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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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9화
29화 횃불 작전 (3)
10대가 넘는 전차들(모두 르노 FT-17이었다)이 몸통에 구멍이 뚫려 뻗어버린 후에야 프랑스군은 백기를 들었다.
첫 전투는 무사히 아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보병 수백 명이 전사했고, 부상자들은 사망자들의 몇 배나 되었다.
당초 지휘관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였다.
프랑스군의 저항이 이 정도로 거세리라곤(심지어 나조차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생각 이상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다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우리 중대에는 사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일까나.
전차들도 모두 멀쩡했다.
재수 없게 적 포탄에 궤도를 맞아 끊어진 경우가 있었지만, 예비 궤도로 교환하면 그만이었다.
비록 피해는 컸지만, 그나마 상대가 프랑스군이어서 다행인 점도 있었다.
만약 해변가에 프랑스군 대신 독일군이 주둔 중이었다면, 이 정도 피해로 그쳤을까 싶다.
아니, 애초에 상륙 자체가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독일군은 죄다 리비아, 이집트 방면에 있었다.
우리가 상륙한 모로코에는 독일군은 한 명도 없었다.
솔직히 이번 전투로 프랑스군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느끼긴 했지만, 여전히 독일군보다는 낫다고 생각됐다.
배 안에서 우리가 향하는 곳이 이집트가 아니라 모로코 해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이집트에서 88mm와 슈투카한테 다굴 맞는 것보다 모로코에서 프랑스군이랑 치고받고 싸우는 게 난이도가 훠얼~씬 낫다는 건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아무튼 첫 전투를 마무리 짓고 휴식을 취하는데, 무어 대위가 소대장들을 불러 모았다.
전달할 사항이 있다나?
"모두 모인 건가?"
"예, 중대장님."
소대장들이 모두 집합하자 무어 대위는 헛기침하더니 지도를 펼쳐 현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들어온 보고인데 이곳 라바트 외에도 사피, 카사블랑카에 아군이 상륙했다고 한다. 사피에 상륙한 아군은 무난히 상륙에 성공했지만, 카사블랑카 쪽은 적군의 저항이 거세다는군."
무어 대위가 펼친 모로코 지도에는 맨 아래쪽이 사피가 있었고, 그 위가 카사블랑카, 라바트 순이었다.
이곳조차 저항이 거센 편이었는데, 카사블랑카는 어느 정도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그쪽 상황이고, 우리는 우리 구역만 맡으면 된다."
......그럴 거면 왜 말한 거야?
아무튼 무어 대위는 침착하게 적군의 배치와 예상되는 기동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단 우리 중대는 각 소대로 나뉘어 라바트 시내로 진군하는 아군 보병들을 지원을 맡게 되었다.
1소대가 우측, 2소대가 중앙을 맡고, 내가 지휘하는 3소대가 좌측을 맡을 예정이었다.
"아군에게 투항한 프랑스군 장교로부터 수집한 정보로는 프랑스군이 라바트 시내 곳곳에 숨어서 우리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모양이군. 다행히 수는 그렇게 많진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안심하기엔 이르네. 적군의 수가 많지 않다는 거지, 그들이 위험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무어 대위의 말을 듣고 나는 프랑스군이 제법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리 시가전 준비까지 했다는 뜻은 해안의 방어선이 돌파당하는 것까지 계산했다는 거일 테니까.
그 '6주' 당한 프랑스군답지 않게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싸워보려는 생각인 것 같다.
독일군을 상대로 그렇게 한 번 싸워보지 좀.
그랬으면 과거의 동맹국끼리 싸울 일도 없잖아.
"작전 개시는 지금으로부터 1시간 뒤다. 배고프면 뭐 좀 먹고, 전투에서 소모한 탄약도 보충할 수 있도록. 알겠나?"
"예, 중대장님!"
"그럼, 해산!"
***
무어 대위의 말대로 정확히 1시간 뒤, 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공격에 앞서 해군의 함포 사격이 먼저 진행되었다.
바다에 줄줄이 늘어선 군함들은 라바트를 지도에서 아주 지워버릴 기세로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특히 전함의 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고막이 울렸다. 전함과는 거리가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아군 함선들이 쏘아 올린 포탄들이 라바트 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광경을 지켜보던 애덤이 입을 열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광경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정말 무시무시한 광경이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쌍안경을 눈에 가져갔다.
포격으로 부서지는 시내의 모습을 보다 자세히 보고 싶었다.
쌍안경에 비친 라바트 시내의 모습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불길에 휩싸인 건물이 먼지처럼 주저앉았다.
"민간인들도 많이 살고 있을 텐데......."
잭슨이 걱정된다는 투로 말하자 토마스가 면박을 주었다.
"어차피 전쟁에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어. 민간인이라고 봐주면, 우리는? 포격 없이 저곳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가?"
잭슨 녀석, 보기보다 귀가 얇은 모양인지 토마스의 말에 설득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렇고, 토마스 녀석의 입에서 천조국의 석기시대 성애자가 했던 말이 나올 줄이야.
기분이 뭔가 오묘하구만.
작전 개시 시간이 다 되어가자, 무어 대위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내용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제 전투 시작이니, 마음 다잡고 열심히 해라는 소리겠지.
-이제 시작이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길 바란다.
거봐, 내 말 맞지.
중대장들은 왜 사람들이 누구나 예측할 만한 말들만 골라서 하는 걸까?
거참, 이해할 수 없군.
"여기는 선풍기, 수신 완료."
-여기는 돌멩이, 수신 완료.
-위스키도 수신 완료했음.
이윽고 작전 개시 시간이 되었다.
함선들은 마지막으로 포격을 가한 뒤, 일제히 침묵했다.
지금부터는 우리 육군이 나설 차례다.
"자, 드가자~."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농담한 거니까 일일이 반응하지 마."
아직도 혼잣말하는 버릇이 안 고쳐졌다.
더 노력해야겠군.
"여기는 선풍기 1. 전 차량 전진."
***
"우...... X발."
로랑 드뮈르 상사는 철모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입안에도 흙먼지가 들어간 탓에 숟가락으로 모래를 퍼먹은 느낌이었다.
수통을 꺼내 물로 입안을 헹구었다.
아직도 찝찝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한결 나았다.
"다들 정신 차려라! 어서! 언제 영국 놈들이 올지 모른다!"
그는 진지를 돌아다니며 얼이 나가 있는 병사들의 뺨을 후려쳐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천만다행히도, 포격은 진지에서 제법 먼 곳에 떨어져 로랑의 소대에는 별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포격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거리는 것도 모자라 연기와 먼지 폭풍으로 앞이 보이질 않았으니까.
로랑은 포격이 그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포격이 5분만 더 지속되었다면, 소대원들 중에서 정신줄을 놔버리는 이들이 생겼을 것이다.
지금도 얼이 반쯤 나가 있는 병사들이 많이 보였다.
그나마 움직이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영국 놈들이 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로랑은 냉큼 쌍안경을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가증스러운 영국 놈들이 전차를 앞세워 라바트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로랑은 이를 부득 갈았다.
"빨리도 나타났군, 돼지 새끼들."
쌍안경을 내린 뒤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탄알이 장전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가 사용하는 권총은 독일제 루거 P08로, 1918년 종전을 며칠 앞두고 벌어진 전투에서 노획한 물건이었다.
사격 연습 때 외에는 한 번도 쏴보지 않았던 놈인데, 이제야 첫 실전을 치르게 되었다.
로랑 본인은 이번이 첫 실전은 아니었지만.
루거를 노획했을 당시, 로랑은 이제 갓 24살이 된 팔팔한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50을 바라보는 중년이었다.
비록 몸은 쓸데없이 커지고,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지만 프랑스를 향한 충성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달라디에가 체임벌린을 따라 히틀러에게 선전포고하자, 그는 가족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군대에 다시 입대했다.
로랑은 최전선으로 가서 독일군과 싸우길 원했지만, 정작 상부는 그를 최전선과는 거리가 먼 모로코로 보냈다.
지금 와선 의미 없는 1계급 특진이라는 선물과 함께.
그는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한 후에도 모로코의 해변가를 거닐며 시간이나 때워야 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했을 때, 그는 분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적군인 독일군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로 메르 엘 케비르 항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함대를 기습하였다.
이때 격침된 전함 브르타뉴에는 갓 소위로 임관한 로랑의 아들이 타고 있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뒤부터, 로랑에게 영국은 독일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프랑스의 적이었다.
지금 그 적들이 오고 있다.
바로 이곳으로.
"내가 명령하기 전까지는 쏘지 마라."
로랑은 적들이 베르티에 소총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영국군은 함포 공격으로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지나, 조금씩 로랑의 진지와 가까워졌다.
적들과의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다고 판단한 순간, 그는 힘껏 고함을 쳤다.
"사격 개시!"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이 일제히 불을 뿜자 멋모르고 다가오던 영국군들이 고꾸라졌다.
그 광경을 보면서 로랑은 희열을 느꼈다.
심장이 그 어느 대보다 더 빠르게, 더 힘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쏴라!"
자신은 루거를 영국군을 향해 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영국군은 서둘러 전차 뒤로 숨었다.
그러자 우측에 매복하고 있던 기관총팀이 사격을 개시했다.
전차 뒤로 몸을 피했던 병사들이 줄지어 쓰러졌다.
적들이 지르는 비명과 고함 소리에 로랑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복수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잭슨! 포탑 돌려! 우측에 적이다!"
이런 젠장. 적들은 앞뿐만 아니라 우측에도 있었다.
적의 기관총 공격에 탱크 뒤에 숨어 있던 아군 보병들이 도미노처럼 줄지어 쓰러졌다.
쇼샤 기관총을 갈겨대는 프랑스군 두 명이 시야에 잡히자, 잭슨은 공축기관총을 발사했다.
엎드려서 기관총을 쏘아대던 프랑스군 두 명의 몸에서 선혈이 낭자했다. 총알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됐어, 전진!"
우측의 적들을 제거한 뒤, 우리는 다시 전진했다.
살아남은 보병들도 전차 뒤에 딱 붙어서 움직였다.
프랑스군의 사격이 매우 격렬했던 탓에 나는 해치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걸 포기하고 관측창에 의존하며 지휘했다.
다행히 적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잭슨, 적 기관총부터 먼저 제거해! 나머지 놈들은 나중에 처리해도 되니까!"
"예!"
인간의 몸은 전차와 달리 물렁한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관총만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차의 가장 큰 무기인 주포를 놔두고 공축기관총만 써야 한다는 현실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탄만 있었어도 이런 수고는 덜었을 텐데."
"잘 못 들었습니다?!"
"무시해! 저기, 권총 들고 명령 내리는 놈! 저놈이 지휘관이다! 저놈부터 죽여!"
"옙!"
공축기관총이 불을 뿜어,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프랑스군의 목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그때 총탄이 다 떨어졌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총탄이 다 떨어졌습니다!"
"야, 인마! 내가 알아서 재장전하라고 말했지! 나중에 숨 쉬는 것도 일일이 보고할 거냐?"
"아닙니다!"
"알았으면 빨리 장전해! 시간 없어!"
"예!"
***
처음에 로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목에 뭔가가 박히는 느낌이 들더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을 뿐이다.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가 전부 다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로랑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피가 고이는 바람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어 졸음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참을 수 없는 강렬한 졸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