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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4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화

1화 재입대의 날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일본 이세계물이나 양판소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내가 내 입으로 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엄청나게 진부하고 오글거리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런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우리 집 천장이 아니다.

 

천장에 묻은 얼룩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우리 집 안방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또 어디야?

 

이상하다, 난 분명히 어젯밤에 우리 집 안방에서 잠들었는데 말이지.

 

술은 마셨지만, 필름이 끊어질 정도론 마시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주량도 못 되고.

 

술에 취해 필름이 끊어져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그럼 뭐야?

 

당황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거라곤 하얀 이불과 베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침대 여러 개와 창가에 놓인 꽃병이 하나가 전부다. 꽃병의 꽃은 시들어서 미라처럼 변한 지 오래된 듯 보였다.

 

"내가 입원이라도 했던 건가......."

 

짐작이 맞다면,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병원인 것 같다.

침대가 여러 개 있지만, 병실에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다.

 

설마,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건가?

 

사고가 났고, 나는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들에게 구출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이제 어떡하지? 일어나서 병실 밖으로 나가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때마침 병실 문이 열리면서 간호사 복장을 한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간호사는 특이하게도 백인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뭔가 이상했다.

분명 간호복이 맞는데, 흔히 보던 간호복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다.

 

뭐랄까, 21세기보단 20세기 초중반-정확히는 2차대전 시기-에 더 어울릴법한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아! 깨어나셨군요!"

 

심지어 영어로 말하네?

뭐, 백인이 한국말을 하는 것보다 영어로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럽기는 한데.......

 

나는 왜 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영어와는 담을 쌓고 지냈던 내가 어떻게?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서 어디론가 부리나케 뛰어간 간호사는 몇 분 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양반을 데리고 병실로 돌아왔다.

의사 역시 백인이었다.

 

머리는 반쯤 벗겨졌고(묵념), 이마엔 주름이 가득한 거로 봐선 나이가 50은 넘어 보이는데, 확신은 못 하겠다.

 

대한민국 군대에선 40도 되지 않았는데 머리가 벗겨진 간부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 않은가.

어쩌면 눈앞의 이 의사도 내 생각보다 훨씬 젊을지도 모른다.

 

......외모는 젊음과 거리가 있지만.

 

"일어났구만. 어때? 정신이 좀 드나?"

"이, 이게 대체 무슨......."

 

내가 한 말에 내가 놀랐다.

 

분명 평범하게 말했는데, 입에서 나온 건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였으니 말이다.

 

그 순간, 냉수를 사발로 들이킨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눈앞이 핑핑 돌았다.

온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돌고 있는 건가?

나는 멈춰 있는데,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놈은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정신병자가 분명하다.

 

아니면 나를 존나게 싫어한다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이게 말이 되냐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던 내가 뜬금없이 20세기 영국에 떨어지다니.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양놈의 몸뚱아리에서 깨어날 줄이야.

 

개연성이고 뭐고 하나도 없잖아?

 

판타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살을 꼬집어도 보고, 벽에 머리를 부딪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꿈에서 깨는 일은 없었다.

왜냐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니까.

 

되려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나를 미친놈처럼 쳐다보는 간호사의 시선은 덤이었고.

 

이봐요, 아가씨. 오해하진 마요.

난 미친 게 아니라 그저 몹시 당황스러워서 그런 것이니까.

당신이 내 입장이 된다면 충분히 이해할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빙의한 육체의 원래 주인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 몸의 원래 주인 이름은 아서 그레이.

풀네임은 아서 윌리엄 조지 그레이.

편의상 '아서'라 칭하겠다.

 

나이는 18살, 군인 신분에, 계급은 국군에선 '밥풀 하나', '쏘가리'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부르는 소위다(제기랄).

 

가족은 있고, 놀랍게도 귀족, 그것도 남작(男爵) 작위를 가진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즉,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몸이란 말씀.

 

"그러면 뭐해. 그거 빼고 다 문제인데."

 

출신이 귀족인 건 괜찮다고 본다.

물론 신분이 군인이란 점은 좀 그렇긴 하지만 일반 사병이 아닌 게 어딘가.

 

문제는 이 아서가 어떻게 이 자리에까지 왔냐 하는 거다.

 

원래 아서는 그다지 좋은 아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군에 입대한 이유도 밖에 나갔다 하면 사고만 쳐서 집안에서 반강제적으로 입대시킨 거였다.

 

원래 영국 귀족들이 군에 입대하는 게 전통이긴 하지만, 원래의 아서가 워낙 사고뭉치라 가족들이 남들보다 일찍 입대시켰다.

덕분에 18살에 소위 계급을 달긴 했지만.

 

아무튼, 제대한 지 이제 겨우 2년이 지났는데, 2차대전 당시의 영국군으로 재입대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왜 하필이면 나야? 뭐 때문에?

이유라도 알면 그나마 덜 억울하지, 대체 이유가 뭐냐고?

 

게다가 지금은 자그마치 1940년.

 

모두가 다 아는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인 시기다.

 

영국은 '그나마' 피해가 적은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망자만 49만 5천 명에,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회복이 불가능한,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입은 사람들도 수십만 명에 달하고.

 

그야말로 전지구적으로 이래저래 힘든 격동에 시기였다.

 

입에서 한숨밖에 안 나온다.

 

하, X발.

 

그러잖아도 X 같은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X 같은 세상에 떨어져 버렸다.

 

[오늘, 우리 용감한 영국군은 노르웨이에서 작지만 값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군의 기습으로 독일군은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했으며, 아군의 피해는 2명이 경상을 입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승전보는 즉시 본국으로 전달되어 사람들에게 승리의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내 X 같은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지같은 현실을 일깨우듯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라디오가 낡은 탓에 잡음이 꽤 심하긴 했지만, 귀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병실엔 여전히 나 혼자밖에 없다.

넓다곤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좁은 편도 아닌 이 병실에 나밖에 없으니 왠지 전세를 낸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은 1940년 5월 6일,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이었던 나 '이규태'가 대영제국 육군 소위 '아서 그레이'가 된 지 3일째 되는 날이다.

 

지금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아주 조금'은 차분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다.

 

사실, 처음에는 자살까지 진지하게 고려했다.

21세기 한국의 내 방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가 있었다.

 

게다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빠르게 죽고 끝내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흘 뒤,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한다. 그로부터 6주 뒤 프랑스는 항복하고 괴뢰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리한 상황에서 영국은 본토 항공전에서 승리하여 독일군의 본토 침공을 저지하지만,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전쟁에 시달리게 된다.

 

자그마치 5년 동안.

 

그나마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국민 대다수가 죽는 등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폴란드나 소련, 중국 같은 곳에 떨어지지 걸 다행이라고 할까.

비교군이 좀 심하긴 해도 그 나라들보다는 피해가 경미한 영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군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을 거쳐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전장에서 싸울 예정이다.

생각해보니 인도와 버마, 중국도 있군.

 

그동안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독일의 전설적인 전차 에이스 미하엘 비트만도 전쟁 중에 죽었는데, 나 같은 일개 소위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영국이 앞서 설명했던 나라들과 비교해서 피해가 덜했다는 거지,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보면 전쟁을 일으킨 독일보다 영국이 패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의 지위에서 내려온 동시에, 미운 자식뻘이라고 할 있는 미국에 이래저래 많은 이권을 빼앗기며 몰락한다.

 

당연히 영국 시민의 삶이 힘들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물론 영국인이 되어 버린 내가 겪을 미래이기도 했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막상 자살을 하려고 결심하니 정작 뒷일이 두려워졌다.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죽었는데 우리집에서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끝'이라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할 건가?

 

결국, 처음부터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X발.

 

아주 그냥 X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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