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2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2화
22화 뜻밖의 초대 (4)
"그레이 소위, 그럼 자네가 생각하기엔 우리 전차가 독일의 전차들보다 성능에서 밀린다는 것인가?"
처칠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하긴, 처칠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전차는 전반적으로 독일군의 전차보다 성능이 우수했으니 말이다.
단, 어디까지나 카탈로그상으로만 그렇다는 얘기다.
영국군의 마틸다 2나 프랑스군의 소뮤아 S35, 샤르 B1은 독일군이 보유한 그 어떤 전차들보다 화력, 방호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수했다.
하지만 속도가 느리고 포탄에 문제가 있으며 관측장비의 부실, 무전기가 없는 등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단점들로 인해 연합군은 독일보다 우수하고, 더 많은 전차를 가지고도 패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라도 문제점들을 차차 개선해 나가야지.
알고 있는 데 눈 뜨고 당할 수만은 없지 않는가.
"저희의 전차가 독일군 전차보다 성능에서 밀린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문제점이 많습니다. 무전기가 구식이라 자주 고장을 일으켜 전차 간의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방금 말씀드린 대로 대인용 유탄이 없어 보병들을 상대로는 제압이 어려움이 큽니다."
앞서 지적한 데로 일단 급하게 개선해야 할 부분은 원활한 통신 장비와 전장 상황이나 상대에 걸맞은 포탄이다.
"특히 전투가 시작되면 전차들이 가장 많이 상대하는 대상은 적 전차보단 보병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철갑탄보다 더 많은 유탄의 보급이 필수입니다."
"그런가?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인데. 그렇다면 휴행탄의 얼마를 유탄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못해도 70%는 유탄을 채우고 다녀야 합니다."
"그 정도인가?"
내 대답에 처칠은 깜짝 놀랐다.
끽해야 30~40%를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 반대인 70%가 나와버리니, 당황할 수밖에.
허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2차대전의 독일군은 전차나 돌격포 같은 기갑차량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전차 탄약고의 2/3 이상을 대인용 유탄으로 채우고 다녔는데, 이는 즉 전차보다는 보병들과 싸울 일이 많았다는 증거다.
오죽하면 독일군 전차와는 종전 때까지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는 증언이 수두룩하게 나올까.
"그리고 당장은 어렵겠지만, 2파운더보다 더 대구경 화포를 장착한 전차가 빨리 개발되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75mm급으로 말입니다. 75mm 주포로 무장한 프랑스군의 샤르 B1 전차는 독일군의 전차를 단 한방에 격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둘러 그에 준하는 전차포를 탑재해야 적과의 교전에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겁니다."
***
처칠은 내심 이 아서 그레이란 소위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그저 훈장 하나 달아준 다음,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해서 악화한 여론을 조금이나마 돌리기 위해서였다.
대중은 영웅을, 정확히는 영웅이라는 존재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
전쟁영웅이 카메라 앞에 서서 용기와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게 얼마나 좋은 그림인가?
그에게 던진 질문도 어디까지나 일종의 덕담 차원에서 한 소리였지 그다지 깊은 뜻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 친구, 말하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아군 전차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일군의 전차가 아군의 전차보다 더 우월한 점과 추후 등장할 장갑과 화력, 엔진이 개선된 전차와 자주포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어디까지 자신의 '가정'이라고 한다만, 가정치고는 너무 자세하고 현실적이어서 처칠은 순간 정말로 독일군이 그런 전차를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아직 개발 중인 무기인 6파운더 대전차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제 막 설계가 끝났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처칠이 놀라워하며 묻자, 그레이는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런 류의 무기가 개발되고 있다는 걸 얼핏 들은 적 있다고 얼버무렸다.
혹시 군사기밀이 유출되고 있는 건은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일개 소위가 그걸 알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관련 부서들을 조져야 할 필요가 있겠군.
정말로 기밀이 유출된 것이라면 그냥 두고 볼 문제가 아니니까.
얘기가 끝나자, 처칠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주 잘 알겠네.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됐어. 관련 부서에 자네가 말한 사항들을 내 꼭 전달하도록 하지."
"아, 감사합니다. 총리 각하."
그레이 소위는 쑥스러운 듯 턱을 긁적거렸다.
처칠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이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소위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주변을 흘끗 둘러보니 자리를 함께한 고위 장교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만 깜빡거렸다.
자기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일개 소위가 줄줄이 꿰고 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내일 당장 긴급회의를 열어야겠어.
처칠이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홍차의 마지막 모금을 마실 때, 그의 보좌관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각하.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슬 회견장으로 이동하시지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이거 참, 얘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군."
처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레이도 일어섰다.
처칠은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 박학다식한 우리 영웅 나으리, 기자들을 만나러 갑시다."
"예, 각하."
***
회견장으로 이동한 우리는 곧 내일 신문에 실린 사진과 기사를 쓰기 위해 모인 기자들 앞에 나란히 섰다.
처칠은 내게 웃으면서 대영제국 훈장 4등급을 수여했고, 나는 훈장을 받은 다음 그에게 경례했다. 그러자 처칠도 경례로 화답했다.
당연히 기자들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전쟁영웅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총리와 경례하는 영웅, 이 얼마나 멋진 그림이야?
신문의 일면에 실기 딱 좋은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다음이 질문 시간이었다.
기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뻣뻣하게 굳은 내게 온갖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파도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쩌다 군에 입대하셨나요?"
"처음 독일군과 마주쳤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전투가 무섭지는 않으셨습니까?"
"직접 수류탄을 던져 독일군 소대를 몰살시켰다고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나는 '친절한 태도'로 기자들의 질문 하나하나에 답변을 달아주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궁금한 게 많은 어린아이처럼 새로운 질문들을 쏟아냈다.
개중에는 황당하거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도 있었다.
"애인은 있으십니까?"
"좋아하는 취미가 뭐죠?"
"군에 입대한 것을 후회한 적은 언제인가요?"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의 유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있다면 말씀 좀 해주세요!"
다행히 비서관이 나서서 근엄한 얼굴로 '답변하기 곤란하거나 지금 이 자리와 관계없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거침없던 질문 공세가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고마워요, 이름 모르는 아저씨!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진 남자 기자가 꺼낸 말이었다.
주위에 있는 정부 관계자들의 표정을 보니, 미리 지시받고 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곁눈으로 옆을 흘끗 쳐다보니, 처칠은 아주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 중이었다. 입에 함박웃음을 띤 채로.
그의 느끼하기 짝이 없는 눈빛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잘할 수 있지? 믿고 있다고?
아, 부담된다.
그래도 밥도 얻어먹고, 훈장도 받았으니 기대에 부응해줘야겠지.
"있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말씀 좀 해주시죠."
목청을 가다듬은 뒤, 미리 생각해두었던 말들을 꺼냈다.
내가 말하는 동안 회견장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제가 국민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다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이 겪게 될 상황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세상에는 많은 위기와 재난이 있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비극과 슬픔이 국민 여러분께 언제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려움과 고난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포기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 포기하면 끝이다.
나도 이래저래 처음부터 폐급인 장교에서 시작했지만, 어찌저찌 영웅 대접을 받는 현재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간 기회는 찾아온다.
"아무리 쉽고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도중에 중단하면 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면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하면 승리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승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대영제국의 내일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일동 정적. 그리고 쏟아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는 없었다.
기자들은 수첩에 내가 한 말을 열심히 받아적기 바빴다. 중간중간에 카메라 셔터도 눌러주고.
그래도 일개 소위가 한 발언치곤 제법 그럴듯하지 않아?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말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정부 관계자들이 아주 흡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칠도 나를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헹가래라도 해주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서 참는다는 표정이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긴장해서 실수로 잘못 말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말이다.
이후로도 여러 개의 질문이 나왔지만,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 가입한 클럽은 있는가, 애인을 사귈 생각은 없냐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이라 가볍게 흘려넘겼다.
정작 진짜 문제는 회견이 끝나는 자리에서 터졌다.
"자,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다면 이쯤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영웅께선 휴식이 필요하시거든요."
아오, 뭐만 했다 하면 영웅, 영웅.
그 말 좀 제발 그만하면 안 되냐?
쪽팔려서 죽겠다고!
하지만 입 밖으로 저런 소리를 내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어정쩡하게 웃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기자들이 회견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도중, 처칠의 보좌관이 황급하게 뛰어왔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그게 실은......."
보좌관은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처칠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들을 순 없었지만, 아주 심각한 사항인 건 분명했다.
처칠의 얼굴이 굳는 게 내 눈에도 훤히 보였을 정도였으니까.
"확실한 정보인가?"
"예, 총리 각하."
"맙소사, 몰타가......."
***
몰타는 우리나라의 강화도와 비슷한 크기의 작은 섬이다.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이 작은 섬은 2차대전 기간 동안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송선을 격침해 연합군의 승리에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런 천혜의 요새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섬에 독일과 이탈리아 공수부대가 강하했다.
1940년 7월 20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