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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8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7화

27화 횃불 작전 (1)

 

 

처칠과 만나고 다음 날.

 

나는 별도의 배웅 없이 혼자서 부대로 복귀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에도 처칠이 직접 마중나와 기자들 앞에서 멋드러진 연설을 하고, 나도 거기에 맞장구를 쳐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몰타 함락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터진 탓에 취소되고 말았다.

 

독일군의 몰타 침공 소식 덕분에 내가 처칠을 만난 소식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모든 신문의 1면은 몰타 함락 소식으로 도배가 되었고, 영국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이제라도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과 움직임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시위대는 경찰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BUF를 비롯한 친독파들도 슬그머니 활동을 재개했다.

 

처칠이 BBC에서 행하기로 했던 연설도 여론의 등쌀에 떠밀려 취소되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대장님."

"뭐가?"

"자그마치 총리랑 만나셨는데, 하필이면 같은 날에 초대형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묻혀버리셔서 말입니다."

"집어치워 인마. 그게 뭐 대수라고."

 

사실, 애덤 녀석의 말대로 신문의 1면에서 밀려난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그렇게 크게 안타깝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훈련 빼고 런던 가서 처칠이랑 사진도 찍어보고, 맛있는 것도 먹어봤으면 됐지, 뭐.

 

거기다가 총리와 직접 만났다는 사실이 널린 퍼진 덕분에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 나를 여전히 골칫덩어리,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정도로 여기던 부하들의 눈빛이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전에는 내가 지시를 내리거나 말을 걸면 대놓고 귀찮아하는 게 얼굴에 떠오르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 이제야 나를 조금이나마 신뢰하게 된 모양이다.

 

최악의 폐급으로 낙인찍혀 있던 내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부대로 복귀한 후부터는 한동안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2, 3일에 한 번꼴로 훈련이 진행되었고, 국군의 '전시준비태세(전준태)'와 유사한 비상훈련도 여러 번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 군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이 전준태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 피 말리는 것인지.

 

한 번은 이제 막 씻고 자려고 하는데,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속옷 차림으로 막사 밖으로 튀어 나가 양말만 신은 채로 전차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나마 자려고 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쯤 사이렌이 울려서 다행이지, 씻고 있는 도중에 울렸으면 아주 큰일이 날 뻔했다.

 

특히 애덤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중에 사이렌이 울리는 바람에 볼일은 볼일대로 못 끝내고, 늦게 나왔다고 욕을 아주 바가지로 처먹었다.

 

녀석이 그렇게 억울해하는 것은 처음 봤다(솔직히 안타까운데 한편으론 웃겼다).

 

잦은 훈련은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전시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덕에 아무것도 모르던 햇병아리 같은 신병들도, 날마다 반복되는 훈련으로 조금씩 숙련도가 늘어갔다.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 출신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쓴 <폭풍 속의 씨앗>을 읽어보면, 훈련이 병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구구절절하게 나온다.

 

학생 시절에 그 책을 읽었을 땐 별로 와 닿지 않았는데. 군인, 그것도 장교가 된 직후에는 진심이 담긴 충고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기면 아직 그가 살아있을 때다.

 

비단 브루네거뿐만 아니라 티거 에이스로 전후 <진흙 속의 호랑이>를 쓴 오토 카리우스도 아직 살아있다.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의 저자들이 지금은 모두 적들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 그들과 전장에서 직접 만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그들을 죽이게 되거나, 반대로 그들이 나를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뭔가 묘한 기분이다.

 

롬멜이 쓴 책을 읽었던 패튼이 롬멜과 튀니지에서 싸웠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패튼이라면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것 같군.

 

아무튼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8월과 9월이 지나가고, 10월이 되었다.

 

아군은 몰타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몰타 일대는 독일과 이탈리아 해공군으로 득실거렸다.

 

결국, 몰타를 탈환하려는 아군의 시도는 매번 처참한 실패만 맛본 채 중단되고 말았다.

 

몰타를 장악한 덕분에 추축군은 아프리카로 병력과 물자를 마음대로 증파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대로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이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했고, 이탈리아군과 함께 국경을 넘어 진군을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수에즈 운하였다.

 

아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질 않았다.

 

원래 역사와 달리, 아군은 됭케르크 철수 실패로 전력이 훨씬 약화한 상태인 반면, 추축군은 몰타 점령으로 보급을 빵빵하게 받을 수 있게 된데다가 1941년 2월에서야 북아프리카 전장에 끼어든 롬멜과 아프리카 군단이 일찍 도착했다. 이러니 상대가 될 리가.

 

추축군의 맹공에 아군은 문자 그대로 빤스런하기 바빴고, 그 결과 순식간에 전선은 엘 알라메인까지 밀리고 말았다.

 

다행히 추축군도 늘어난 보급로 때문에 진격이 정체되었고, 그 틈을 타 아군은 방어선을 보강하긴 했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인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전황을 타개하려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

 

몇 달 사이에 처칠은 폭삭 늙은 것처럼 보였다.

못해도 원래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육해공의 군 장성들도 늙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선에서는 날마다 아군의 퇴각 소식만 들려왔고, 국내에서는 반전을 부르짖는 시민들이 연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때다 싶어 날뛰는 친독파는 덤이었고.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고 군과 경찰을 총동원해 시위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망할 BUF 놈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다우닝가가 불타고 말 것이다.

 

희대의 독불장군 처칠조차도 이제는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국민은 두 패로 나뉘어 한쪽에선 당장 전쟁을 멈추라고 그를 압박하는 중이었고, 다른 한쪽에선 뭔가 성과를 내라고 압박하는 중이다.

 

양쪽에서 압박이 들어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전쟁영웅 아서 그레이를 활용해 여론을 돌린다는 계획은 독일군 몰타 침공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보다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론은 물론, 전황까지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무언가가.

 

"다행히 적군은 엘 알라메인에서 진격을 멈춘 상태요."

 

추축군이 진격을 멈춘 이유가 아군의 항전 때문이 아니라 길어진 보급로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보급품이 쌓이는 즉시 적들은 다시 공세를 감행하겠지. 아군은 발로 걷어찬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테고. 엘 알라메인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멀지 않소. 알렉산드리아를 잃으면, 그다음은 카이로와 수에즈가 되겠지."

 

처칠이 힘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장성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나마 적들이 진격을 멈춘 지금, 뭐라도 해야 하오. 앉아서 방어계획만 세울 게 아니라, 획기적인 작전이 필요하단 말이오."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나?

 

장성들은 처칠의 재촉에 짜증이 났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성격이 지랄 맞고 툭하면 남 탓에 짬 때리기엔 선수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총리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공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 해군 장성이 고심 끝에 의견을 냈지만 처칠은 코웃음으로 화답했다.

 

지금 장난하냐?

 

"기껏 생각해낸 게 겨우 그건가? 에티오피아랑 소말리아에 득실거리는 미개한 깜둥이들을 해방한다고 저들이 눈 하나 깜빡할 것 같나?"

 

물론 처칠도 에티오피아를 영국이 해방시킨다면, 무솔리니가 입에 거품을 물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동아프리카를 친다고 해서 이집트 전선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는 또 다른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리비아와 달리 이탈리아 본국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리비아에서 동아프리카로 병력과 물자를 보내려면, 수단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수단이 누구 식민지더라?

 

이미 베를린과 로마의 전략가들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상실하는 것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으니까. 구하고 싶어도 구할 방법이 없는데, 어쩌라고?

 

무솔리니가 입에 게거품을 무는 것은 알 바가 아니다.

 

따라서 영국이 동아프리카를 공격한다고 해도, 이집트 방면의 추축군은 미동조차 않을 것이다.

 

에티오피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수에즈 공략에 집중하겠지.

 

모두가 끙끙거리며 해결책에 대해서 고심하고 있을 때, 알렉산더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각하,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어떤 거 말이오?"

"동아프리카를 건드려도 독일과 이탈리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방어에도 시급한 이집트 주둔군에게 공세에 나서라고 하는 주문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건 다 아는 얘기요. 요점만 말해보시구려."

"크흠, 그러니 관점을 바꿔서 보는 겁니다. 적들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곳을 치는 거지요."

 

처칠은 턱에 괸 손을 치웠다.

 

"적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라고? 그곳이 어디요?"

"예. 바로 프랑스령 모로코입니다."

 

알렉산더의 입에서 모로코가 나오자, 늙은 사자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더, 더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요점은 이겁니다. 우리가 모로코에 상륙해 알제리를 거쳐 튀니지로 진격한다면 저들의 본진인 리비아를 위협할 수 있게 됩니다. 가능하다면, 아예 리비아를 건너뛰고 곧바로 시칠리아나 남프랑스를 건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들도 이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겁니다. 따라서 이집트 진격을 멈추고, 황급히 본진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뒤로 물리겠지요."

"즉, 장군의 말은...... 빈집털이를 하자, 이거로군? 로마가 카르타고를 공격해 한니발을 철수시켰던 것처럼?"

"바로 그겁니다."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새 집정관으로 선출된 스키피오는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국과 그 동맹국을 공격했다.

 

허를 찔린 카르타고는 로마를 코앞에 두고 있던 한니발에게 즉시 귀환 명령을 내렸고, 한니발을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돌려야 했다.

 

여기서는 로마가 영국이고, 막상 그 로마의 후예들은 카르타고가 된다.

 

잘만 하면 처칠 자신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스키피오가 되는 것이다.

 

대영제국의 우둔한 총리는 주홍빛 상상을 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좋소! 그대로 진행하지!"

 

***

 

10월 말, 부대에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기밀로 취급되었다.

대신, 어째서 우리 대대에 먼저 출동 명령이 떨어졌는지는 알 수 있었다.

 

우리 대대가 프랑스에 파견된 기갑대대 중에서 가장 전과가 뛰어나서 그렇다나?

 

대대장 브랜슨 중령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우리의 심정은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았다.

 

아니, 겨우 그런 이유로 다른 대대는 놔두고 우리 대대만 간다고?

 

물론 다른 대대들도 우리를 뒤따라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과거에 가장 잘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제일 먼저 투입되다니!

 

평소에 별다른 대우도 없었으면서, 정작 싸우러 갈 때만 '너희가 가장 잘 싸워서 그렇다'고?

 

일 좀 잘한다는 이유로 동기들 다 쉴 때 혼자서 작업에 불려 나가는 A급 병사들의 울분을 어떤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리 따위가 뭘 어쩌겠다고.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

 

"그동안 거듭했던 훈련의 결과들을 실전에서 적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최고의 전과를 올려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모두 최선을 다하자,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 브랜슨 중령은 마지막 전투에 임하는 주인공이 된 것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훈시를 이어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일단 우리가 전장에 가는 것은 확실하고,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집트?

 

몰타가 털렸으니, 이집트로 가려면 대서양을 횡단해 희망봉을 건너 다시 인도양을 쭉 돌아야만 한다.

 

매우 기나긴 여정이 아닐 수 없다.

못해도 한 달 동안은 배에서 지내게 되겠지.

 

그런데 우리가 이집트 말고 따로 갈 곳이 있었나?

 

가만,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곳이 몇 군데 있긴 했다.

 

비시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도 있었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도 있다.

 

어쩌면 정부는 이 두 곳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집트까지 가려면 아주 머니까, 가까이에 있는 적들부터 먼저 상대해야지. 안 그런가?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우리의 목적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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