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화
6화 첫 출격
전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뫼즈강을 도하한 독일군 선발대는 곧 뫼즈강에 부교를 설치했다.
부교를 건넌 기갑부대는 프랑스군을 강하게 몰아붙혔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뫼즈강 너머로 도로 쫓아내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되레 독일 공군이 자랑하는 급강하폭격기 Ju87 슈투카 편대의 공격으로 프랑스군 제55보병사단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포병대는 도주했다.
설상가상으로 오후 7시에는 독일군 전차대가 나타났다는 루머에 55사단 예하 256보병연대가 통째로 와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것이 유럽 최강이라 자부하던 프랑스군의 실체였다.
스당을 돌파한 독일군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는커녕 아직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전쟁의 균형은 이미 독일군에 기울고 있었다.
***
5월 15일 아침 7시.
5일 전,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참패를 들먹이며 네빌 체임벌린을 쫓아내고 대영제국의 총리직에 취임한 윈스턴 처칠은 프랑스의 폴 레노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재 프랑스 전선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앞으로의 정책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처칠의 전화를 받은 레노는 뜻밖의 대답으로 처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 레노 총리! 나 처칠입니다. 전황은 좀 어떻소이까?"
-......졌습니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공격당했고,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레노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거렸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처칠은 당황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아침부터 술이라도 마셨나?
"총리, 일단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얘기합시다. 전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속았습니다, 총리! 저 간악한 독일놈들에게 우리가 속았다고요! 놈들은 이미 뫼즈강을 넘어 스당을 돌파했습니다. 아군이 필사적으로 방어 중이지만,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레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처칠 역시 어안이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속았다고? 독일에?
아니, 그것보다 독일군이 벌써 뫼즈강을 건넜단 말인가? 이토록 빨리?
프랑스군은 그동안 뭐하고? 육군만큼은 유럽 최강이라면서?
그러나 그는 노련한 정치인답게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했다.
일단, 절망에 빠진 레노부터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처칠은 과거의 사례를 설명하며 그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대전쟁 당시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 프랑스의 총리) 총리는 전장에서 급박한 소식이 전해져도 늘 평정심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힘을 합치면, 지난번처럼 독일을 무릎 꿇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마시오, 총리. 섣불리 판단하기엔 이른 시기입니다."
그러나 처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노는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아니, 빠져나올 생각 자체가 없었다.
-다 틀렸습니다, 총리. 당신이 직접 이곳으로 오셔서 현실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오늘 당장 파리를 떠날 계획입니다. 그럼, 이만.
"총리? 잠깐만......! 이보시오? 안 들립니까?"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처칠은 한동안 손에서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응시 중인 비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당장 파리로 가야겠어. 가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직접 봐야겠네."
"알겠습니다, 각하."
***
처칠이 파리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부대에도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내가 속한 1중대는 연대의 선봉으로 가장 먼저 열차 편으로 북프랑스 전방으로 보내졌다.
군사령부의 명령을 전해 듣는 순간, 나는 절망하여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망했군, 망했어.
어차피 이리되리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만, 그래도 현실로 닥치니 진짜 기분 뭣 같다.
게다가 우리 중대가 연대에서 가장 먼저 전선으로 향해야 한다니!
다른 중대는 아직 준비가 덜 끝나서 이틀 뒤에나 출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쯤 되니 신이 나를 제대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아무튼 역으로 향하던 중, 나를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바로 프랑스인들의 모습이었다.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고속으로 전진 중임에도 사람들의 모습은 평온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평화스러워서,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길가의 시민 중 그 누구도 겁에 질려 있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로운 태도로 길을 걷고 있었다.
카페와 식당은 여전히 영업 중이었고, 사람들은 테이블에 앉아 한가롭게 커피와 차를 마셨다.
사재기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릴 줄 알았던 식료품점 앞은 한산했다.
진짜 전쟁 중인 나라 맞아, 이거?
너무 평화롭잖아?
생전 처음 보는 전차가 신기한지 모여드는 꼬꼬마들과 구경꾼들을 빼면, 사람들은 어제와 같은 일상을 누리는 중이었다.
문득 이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저렇게 여유롭게 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해졌다.
이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기네 군대가 6주 만에 패하리라곤 꿈에서조차 모르겠지.
하긴, 누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
유럽은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최강대국이 20년 전 쓰러뜨렸다가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선 상대에게 패하리라고?
약소국이었던 베트남이 미국을 꺾으리라고, 소련이 20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될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시내를 통과해 도착한 역에는 이미 열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와 물자의 적재가 끝나자마자 열차는 전방으로 출발했다.
열차가 북동쪽으로 달리는 동안, 나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자 바깥풍경을 구경했다.
놀랍게도 프랑스 시골의 풍경은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양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단층집 대신, 유럽 하면 생각나는 세모꼴의 지붕을 얹은 가옥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만 빼면 말이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지금 전쟁터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떠드는 중이다.
큰 목소리로 군가를 불러대는데, 누가 보면 전쟁터로 가는 게 아니라 전쟁에서 이겨서 돌아오는 중인 줄 착각할 정도다.
우리는 지크프리트 선에 빨래하러 간다네,
어머니, 혹시 뭐 더러운 빨랫감 없나요?
우리는 지크프리트 선에 빨래하러 갈 거에요,
오늘이 빨래하기 좋은 날이거든요.
날씨가 나쁘든 좋든 간에
상관없이 빨래할 겁니다!
우린 지크프리트 선에 빨래하러 간다네,
지크프리트 선이 아직 남아있다면!
뭐,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들처럼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것보단 낫지만...... 시끄러워서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저 새끼들, 목소리는 왜 저렇게 큰 거야? 니들이 무슨 임재범이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한소리 하러 가려는데, 해리슨 대위가 자리에서 일어선 나를 보고 말했다.
"자네, 지금 어디 가나?"
"아, 뒷칸이 너무 시끄러워서 주의를 좀 주려고 말입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앉아. 자네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쓸모있는 녀석들이니까."
"......넵."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해리슨 대위는 나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같다.
그동안 한 짓들이 있으니 그가 날 미워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내가 저지른 짓도 아닌데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냐고.
차라리 이게 전부 다 꿈이었다면....... 지금이라도 꿈에서 깨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 자신이 있는데 말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있는 이곳은 꿈속이 아닌 현실이었다. 제기랄.
해리슨 대위의 일침에 자리에 앉은 나는 목이라도 축이기 위해 수통을 꺼냈다.
해리슨 대위도 내가 물 마시는 것까지는 간섭하지 않았다(당연한 일이지만).
그런데 일이 여기서 터질 줄이야.
"응? 뭐야......."
수통 뚜껑을 열어 입으로 가져가던 중, 수통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깨달았다.
비릿하면서도 달큼한 냄새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뭔가 익숙한 냄새인데......?
하지만 수통에서 원래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마셨다.
직후 1초 만에 수통에서 나는 냄새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거 술이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한참 동안 생각하던 나는, 뒤늦게 얼마 전 마시던 위스키가 너무 독해서 수통의 물과 섞어서 마시려던 걸 기억해냈다.
근데 그날 밤은 너무 취한 나머지 잠이 들었고, 그대로 수통에 물과 위스키를 섞어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해리슨 대위가 내게서 술들을 모두 압수해갔지만, 수통에 술을 넣어놨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이제야 진실을 떠올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통의 뚜껑을 닫았다.
하지만 그 순간, 해리슨 대위의 옆에서 책을 읽던 우리의 게이츠 상사가 입을 열고 말았다.
"응? 중대장님,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자네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군."
"이 냄새는...... 술 냄새 같은데......."
바로 그 순간, 둘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아직 내 손에 들린 수통으로.
"자네, 그 수통 이리 줘보게."
아, X발. X 됐다.
***
전방으로 가는 열차 속 누군가가 절망하고 있을 때, 후방에서도 절망에 빠진 이가 있었다.
미래의 역사가들에게 '운빨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노땅', '미스터 갈리폴리' 등의 별명으로 불리게 될 처칠이었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엔 프랑스 정부는 그곳에 없었다. 모두 안전한 남쪽으로 튄 뒤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처칠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채 무기력에 절어 있는 프랑스군 지휘관들이었다.
회의는 시작부터 끝까지 침울하고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프랑스군 인사들은 하나같이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들과 마주한 영국 인사들은 상황이 상상 이상으로 나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무엇을 먼저 물어볼지 고민하던 처칠은 자신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가믈랭에게 물었다.
"장군, 파리를 사수하기 위한 방어선은 어디에 있소이까?"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공격으로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설정한 전략 방어선을 떠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총리 각하, 유감이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가믈랭의 대답에 처칠을 비롯한 영국 인사들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아니, 자기네 나라 수도를 지킬 기본적인 방어선조차 없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처칠은 부디 질 나쁜 농담이길 바라며 그를 응시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농담으로 한 소리 같진 않았다. 애초에 농담이라도 할 소리가 아니었지만.
"아니, 그럼 아무 계획도 없소? 당장 독일군이 파리로 달려올지도 모른다면서?"
"그렇습니다, 총리. 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 유감스럽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
이게... 프랑스의 총사령관이라고?
이토록 무능하고 무기력한 작자가?
무능하면 처칠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었지만(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가믈랭은 상상 이상으로 무능했다. 무능을 넘어 아예 아무것도 할 생각도 없었다.
그에게 이미 패전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아니라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쌍욕을 퍼부으며 면전에 구두를 던지고 싶은 욕망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가믈랭에게 자신이 고안한 작전을 제안했다.
"그렇다면 장군, 이건 어떻소이까? 독일군은 지금 앞만 보고 달리느라 측면이 허술할 거란 말이오. 게다가 지나칠 정도로 빠른 진격으로 측면이 고무줄처럼 늘어난 상태지. 놈들의 팽창된 측면을 찌른다면, 저들도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진격을 멈추지 않겠소?"
그러나 뛰는 처칠 밑에 기어 다니는 가믈랭이 있었다.
그는 처칠의 제안을 더는 말하기도 싫다는 듯한 말투로 딱 잘라 거절했다.
"총리,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어째서?"
"저희는 이미 적들보다 수에서 열세고, 장비도 열세고, 전략에 대해서도 열세입니다. 모든 것이 적들보다 열세입니다. 그러니 무슨 반격을 한단 말입니까?"
그제야 처칠은 깨달았다.
이 작자는 전쟁을 할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프랑스는 이미 무너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