 비명과 독일어의 외침으로 가득했다.
기관총을 쏠 때마다 발생하는 화약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고 콧물이 줄줄 흘러나왔지만, 사격을 멈출 수 없었다.
적들이 지금 코앞에 있었다.
"애덤! 멈춰! 그리고 우측으로 선회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애덤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전차를 우측이 아닌 좌측으로 선회시키고 말았다. 그 때문에 조준이 틀어졌다.
"야 이 멍청아! 좌측이 아니라 우측이라고! 나무들 때문에 앞으로 못 움직이잖아!"
"죄,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일단 뒤로 빼!"
애덤이 전차를 후진시키는 사이, 앞에선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독일군이 우리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아군 포로들이 그들을 습격한 것이다.
아군 포로 한 명이 쓰러진 독일군의 소총을 집어 들어 눈앞에 독일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커헉!"
목에 총알을 맞은 독일군은 옆으로 쓰러지며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이를 신호로 다른 포로들도 일제히 독일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기를 빼앗으려는 포로들과 저지하려는 독일군이 뒤엉켜 때아닌 집단난투극이 벌어졌다.
"우측으로 선회했습니다!"
"좋아, 그대로 전진!"
전차가 돌진하자, 이제까지 서로 뒤엉켜 치고받으며 싸우던 병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가기 바빴다.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만, 짧게 끊어서 그것도 공중을 겨냥하고 쐈다.
적군과 아군이 서로 섞여 있어서 무작정 쏘다간 아군이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독일군을 내쫓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혼란에 빠진 독일군은 내가 자신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지 허공에 대고 쏘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대다수 독일군이 패닉에 빠져 도망치기 바빴다.
물론 일부 용감한 독일군도 있었다.
지시 없이도 알아서 좌우로 흩어지며 저항하듯 사격하고 수류탄을 던져 궤도를 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보병지원으로 만들어진 마틸다 1 전차에 소용이 없었다.
요란한 소리만 내며 터질 뿐 궤도는 멀쩡했다.
수류탄이 빛을 못 보자, 독일군은 이번에는 직접 전차에 올라타려고 시도했다.
직접 몸으로 막으려는 거다.
"독일 놈들이 올라오려고 다가온다, 움직여!"
전차를 좌우로 움직여 이 불청객들이 불법으로 승차하는 걸 막고자 했다.
마틸다 1은 스커트가 따로 없어 기동 중에는 함부로 올라탈 수 없다.
잘못하다간 회전하는 궤도에 잘못 걸려 그대로 다진고기가 되고 만다.
독일군도 그 사실을 아는지 용감하게 전차에 다가오긴 했지만 오르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사이, 포로 신세에서 벗어난 아군 병사들이 지원 사격을 했다.
전차 근처에 알짱거리던 독일군이 총격에 고꾸라졌다.
겨우 살아남은 적들은 가망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숲으로 도주했다.
적들이 거의 다 사라진 것 같아 안심하는데, 강렬한 충격파가 전해졌다. 뒤쪽이었다.
"윽, 뭐야?"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뒤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가 아니다.
이어 매캐한 연기가 내부로 쏟아졌다.
동시에 뜨거운 불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남아있던 적병이 쏜 총류탄이 전차 측면에 명중한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애덤은 별 피해가 없었지만, 전차는 그렇지 않았다.
전차 후면의 엔진룸에서 불이 시뻘건 혀를 내두르며 타오르고 있었다.
"젠장, 당했다! 탈출해!"
서둘러 해치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몸을 던졌다.
차갑고 단단한 지면이 나를 반겼다.
살갗이 까지고, 피가 흘렀다. 그렇잖아도 쑤신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공중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아 얼굴을 땅에 처박는 불상사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겨우 쑤시는 몸을 일으키는데, 반대편에서 연기를 뚫고 독일군이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앳된 외모의 병사였다.
하지만 녀석은 날 보지 못했다. 그는 드러누워 숨을 헐떡거리는 애덤에게 향해 있었다.
총을 겨누며 독일어로 뭐라고 외치자, 애덤은 깜짝 놀라 두 손을 들었다.
"잠깐, 잠깐! 쏘지 마!"
독일병이 애덤을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 나는 권총을 꺼내 녀석의 등을 쏘았다.
내가 쏜 총탄에 맞고 그는 조용히 뒤로 넘어졌다.
녀석의 눈에선 허망함이 가득했다.
허나 상념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애덤에게 쓰러진 독일군의 총을 잡으라고 명한 뒤, 녀석이 벨트에 차고 있던 수류탄을 집어 들었다.
흔히 '방망이 수류탄'이라고 불리는 막대 수류탄이었다.
아직 독일군과 아군 사이에선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그쪽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꺼냈다.
처음 사용해보지만, 사실 '유튜브'에서 봤던 몇 개의 영상들 덕분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안전핀을 뽑은 뒤, 지체없이 적들의 머리 위로 던졌다.
그런 다음 잽싸게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요란한 폭음이 울리며 총성이 칼로 잘라낸 것마냥 뚝 끊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은 환성을 내지르는 아군 병사들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아군이 어느새 내 주변으로 모여들어 만세를 외치며 진심으로 감동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소위님!"
"당신은 영웅이야!"
"고맙네, 소위! 자네가 우리 모두를 구했어!"
"아, 예...... 예."
나는 얼덜떨한 얼굴로 내게 쏟아지는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받았다.
애덤에게도 병사들이 몰려들어 악수를 건넸다.
마치 축제의 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 널린 시체들만 뺀다면 말이다.
"잠깐, 잠깐만! 지금 당신들 중에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 누굽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포로 신분에서 해방된 아군 병사들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콧수염을 기른 군인이 손을 흔들었다. 내게 가장 먼저 악수를 건넨 사람이었다.
"날세, 소위!"
계급장을 보니 대위였다.
나는 뒤늦게 경례를 올렸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대위님!"
"경례는 됐네. 내가 자네한테 해야지!"
"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 요청에 대위는 호탕하게 웃으며 지금까지의 상황들을 요약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부대 소속들로 모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어딘가로 보내지던 중이었다고 한다.
포로 후송 임무를 맡은 독일군 장교의 말로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라고 하는데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단다.
아무튼 그렇게 몇 시간째 걷고 있는데, 내가 전차를 몰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뭐...... 이후의 설명은 생략해도 상관없겠지.
얘기를 들은 나는 대위에게 내가 겪었던 일들과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일단, 우리 둘 다 아군 전선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러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했다.
"어이, 이 트럭들 좀 살펴봐. 움직일 수 있겠나?"
독일군이 버리고 간 트럭 3대가 있었다.
선두의 트럭은 전차와 충돌한 탓에 유리창에 금이 가고, 헤드라이트가 모두 깨졌지만 기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남은 2대도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다.
문제는 트럭에 그대로 남겨진 부상병들이었다.
부상병들 중에는 아군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독일군이었다.
일이 순식간에 진행된 탓에, 독일군은 트럭에 있던 자기네 부상병들까지 챙기지 못했다.
졸지에 포로 신세가 된 독일군 부상병들은 두려움에 떨며 우리를 응시했다.
우리가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놈들은 어떻게 할까, 소위?"
대위도 갑자기 생긴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병사가 외쳤다.
"죽입시다! 독일놈들은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연 병사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입 닥치게, 병사. 질문을 받은 것은 나지 자네가 아닐세."
병사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면 창피한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데리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대위님."
"하지만 트럭에 자리가 부족하지 않겠나? 물론 죽일 것까지야 없지만, 이대로 놔두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대위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트럭 3대에 모든 인원이 타기엔 자리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이곳에 남겨둔다면, 이들 중 절반은 십중팔구 죽을 것이었다.
독일군 부상병의 절반가량이 당장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비록 적군이긴 하지만, 딱히 그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20세기 영국인들이니 독일인이라면 아주 이를 벅벅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21세기 한국에서 살다가 이곳에 떨어진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선 거의 제삼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일단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살려야지. 설렁 그게 적군이라도 해도.
무엇보다도 나는 북괴나 일제가 할 법한 짓을 저지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치료가 시급한 중상자들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는 이곳에 두고 가는 걸로. 저들도 아군 부상병들을 트럭에 태우지 않았습니까."
"음, 듣고 보니 그렇군. 알겠네, 자네 결정에 따르도록 하지."
대위는 뒤돌아서서 병사들에게 독일군 부상병들 중 중상자들을 골라 트럭에 태우라고 지시했다.
일부는 대놓고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군말 없이 포로들을 트럭에 태웠다.
독일군 포로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곤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째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거기, 살살 내려놔라. 그냥 놓지 말고. 비록 적이지만, 같은 사람이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소위님."
독일군 부상병을 던지듯 내려놓던 상병이 내 지적에 조심하며 부상병을 짐칸에 내려놓았다.
이래서 군대는 계급순이라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니깐.
포로가 된 독일군 위생병은 다행히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나는 그에게 남은 의약품을 돌려주며 독일군이 올 때까지 이곳에 있으라고 말했다.
대다수가 부상병들이니, 어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을 테지만.
위생병은 이해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타네......."
전차는 어느새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비록 속도도 느리고, 그놈의 연기 때문에 사격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애물단지 같은 놈이었지만, 충분히 제 몫을 다해준 고마운 녀석이었다.
안에서부터 익어가는 전차를 보며 애덤이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굼벵이지만, 훌륭한 철마였습니다, 소대장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전차였어."
불타는 전차를 뒤로 한 채 우리는 아군 전선으로 출발했다.
자리가 부족해서 일부 승객들은 지붕이나 발판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