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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2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9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2화

32화 굴리는 자와 굴려지는 자

 

 

케미세트를 점령한 날 저녁.

 

모처럼 취사병이 해지는 따뜻한 수프를 마시고 있는데 뜻밖의 선물이 도착했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철갑유탄과 유탄이었다!

 

Shell Mk. 1 철갑유탄은 본래 1936년에 개발된 물건이지만, 철갑탄보다 관통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2년 만에 생산이 중지되었다.

 

전쟁이 터진 후, 일선에선 다시 생산을 재개할 것을 요청했지만, 영국군 수뇌부는 이를 거부했다.

 

Shell Mk. 2 유탄의 경우 유탄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빗발치자 마지못해 내놓은 녀석이지만, 이 녀석이 나왔을 즈음에는 이미 2파운더는 유럽 전선에서 퇴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치하나 하고 따위를 굴리던 일본군을 상대로는 여전히 쓸모가 있었지만, 그럼 뭐해. 나온 시기가 너무 뒤라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는데.

 

근데 이제 이 두 녀석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대전차포가 나타나면 위험을 무릅쓰고 해치를 열어서 수류탄을 직접 던질 필요도, 보병들을 상대로 기관총만 죽어라 쏴댈 필요도 없다.

 

그동안 철갑탄밖에 없어서 우리가 어떤 고생을 했던가.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겠군요. 높으신 분들도 조금은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탄약을 나르는 병사들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게이츠 상사가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상사. 이젠 탄약수들도 바빠지겠죠."

"맞는 말씀입니다. 포탄을 거의 쓸 일이 없었으니, 전투 중에 탄약수만 아주 천하태평이 따로 없었죠.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유탄과 철갑유탄의 보급으로 싱글벙글한 간부들과 달리, 병사들은 느긋하게 밥을 먹다가 난데없이 일을 하게 되어 얼굴에 짜증이 역력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꼬우면 지들도 간부 해야지, 뭐.

 

그리고 우리만 좋은 게 아니라 너희들한테도 좋은 거야.

 

전쟁 끝날 때까지 보병들만 나타났다 하면 기관총만 주구장창 쏠 수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니 지금 좀 고생하고 전투할 때 편하면 되지. 안 그래?

 

***

 

처칠은 오늘도 자신의 커다란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지는 의자에 앉아 각 부서의 실무자들과 마주 보면서 길고 지루한 회의를 이어나갔다.

 

회의실에는 육군 장성들과 군수업체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내부 공기는 참석자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 뿌옇게 찌들어 있었다.

 

비흡연자가 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졸도할 정도로 공기는 탁하고 더웠지만, 참석자들 중 누구도 그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일단 지시대로 Shell Mk. 1 철갑유탄의 생산을 재개했으며, 신형 Shell Mk. 2 유탄의 생산도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탄약의 생산과 보급을 담당하는 장성이 일어서서 보고하자 처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관통력도 떨어지는 두 탄종을 계속해서 생산해야 하는지 대해선 아직도 말이 많습니다."

"그거야 나중에 일선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 판단하면 될 문제지."

"그렇습니다만......."

"그럼 됐지. 뭐 더 할 말 있나?"

"아뇨, 없습니다."

 

처칠이 강하게 나오자 장성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사실, 처칠도 이전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이 굳이 다양할 필요가 있나?

가게에서 채소를 고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철갑탄 하나면 되지, 뭘 더 바래?

 

보병들은 전차에 장착된 공축기관총으로 상대하고, 포탄은 관통력이 높은 철갑탄 하나뿐이면 된다는 게 그와 다른 장성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아서 그레이와의 만남으로 처칠의 생각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철갑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일선에서 싸우는 장병들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탄종이 철갑탄 하나뿐이라 보병들은 물론 적 진지와 대전차포를 상대하는데도 어려움이 크다니, 처칠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처칠은 고집불통 독불장군에 자신과 의견이 반대되는 사람이 있으면 철저하게 배제하는 유형의 인간이었지만, 최소한의 유도리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그에게 의견을 타진한 이는 정치적 라이벌이나 콧대 높은 부하 장성들도 아니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일개 소위였다.

 

그리고 내용도 그랬다.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탄종이 다양할수록 싸움에 유리하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말이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그 친구는 모로코 전장에 있겠군. 아직 전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탄약 문제는 이쯤 해 두고, 이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처칠이 말한 다음 안건은 바로 신형 전차의 개발에 관해서였다.

 

"현재 아군이 사용 중인 마틸다 전차와 발렌타인 전차는 보병전차인 관계로 속도가 너무 느려. 따라서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선보였던 기동전을 하기엔 매우 무리지. 대신 그만큼 장갑이 두터워서 웬만한 공격으론 격파가 힘들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래도 속도가 너무 느린 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요."

 

처칠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 민간인 관계자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게 또 사실이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순항전차인 크루세이더는 속도가 뛰어나지만, 대신 장갑이 얇네. 게다가 마틸다와 발렌타인과 같은 2파운더 주포를 써서 화력도 달라진 것이 없고."

"맞는 말씀입니다만, 현재 개발 중인 6파운더를 장착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각하. 그러니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대답에도 처칠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과거에 아서 그레이와 나눴던 대화 중, 아직도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얘기가 있었다.

 

곧 독일군의 전차가 빠르게 성능이 향상될 텐데, 아군도 이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기존의 전차에서 벗어난 화력과 기동력, 방호력이 적절한 조화를 갖춘 신형 전차를 개발해야 한다.

 

당연히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기존에 생산 중인 전차들을 개량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관계자와 과학자들이 달라붙어서 며칠 동안 씨름을 해야 하는데, 난데없이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전차를 내놓으라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당장 들고 일어서서 현실을 모른다느니, 지금의 일만으로도 벅차다느니 오만 말들을 쏟아내겠지.

 

하지만 관계자들의 말만 믿고 가만히 있다가 적들이 갑자기 뛰어난 성능의 무기를 선보인다면, 그땐 또 어떻게 하겠는가?

 

무엇보다 독일군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들을 자주 보여주지 않았던가?

 

전차의 기동이 힘든 아르덴 숲으로 밀고 들어와 프랑스를 6주 만에 굴복시킨 것도 그렇고, 뛰어난 성능을 가진 마틸다와 샤르 B1 전차들을 대공용으로만 쓰이던 88mm 대공포를 끌고 문자 그대로 학살했다.

 

그런 괴물들이 어느날 갑자기 기본의 전차나 대전차화기론 상대하기 힘든 신형 전차를 끌고 나타난다면?

 

그때 와서 부랴부랴 개발을 시작해봤자, 일선의 장병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안 그래도 됭케르크에서 정예군을 잃는 바람에 지금 가장 부족한 게 군인이 아니던가.

 

"내가 생각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네. 우선, 화력이 기존의 전차들보다 우수해야 하고, 기동력과 방호력 또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면서 양쪽 모두 뛰어나야 하네. 일단 화력은...... 그래, 적어도 구경이 75mm는 되면 좋겠구만."

 

처칠의 발언에 참석자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대로 곧바로 반발이 일었다.

 

"그건 힘듭니다, 각하. 아직 6파운더의 개발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새 주포라니......."

"무리입니다. 차라리 기존의 전차들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지금 당장 개발에 나선다고 해도 언제 결실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을뿐더러. 최악의 경우에는 기존의 전차 생산에까지 막대한 차질이 빚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난리로군.

 

처칠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난색을 표하는 관계자들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여러분이 우려하는 것 또한 잘 알겠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 없지 않나? 언제 독일 놈들이 신형 전차를 짠! 하고 내놓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각하. 물론 그 역시 우습게 볼 문제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독일 놈들은 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어! 어쩌면 저들은 우리가 책상에 앉아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을 때, 이미 신형 전차의 개발을 시작하고 있을지 모른단 말일세! 세계 최초로 전차를 만들어낸 이 대영제국이, 우리의 것을 모방한 자들에게 추월당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처칠이 목소리를 키우자 이제까지 난색과 불만을 표하던 관계자들은 입을 닫고 움츠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처칠은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아직 우리 전차들이 독일군의 전차들보다 우위에 있을 때, 격차를 확 벌려야 독일군을 더욱 수월하게 때려잡을 수 있어! 하다못해 격차를 벌리지 못하더라도, 따라잡히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게 아닌가!"

 

지금까지의 전차들의 성능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일부 인물들도 처칠의 말에 동조했다.

 

처칠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성된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이를 이용했다.

 

"지금부터라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지. 바쁘다고, 해야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미루면, 막상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할 건가? 우리가 게으름을 부리면, 일선의 장병들만 죽어 나갈 텐데! 적어도 그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처칠이 필살기를 쓰자, 반대파들은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일부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에겐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적당한 카드도, 처칠처럼 뛰어난 말빨도 없었다.

 

"그러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네. 새 전차를 만드는 것이 당신들의 일이고, 그러라고 나라에서 돈을 주는 게 아닌가. 내 말이 틀린가?"

"아, 아닙니다. 각하."

"그래야지. 우선, 전차포는 일단 6파운더를 쓰되, 보다 더 대구경의 주포도 탑재할 수 있게끔 설계하고, 장갑도 마틸다와 동일한 78mm로 하지. 그 두께로 크루세이더와 동일한 속력을 내려면 엔진도 새로 개발해야겠군."

 

기다렸다는 쏟아지는 처칠의 말에, 관계자들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굳어갔다.

 

앞으로 며칠, 아니 몇 달간은 눈 뜰 섀도 없이 바쁠 게 분명해 보였다.

 

***

 

같은 시각,

 

런던과 멀리 떨어진 베를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3호 전차에도 50mm 60구경장 주포 탑재가 가능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제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충분히 탑재가 가능합니다."

 

구데리안의 자신있는 대답에 히틀러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10월부터 출고가 시작된 3호 전차 H형에 50mm 60구경장 전차포를 탑재하길 희망했지만, 육군 병기국은 탑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50mm 42구경장 전차포를 탑재했다.

 

하지만 히틀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구데리안은 60구경장 전차포의 탑재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직접 확인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론만으로 탑재가 가능하다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때론 감추면 좋은 진실도 있는 법이다.

 

어차피 히틀러의 생각도 구데리안과 같았기에 그가 진실을 안다고 해서 질책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지금 당장 병기국에 연락해서 중요한 지시사항이 있으니 관련자들은 모두 모이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

 

히틀러의 충실한 측근인 하인츠 링게 SS 대위가 병기국에 연락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하지만 구데리안은 여전히 할 말이 더 남아있었다.

 

"총통 각하, 주포도 주포지만 전차의 장갑도 주포 못지않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현재 3호 전차의 전면장갑은 겨우 30mm에 불과합니다. 최소한의 방호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장갑의 증강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따라서 전면장갑을 50mm로 늘리고, 4호 전차도 동일하게 50mm로 늘려야 합니다."

"그렇소이까?"

"예. 그뿐만 아니라,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적들의 전차와 대전차화기의 발전 가능성에 대비하여, 이보다 더 장갑을 늘리고, 주포도 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탑재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병기국 관계자들이 들으면 필요 이상의 걱정이라며 펄쩍 뛸 말이겠지만,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랑스 침공전에서 아군 전차들은 영국과 프랑스 전차들을 상대로 온갖 추태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지금 나온 개량안을 적용한다고 해도, 영국군의 마틸다 전차와 겨우 동등해질 뿐이다.

 

거기다 우리가 여기서 안주하는 사이, 영국군이 새로운 신형 전차를 내놓는다면?

 

그건 안될 일이지.

 

언젠가 영국군도 신형 전차를 내놓을 터.

그전까지는 지금보다 더, 더 강한 전차를 개발해야 한다.

 

구데리안의 말대로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늦다.

 

"병기국에선 시기상조라고 할 것 같은데."

 

히틀러가 조용히 뇌까리자 구데리안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하지만, 뒤이은 말에 그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늘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장군도 그렇지 않소이까?"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문제는 병기국 친구들인데....... 그치들을 설득할 수 있겠소?"

"각하, 설득이 소용없다면, 명령을 내리시면 될 일입니다."

 

구데리안의 대답에 히틀러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가 원하던 답이었다.

 

"좋소. 어디 한번 시작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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