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화
20화 뜻밖의 초대 (2)
브랜슨 중령의 말대로 기상나팔이 울리기도 전에 날 데리러 차가 왔다.
마중 나온 사람은 자그마치 대위 계급의 인사였다.
차에서 내리는 그를 보고 나는 본능적으로 경례를 했지만, 그는 됐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나한테 경례할 필요는 없네, 소위. 영웅한테 경례를 받은 게 들키면, 한 소리 들을 것 같거든. 차에 타게나, 영웅 나으리!"
"하하하...... 알겠습니다, 대위님."
아으. 자꾸 영웅, 영웅거리니까 왠지 민망했다.
무슨 라노벨이나 소년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일개 쏘가리한테 영웅이라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차 내부에선 은은한 레몬향이 났다. 향수라도 뿌려둔 걸까?
애덤 녀석도 그때 나와 함께 그 현장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런던으로 가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이유가 대체 뭘까?
나는 장교고, 녀석은 일개 이등병이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둘이서 세운 공훈인데, 나만 대표해서 간다는 사실에 조금 뒤가 켕기는 기분이었다. 정작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저 내가 런던에 간다고만 하니 놀라면서 부러워할 뿐이었다.
"이대로 역으로 가서 열차를 타고 곧장 런던으로 가게 될 걸세."
문이 닫히자 차는 바로 역을 향해 출발했다.
역을 향해 가는 동안,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각종 구호와 글을 휘갈겨 쓴 팻말과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이 경찰과 대치 중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그들이 지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전쟁 반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조국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마라!"
"전쟁광 처칠은 영국 전역을 갈리폴리로 만들 생각인가?!"
시위대의 행렬을 옆에서 지나가면서 대위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 역시 분위기를 살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운전병이 문제였다.
"요즘 들어 시위가 부쩍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일병 계급장을 단 운전병이 눈치 없이 말을 꺼내자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 이 새끼. 분위기 파악할 줄도 모르냐?
혹시 이 자식도 폐급인 거냐.
본인 딴에는 생각없이 그냥 한 말이었겠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는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이거늘.
차 내부에는 무거운 적막이 돌았다.
이토록 무서운 침묵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 빌어먹을 녀석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자꾸만 말을 걸었다.
부탁이니 제발 입 좀 닥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입을 열었다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밖에 더 되지 않나 싶어 잠자코 있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고.
잠시 후 조수석에 앉아있던 대위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그래. 많이 늘었지."
이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대위를 본 나는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이라면 적당한 말로 이 상황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저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습니다."
"맞는 말일세, 소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간에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다 하면 되지."
다행히 사건은 좋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일병."
"일병 윌 클로드!"
"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입 꾹 닫고 있게나. 허튼소리 꺼내지 말고. 알겠나?"
"......."
혼나는 건 다른 사람인데, 내가 다 민망했다.
과거 폐급으로 지적받았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에휴, 내 팔자야.
***
처칠은 근래에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됭케르크에서 그 귀하디 귀한 정예군을 잃은 것도 가슴 아픈데, 국민까지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다우닝가 10번지 밖에선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중무장한 헌병들과 경찰들이 다우닝가 10번지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시위대도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대에 합류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당은 물론 보수당 내부에서도 갈수록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한술 더 떠 그가 프랑스 전역에서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쓰고 총리직에서 사퇴해야 한다는 소리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하원에서 연설하려고 할 때 사방에선 야유가 쏟아져 연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원은 그나마 예의를 차리는 편이었다.
그가 밖에서 연설하려고 하면, 반전 시위대가 득달같이 몰려들어 구호를 외치며 오물을 던져댔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국민에게 용기를 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연설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갈수록 나빠지는 여론과 시위, 그리고 안전상의 이유로 연설을 그만 두라는 주위의 '조언' 때문에 결국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지금 여론은 아~주 좋지 않소."
처칠은 손끝을 세워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론을 잠재울 어디 좋은 방법이 없겠소? 있으면 한번 말해보시구려."
묵묵부답.
꽉 찬 넓은 회의실 내부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소리만 듣고 있노라면 아무도 없는 수준이다.
빌어먹을.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겁쟁이들뿐이군.
울화가 치민 처칠은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젠장할! 프랑스에서 진 것도 서러운데, 이젠 여론조차 어떻게 해볼 수도 없단 말인가! 이러고도 어떻게 전쟁을 하겠다고!"
그가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칠 때마다 각료들은 몸을 떨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집무실로 돌아온 처칠은 화를 삭이기 위해 평소 좋아하던 시가를 뻐끔뻐끔 피워댔다.
하지만 화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창문 밖에선 전쟁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울화가 치민 그는 재떨이를 집어 냅다 던져버렸다.
"빌어먹을!"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한 비서관의 목소리였다.
"총리 각하, 알렉산더 장군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
알렉산더가?
처칠은 그가 됭케르크 전장에서 탈출 작전을 지휘할 때, 독일군의 포탄 파편이 가슴에 박히는 부상을 입어 지금까지 요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몸도 안 좋은 그가 찾아왔다고?
"들여보내게."
"알겠습니다."
1분 뒤 처칠의 집무실에 나타난 알렉산더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조금 수척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얼굴에 혈색이 좋은 것을 보면 치료는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어서 오시오, 장군.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괜찮소이까?"
"예, 각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칠의 비서가 둘을 위해 홍차와 각설탕, 우유, 크림을 쟁반에 담아서 가져왔다.
그는 소리 없이 잔과 병을 내려놓은 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처칠은 늘 홍차에 우유와 크림을 왕창 넣어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반면, 알렉산더는 홍차에 우유 조금, 각설탕 1개만 달랑 넣었다.
"향이 좋군요."
"당연하지. 실론(현 스리랑카)에서 생산한 최고급 홍차니까."
처칠은 알렉산더가 홍차의 첫 모금을 넘길 때까지 기다렸다.
홍차를 식도로 넘길 때, 알렉산더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 있소? 어디 중요한 소식이라도?"
"아,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리들의 동향이 수상하긴 하지만, 놈들이야 원래 수상한 놈들이니까요. 오늘은 다른 얘기를 전하러 왔습니다."
"다른 얘기라고?"
처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현재 전황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최근 여론이 많이 안 좋아져서, 그 해결책을 찾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알렉산더의 말에 처칠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연스레 그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두말하면 잔소리요. 가뜩이나 제리들만으로 머리가 아파서 죽겠는데, 여론까지 따라주지 않으니 이거 원!"
"그래서 말입니다."
알렉산더는 조용히 운을 뗐다.
"제게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생각? 어디 말해보시오."
그러자 알렉산더는 사진 한 장과 여러 장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 이건 뭐요?"
"한 번 읽어보시지요."
알렉산더의 말대로 처칠은 잠자코 그가 건넨 사진과 보고서를 살폈다.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은 아서 그레이.
계급은 소위, 병과는 기갑.
여기까지는 별 볼 일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보고서를 조용히 읽어나가던 처칠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그가 보고서의 마지막 줄을 읽었을 때, 알렉산더는 처칠의 얼굴에 핀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걸려들었군.
"......어떻습니까, 각하?"
"음, 좋아. 요즘 같은 시국에 딱! 어울리는 친구로구만!"
알렉산더가 무엇을 말하러 왔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모르면 총리는커녕 하원의원도 할 수 없지.
계속된 패전으로 국민의 사기는 지금 말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승전보와 국민들의 사기를 고취할 각종 영웅담뿐이다.
요즘 전선이 고요한 탓에 승전보는 없지만, 영웅이라면 있었다.
아서 그레이.
이 초짜 소위는 프랑스 전장에서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단 한 대의 전차로 독일군의 후방을 급습해 수십 명을 사살하고, 포로가 되었던 아군 병력까지 구출해내다니.
현실보단 영화에 더 가까운, 믿기 어려운 활약상이었다.
이제 이것을 적절하게 자~알 포장해서 대중들에게 내보인다면 이보다 더한 선전감도 없을 것이다!
국민에게 희망을 전함과 동시에, 잘하면 갈수록 세를 불리는 반전파(처칠은 늘 패배주의자들 모임이라고 불렀지만) 녀석들의 목소리를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독일과의 전쟁을 이끌고 가는 데 큰 힘이 되겠지.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는 한 편의 완벽한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처칠의 입꼬리가 귀에 걸린 것을 알렉산더는 놓치지 않았다.
예상대로 성공이로군.
이로써 한동안 군은 전과를 내라는 처칠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안 그래도 뒹케르크 철수 때 영국의 피해가 큰 이후로 처칠 특유의 갈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물론 영국의 총리인 그가 큰 책임감 속에 몰려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그로 인해 괴로운 건 다른 문제다.
일단 병자 아닌가.
몸과 마음 어느 한쪽은 안정이 필요했다.
어쨌든 얼마나 오랫동안 갈지는 모르겠지만, 못해도 한 달은 가지 않을까?
"이 친구를 당장 런던으로 부르게. 기자들에게도 미리 귀띔해주고!"
"예, 각하."
그리하여 우리의 아서 그레이는 런던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