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화
2화 전설의 폐급
진짜 고난은 부대 복귀 후부터 시작됐다.
본 얘기에 앞서, 내가(정확하겐 내가 빙의하기 전의 진짜 아서 그레이) 어쩌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지부터 먼저 설명하는 게 도리인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 못 하는 날 위해 군의관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전날 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 테이블에 있던 민간인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났다는 모양이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그놈들 중 3명을 때려눕히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다가, 뒤통수에 의자를 맞아서 기절. 이후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헌병들에 의해 이곳으로 후송되었다.
"뭐, 너무 걱정하진 말게. 사람들이 말하길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자네가 아니라 민간인들이라고 했으니까. 싸움도 술집 밖에서 했으니 가게에 별 피해도 없고 말이야. 설마 3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을 바로 영창에 보내겠나?"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참에 술은 좀 줄이게나. 나처럼 될 수 있다고."
군의관은 자신의 반쯤 벗겨진 머리와 툭 튀어나온 뱃살을 가리키며 한없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음, 꼭 새겨들어야겠군.
과도한 음주는 탈모와 비만의 지름길이니까.
그나저나 이 아서 그레이란 놈, 가족이 반강제로 사관학교에 처넣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지간한 싸움꾼이었던 모양이다. 1 VS 4로 붙어서 3명을 때려눕혔을 정도라고 하니.
마지막엔 기습을 허용해서 KO 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군의관은 내 표정을 보곤 내가 영창에 들어가면 어쩌나 고민하는 줄 착각하곤 웃으며 내 등을 두들겼다.
"약간의 기억상실 증세만 빼면, 전체적으로 멀쩡하네. 머리에 난 상처도 금방 아물었고 말이지.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자네는 참 운이 좋아."
음, 군의관님. 당신이 제 입장이 돼 보면 운이 좋다는 말이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치료를 끝낸 나는 퇴원해 원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때 미친 척을 하든 자해를 하든 뭐라도 해서 병원에 그대로 남아있었어야 했는데.......
***
내가 소속된 제7전차연대 1대대 1중대는 낡았지만 커다란 저택을 막사로 이용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이었는데, 벽을 뒤덮은 담쟁이덩굴 때문에 주변의 숲과 융합된 것처럼 보였다.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내가 다가가자 경례를 올리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음,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썩어들어가던 것 같던데.......
아무튼, 원대로 복귀한 나는 곧바로 중대장실에 소환되었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닥에 깔린 중동풍의 카펫과 제법 비싸 보이는 책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담배꽁초로 빼곡한 재떨이와 연필꽂이, 각종 서류와 스탬프가 가지런히 정돈된 탁자에서 중대장 에드 해리슨 대위는 아주 무서운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생긴 게 만화 <진격의 거인>에 등장하는 그로스 상사와 판박이여서 나도 모르게 앗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에 저절로 입이 닫혔다.
"소위 아서 그......."
"왔군."
복귀신고를 칼 같이 자른 그의 목소리엔 분노가 섞여 있었다.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두고서 해리슨 대위는 담배만 줄기차게 피워댔다.
중대장실은 어느새 담배 연기로 가득 찼고, 비흡연자였던 나는 머리가 슬슬 아파 오는 걸 느끼며 똑바로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바람이라도 통하면 조금 나으려만, 안타깝게도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물론 해리슨 대위에게 창문 좀 열어도 되겠냐고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아무 말도 없이 담배만 피우며 나를 지그시 노려보던 해리슨 대위는 장초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끄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거친 발걸음으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울리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내겐 포탄의 낙하음보다 더 무섭게 들린다.
해리슨 대위의 두 갈색 눈동자는 내 얼굴을 응시했고,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네."
"아, 예!"
대위의 입술이 움직이자, 입술 바로 위의 콧수염도 덩달아 같이 움직였다.
마치 콧수염이 말을 하는 것 같아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는 데 성공했다.
지금 웃음이 터진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나?"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양반아.
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댁이랑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간 그가 내 목을 꺾어버릴 것 같았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과거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냈다.
그제야 해리슨 대위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도 이해가 갔다.
내가 빙의하기 전의 아서 그레이란 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이 인간이 저지른 대표적인 만행들을 뽑자면, 다음과 같다.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컨닝, 음주, 지정장소 외 흡연 등 온갖 사고를 쳐서 징계를 먹은 적도 여러 번이었고(그런데 가문의 힘 덕택에 유급이나 퇴학을 당하지 않았다), 소위로 임관한 후에도 자주 사고를 치고 다녔다.
업무시간에 화장실에 몰래 숨어서 자다가 순찰 돌던 행정보급관에게 적발당하거나, 외출을 나가서 민간인 여자에게 작업을 걸다가 여자의 남자친구와 박 터지게 싸우거나, 훈련 때 총을 잘못 쏴서 민가에서 키우던 개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등.
이게 사람 새끼가 저지를 수 있는 일인가 싶을 정도다.
듣는 사람조차 어질어질할 정도인데, 문제는 이 폐급 새끼가 바로 나란 게 더 큰 문제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난데없이 빙의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빙의한 대상이 하필이면 폐급 중의 폐급이라니!
저출산 쇼크로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21세기 대한민국 국군도 이 정도 폐급이면 현부심에 넘겨서 그냥 전역시켜 버리거나, 아예 임관조차 못 하게 한다고!
"기억이...... 납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지?"
아, 무섭다. 너무 무섭다.......
그런데 말 안 할 수도 없고.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사고 치면?"
"각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군."
고개를 돌린 그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토끼를 덮치는 호랑이처럼 맹렬한 기세로 내 오른쪽 다리를 걷어찼다.
아픔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내가 휘청거리기 무섭게, 대위는 내 멱살을 움켜잡곤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위는 핏발이 선 눈으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귀가 울릴 정도로 큰소리였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또 사고를 쳐! 앙?"
"죄, 죄송합니다!"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었기에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해리슨 대위의 화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내가 중대장이었더라도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었을 테니까.
"대체 내가 몇 번을 참아야 하냐? 장교라는 놈이 툭하면 사고나 치고, 니가 인간이야 강도야? 지금 나랑 장난해? 부모 빽 믿고 설치는 거냐?"
"아닙니다!"
"내가 또 이번에 얼마나 털린 줄 알아? 부하 교육 똑바로 안 하냐고.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소리를 듣고 다녀야 하냐? 입이 있으면 말 좀 해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아. 죽고 싶다, 그냥.
***
해리슨 대위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문자 그대로 먼지 털듯이 탈탈 털렸다.
나중에는 그냥 아예 미친 척을 하고 한 대 쥐어팰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다.
그치만 그다음에는?
상관폭행죄로 헌병들에게 체포될 테고, 군사재판에 회부되겠지. 그땐 가문의 힘으로도 어떻게 무마할 수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이전 전적들이 있으니, 틀림없이 영창이나 감옥행이겠지.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감옥에 가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해보면 되레 그러는 편이 훨 나을 수도 있다.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서 죽거나, 불에 타죽는 것보다 감옥에서 몇 년 살다가 나오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세계 2차대전 당시 병사가 부족했던 독일과 소련이 감옥에 있던 죄수들까지 징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이 그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감옥에 있는 나를 끄집어내 전쟁터로 보내진 않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내가 결단을 내리기 위해 숨을 들이켰을 때, 뜻밖의 구원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중대 행정보급관 휴 게이츠 상사였다.
마치 곰을 연상케 하는 무지막지한 체구의 소유자인 게이츠 상사는 이제 막 50줄에 접어들었음에도 힘이 장사였다.
그는 분노로 반쯤 이성을 잃은 해리슨 대위를 붙잡아 내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중대장님, 참으십쇼."
"이거 놓게!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기필코 저놈을 죽여버리고 말 테니까!"
대위의 얼굴은 이제 홍당무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게이츠 상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나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체통을 지키셔야죠. 중대장님은 지휘관이십니다."
해리슨 대위는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그를 붙잡은 게이츠 상사의 힘이 더 셌기 때문에 결국엔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잠잠해진 그는 나를 맹렬한 눈으로 노려보며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토하듯이 뱉어냈다.
"너!"
"소, 소위 아서 그레이!"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에도 또 사고 치면 그땐...... 대갈통에 내가 직접 총알을 박아넣을 줄 알아.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도망치듯이 중대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화장실에 들어간 후에야 온몸이 멍투성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요란하기 짝이 없는 내 두 번째 군 생활의 화려한 시작이었다.
X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