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화
3화 폭풍전야 (1)
기상나팔이 울리자, 이제까지 침묵의 늪에 빠져있던 병영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아침 기상 시간만큼은 21세기의 한국군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친근하다던가 그런 게 절-대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정확히는 너무 비슷해서 PTSD가 올 것 같다.......
"분대장들은 인원 보고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지금 속히 연병장으로 집합한다!"
"동작 봐라, 빨리 빨리 안 움직이냐!"
"이제 모포 걔는 놈들은 뭐야?!"
아침부터 소리치는 당직사관은 아무래도 만국공통인가 보다.
아무튼 기상나팔이 울리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모포를 걔고, 운동복으로 환복한 뒤 연병장으로 뛰어갔다.
직위는 장교였지만, 몸은 여전히 병사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예전 군대에 있었을 때처럼 했을 뿐인데, 다들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라고 묻는 듯한 표정.
하긴, 그럴만도 하지.
나 같아도 중대 최고의 폐급이 어느 날 갑자기 남들처럼 똑같이 행동한다면 놀란 눈으로 쳐다볼 것 같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고 할아버지가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셨구나.
간단한 체조 후 연병장을 도는 것도 내가 아는 국군과 똑같았다.
구보 중에 구호를 외치거나, 군가를 부르는 것까지 전부 다.
"행군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구나(It's a Long Way to Tipperary)!"
크나큰 런던에 어느 날 한 아일랜드 청년이 왔네
모든 길은 금으로 뒤덮여 있고 모두가 행복했다네
피카딜리 광장, 스트랜드 거리, 레스터 광장에 대해 노래하니
우리의 신난 아일랜드 촌놈이 사람들에게 외치길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구나
아주 머나먼 길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사는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구나!
그렇잖아도 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군가까지 부르려니 아주 죽을 맛이다.
하필이면 바로 앞에 중대장이 있어서 대충 부를 수도 없고, 목청이 터져라 불러야 한다.
힘껏 군가를 부르며 옆을 슬쩍 보니, 행보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바로 눈을 돌려서 서로 시선이 마주치는 민망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가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직급상으로 내가 위였지만, 아직도 병사 시절의 기억이 몸에 함축된 나로서는 괜히 위축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죽겠네, 진짜.
차라리 병원에서 자해하던 뭘 하든지 제대로 미친 척을 해서 그냥 군대를 뺐어야 했는데.
항상 나중이 되어서야 후회나 하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겨우 구보를 마친 후, 다시 막사로 돌아가 군복으로 환복했다.
땀에 젖은 데다 흙먼지까지 들러붙어 금방 더러워진 운동복을 관물대에 대충 처박은 다음, 얼굴과 손을 씻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식당으로 향했다. 일단 밥은 먹어야 하니까.
그런데.......
"소위님? 지금 어디 가십니까?"
게이츠 상사가 대뜸 나를 불러 세우는 것이 아닌가. 뭐지?
"어... 식당으로 가는 중입니다만?"
"......? 장교식당은 저쪽입니다."
뒤늦게 내 실수를 깨달았다.
20세기 영국군도 현대의 한국군처럼 병사용 식당과 간부용 식당이 따로 있었다니.
차이점이 있다면, 병사용 식당에는 병사들과 하사관들이 사용하고, 장교식당은 오직 장교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라. 이거 깜빡했군."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장교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게이츠 상사는 보란 듯이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어갔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이다, 진짜.
설상가상으로 밥도 맛없다.
맛없는 영국 요리 + 맛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군대 짬밥? 게임 끝났어, 그냥.
"하...... X 같은 군대......."
대한민국 국군도 짬밥의 미칠 듯이 낮은 퀄리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당시의 영국은 세계 최강국인데도 짬밥이 이 모양 이 꼴이다.
허옇게 엉겨 붙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수프와 겉보기와 다르게 질긴 빵, 차가운 완두콩, 마찬가지로 차갑게 식은 차.
베이컨은 누린내가 심해서 손을 대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고, 토마토는 흐물흐물한 게 신선도가 심히 의심스럽다.
이거, 먹을 순 있는 거야?
척 보기에도 상한 것처럼 보이는데.
국군의 유명한 밥경찰들-해물비빔소스와 튀긴 조기, 코다리 강정, 게맛살생선묵볶음-이 정상으로 보일 지경이니 말 다 했지.
이 나라는 세계 최강대국인데, 음식은 어째서 18세기 수준으로 주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
"소대장님, 기어코 살아돌아오셨군요!"
"......그래. 나 돌아왔다."
해맑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이 녀석의 이름은 애덤 키드.
나이는 나랑 동갑에 전입해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신병으로, 나처럼 '폐급' 취급을 받는 녀석이다.
이 녀석이 왜 폐급 취급을 받는지는 앞의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알 수 있겠지.
스탠리 큐브릭의 명작 전쟁영화 <풀 메탈 재킷>에 등장하는 고문관 파일 이병과 생긴 것도 닮은 이 녀석은 하는 짓도 얼마나 똑같은지 내가 다 무서울 지경이다.
구보 때마다 항상 낙오해서 이제는 중대장과 행보관도 포기한 지 오래고, 사격장에서 딴짓하다가 아직 사격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등.
폐급이 될만한 자격을 모두 갖춘 진정한 폐급 전사다.
뭐, 그래도 '나'만 하겠냐만은.
그래도 나를 장교로 제대로 대우해주는 녀석은 이 녀석 한 명뿐이라, 내겐 소중한 존재다.
다른 병사들은 이미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원래 폐급 장교면 가까이하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막상 내가 그 당사자가 되지 기분이 참 X 같다.
참고로 우리는 지금 해리슨 대위의 명령으로 전차를 정비하는 중이다.
원래라면 장교가 할 일이 따로 있지만, 알다시피 내가 워낙 폐급이라 그냥 정비나 하는 중이다.
뭐, 나도 불편한 시선들 느끼면서 일하는 것보다 똑같이 폐급 취급받는 녀석이랑 단둘이서 일하는 게 차라리 더 낫긴 하다.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몸이 불편한 게 더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전차를 보았다.
이 전차의 이름은 A11 마틸다 I 보병 전차.
생긴 게 척 보기에도 구식처럼 보이는 녀석이지만, 이래 봬도 개발된 지 5년밖에 안 된 신형 전차다. 아, 물론 1940년 기준으로.
장갑 두께가 60mm나 되어서 방어력도 준수한 편이지만, 무장이라곤 빅커스 기관총 1정뿐이라 전차임에도 전차를 상대로 싸울 수 없는 기묘한 녀석이다.
그런데,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전차가 이랬다.
당장 독일의 1호 전차만 하더라도 무장이 기관총 2정뿐이었고, 프랑스는 한술 더 떠 1차대전 때 굴리던 구식 중의 구식인 르노 FT-17을 수백 대나 굴렸으니, 오히려 양반인 수준이다. 적어도 방어력 자체는 우수한 편에 속하니까.
생각보다 설명이 길어졌군.
처음 녀석을 봤을 땐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접하던 놈을 실제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지만, 이내 곧 익숙해졌다. 지금은 그저 굴러가는 쇳덩어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뭐든 익숙해지면 그다음부턴 길가의 돌멩이처럼 보이는 법이다.
애덤이 엔진을 점검하는 동안, 나는 전차 안으로 들어가서 기관총과 무전기를 점검했다.
모두 이상 없음.
"애덤, 엔진은 어떠냐? 고쳐야 할 게 많냐?"
"어...... 퓨즈 몇 개만 갈아주면 끝날 것 같습니다, 소대장님."
"그래, 얼른 갈아 끼우고 쉬자."
먼저 밖으로 나오는데 갑작스레 갈증이 느껴졌다. 때마침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해 주전자에 길어다 둔 물이 있었다.
이제 막 미지근해지기 시작한 물을 정신없이 들이켜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클래식 음악이 끊어지면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어 병원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나와 오늘의 뉴스에 대해 얘기했다.
-반갑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화창한 봄날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1940년 5월 8일의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푸흡!"
나도 모르게 마시던 물을 뿜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애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소대장님? 사레 걸리셨습니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래, 깜빡 잊고 있었다.
오늘은 1940년 5월 8일, 독일군이 낫질 작전을 개시하기까지 겨우 이틀 남은 시점이었다.
이런 젠장! 이틀 뒤에 전쟁이 터진단 말이다!
전쟁이라면 이미 터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서유럽 일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독일군이 폴란드와 덴마크, 노르웨이를 공격하는 동안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는데, 1차대전 당시의 기억 때문이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이 더 큰 피해를 입으리라 짐작한 영국과 프랑스 수뇌부는 군사적 행동을 자제했고, 프랑스와 본격적인 싸움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독일도 충돌을 자제했다.
덕분에 서유럽 일대에는 기묘한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가짜 전쟁(Phoney war)'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이틀 뒤면 없던 일이 되고 만다.
생각하니 손발이 떨리면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더욱 환장할 노릇은, 그 사실을 아는 이가 나 한 명뿐이라는 거겠지.
만약 장군 정도 되는 위치였다면, 내가 아는 모든 미래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적의 공격을 막을 대책을 세웠겠지만, 내 계급은 장교 중 최하체인 소위에 불과하다.
일개 소위가 적의 침공 사실을 알고 있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사령부로 달려가서 이틀 뒤 독일군이 쳐들어온다고 말한다 한들, 누가 믿어줄까?
저놈 미친 거 아냐? 하는 시선만 받게 되겠지.
그것도 평소 사고 터뜨리는 것으로 유명한 폐급 장교라면?
무관심과 비웃음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정신병원으로 끌고 가려 하겠지.
즉, 내가 할 수 있는 아, 무, 것, 도, 없, 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속이라도 편하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미칠 지경이다.
이대로 전쟁이 터져서 꼼짝없이 망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한다니.......
그렇다고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아주 환장할 지경이다.
"저기, 소대장님?""
"또 왜?"
"어디 아프십니까? 땀이 장난 아닙니다."
애덤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덜미에 흐르는 땀의 양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땀 때문에 옷이 흠뻑 젖을 정도였으니 녀석이 저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생각해보니 차라리 저 녀석이 부럽다.
앞으로 어떤 일이 터질지 아무것도 모르니,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별거 아냐. 그냥...... 걱정이 하나 있어서 그래."
"무슨 걱정이시길래 땀이 그렇게 많이 흐릅니까?"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그냥 그런 줄 알아."
나는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녀석은 내 고민이 뭔지 진심으로 궁금한 눈치다.
이쯤 되니 나 자신도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 뒤, 애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곤 녀석의 귀에 내만이 아는 비밀을......전부는 아니고 일부만 털어놓았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뒤숭숭한 속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만약에 말이야. 곧, 그러니까 이틀이나 사흘 뒤에 전쟁이 터진다면 넌 어떻게 할래? 그것도 그 사실을 너만 알고 있어."
"......? 전쟁은 이미 터지지 않았습니까?"
"그래. 근데 적이 공격해올 거란 사실을 너만 알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니가 사실을 말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질 않아. 그땐 넌 어떻게 할 거냐?"
"그 사실을 어떻게 저 혼자만 알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만약이지. 만약에."
"죄송하지만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설명 좀......."
"......."
아, 내가 잠시 깜빡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녀석도 폐급이라는 사실.
몇 번을 말해도 이놈은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설명하는 것에 지친 나는 도중에 포기하고 GG를 쳤다. 내가 졌다, 이놈아.
잠시 뒤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공구도 내팽개치고 식당으로 뛰어가 버렸다.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일과 중이던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당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입맛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
식당으로 향하던 게이츠 상사가 전차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소위님, 식사시간인데 식당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이죠. 나중에 가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멀어져가는 게이츠 상사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나는 앞으로 닥쳐올 운명을 예상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지만, 한기가 느껴졌다.
홀로 눈이 내리는 허허벌판에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