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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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5화
15화 됭케르크 철수작전 (2)
영국 정부의 우려와 달리, 영국인들은 정부의 선박 징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아예 직접 배를 몰고 도버 해협을 건너 됭케르크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커다란 화물선부터 상류층의 유람선과 요트, 어부들의 작고 낡은 어선과 나룻배까지.
자그마치 600척이 넘는 배들이 됭케르크로 향했다. 조국의 아들들을 구하기 위해서.
병사들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배들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리고 너 나 할 거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순서대로 타시오! 자리는 많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배에 탄 사람은 타자마자 바로 안으로! 뒤에 사람들이 타야 하니까!"
"수건, 수건 여기 있습니다!"
이무기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던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었다.
우리 중대에게 할당된 배는 털털거리는 소리가 일품인 작은 어선이었다.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가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했지만,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에 올랐다.
어부들은 배에 오르는 병사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며 차를 권했다.
"얼렁 타라고! 뭘 가만히 서 있는겨? 빨리 안으로 꺼지지 않고."
"자, 차나 좀 마시우. 식었지만, 참고 마셔."
"아, 거기! 서 있지 말고 안으로 꺼지라고!!!"
......말투나 행동이 조금 거칠긴 하지만, 원래 뱃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나.
게다가 이 사람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우릴 구하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말이 좀 거칠어도 그러려니 해야지 뭐.
"배를 타서 좋긴 좋은데, 뭔가 기분이 묘합니다."
다 식어 빠진 차를 들고선 게이츠 상사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쩌겠어요, 뭐. 원래 뱃사람들이 입 거친 건 다 아는 사실이니......."
워낙 작은 배다 보니 파도가 일 때마다 배도 함께 출렁거렸다. 처음 배에 탄 병사들은 중심을 잡지 못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무리 파도가 심하게 일어도 난 멀쩡히 잘만 서 있었다.
이를 본 애덤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서 있을 수 있으신 겁니까?"
"응? 아, 별거 아냐. 예전에 여행 비용 마련하려고 방학 때 두 달 동안 불알친구 친척 밑에서 새우잡이 일을 한 적이 있거든. 그래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예? 새우잡이 일 말입니까?"
"소위님은 집안이 꽤 부유하신 줄 알았는데...... 여행 비용을 마련하려고 뱃일을 하셨다고요?"
......!!! 이런, 실수했다.
여긴 21세기 한국이 아니라 1940년의 유럽이었지.
그 사실을 깜빡하고 무의식적으로 21세기 한국에서 살 때의 일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의 나는 귀족인 아서 그레이니, 저들이 저렇게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귀족이 여행 비용 마련을 위해 뱃일을 하는 게 흔한 일은 결코 아니니까.
"집안이 매우 엄하신 모양입니다."
이제와서 발언을 정정하기에도 뭣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잖나.
"하하, 하하하. 뭐, 그렇죠......?"
"태어나서 설거지는 한 번도 안 해보셨을 것 같은데, 의외입니다."
"허허, 그래도 귀족이라고 다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사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죠."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런 짓거리를...... 아, 실례했습니다."
게이츠 상사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크흠, 어쩔 수 없지. 실제로도 여러 번 사고를 쳤으니까.
이건 도무지 변명할 수 없는 나의 실책이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 잘하는 수밖에.
"자, 다 탔어! 출발!"
흘수선이 평상시의 2배를 넘을 때까지 병사들을 태운 후에야 배는 퉁퉁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10명 남짓한 인원만 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배에는 자그마치 30명이 넘는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배의 속도는 현저하게 느렸고, 작은 파도에도 배는 당장이라도 전복될 것처럼 기우뚱거렸다.
배에 탄 병사들은 행여 배가 전복이라도 될까봐 조용히 앉아있었다.
정작 배의 선원들은 배가 어떻게 되건 말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기 바빴다.
저게 베테랑들의 여유란 말인가?
하여간 대단한 사람들이다.
"어이, 비켜봐. 지나가야 하는데 앉아있으면 어떡해? 내가 날아다닐까?"
"죄, 죄송합니다."
배는 해변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질수록 해변에 모인 병사들의 크기도 점점 작아졌다.
처음엔 엄지손가락만 했던 병사들이 10분 뒤엔 그 반이 되었고, 30분 뒤엔 손톱만 한 크기로 변했다.
1시간 뒤에는 티끌만 한 크기로 변해 잘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지금 같은 속도로는 저녁이 될 즈음에야 영국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진 잠이라도 자둘 생각으로 벽에 머리를 기대는데, 해변에서 포성이 들려왔다.
"뭐, 뭐야?"
"방금 무슨 소리야?"
포성을 들은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문에 배가 오른쪽으로 크게 흔들거렸다.
앉아있던 병사들이 일어선 병사들에게 쌍욕을 퍼붓자, 그들은 머쓱해 하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소대장님도 방금 들으셨습니까?"
"그래. 이게 무슨......."
"저기 좀 보십쇼!"
게이츠 상사가 해변을 손으로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해변에 연달아 검은 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습인가?
하지만 하늘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설마...... 포격?"
***
5월 25일.
"빌어먹을!"
독일이 낳은 희대의 명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평소 온화하고 느긋했던 그가 불같이 화를 내자 참모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낫질 작전이 시작되자 구데리안은 제1, 2, 10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제19기갑군단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벨기에군과 프랑스군을 차례로 유린했다.
연합군은 발에 날개를 단 듯한 구데리안의 재빠른 공격에 맥을 못 췄고,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전선은 돌파당하기 일쑤였다.
오래도록 꿈꿔왔던 대승이 코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중지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하루 전, 히틀러는 전군에 진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연합군의 반격에 대한 우려와 공군만으로 포위된 연합군을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괴링의 호언장담이 얽혀 일어난 독일군의 '비극'이었다.
진격 중지 명령을 받은 구데리안은 노발대발했다.
승리가 코앞에 있는데, 진격을 멈추라니!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진격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구데리안은 고민했다.
이대로 진격하면, 명령 불복종으로 추후 처벌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명령대로 가만히 있으면 거의 다 잡은 적을 놓치고 만다.
아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각하?"
걱정된 참모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구데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눈앞에 놓인 지도를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지도에 표시된 됭케르크에 시선을 집중했다.
됭케르크.
그곳에 지금 연합군 34만 명이 몰려 있다.
자그마치 34만 명!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얌전하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총통의 명령인데, 까라면 까야지.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하지만 구데리안은 보통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늘 보통, 평범보다는 혁신,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왔고, 그게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이제 그에겐 두 개의 길이 남아있었다.
복종과 불복종이라는 길이.
복종을 택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전쟁이 끝난 후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대가로 총통의 칭찬을 받고 진급할 것이다.
하지만 불복종을 택하면, 그에겐 총통의 명령을 어겼다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 아니, 전쟁이 끝나기 전에 본국으로 소환되어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군사재판에 회부 되어 그동안의 명예와 업적을 모두 무시당한 채 지위를 박탈당하고 평생 한직에서 머무를지도 모른다.
대신, 포위망에 갇힌 영국군과 프랑스군 수십만 명의 존재를 완전히 '무(無)'로 만들 수 있다.
포위된 병력의 숫자도 숫자지만, 영국이 수년간 피땀을 흘려가며 만든 정예군이었다.
그런 정예 병력은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경험까지 갖춘 정예 병사 1명의 가치는 이제 막 군대로 끌려온 어중이떠중이 10명보다 더 컸다.
그런 정예 병력을 한 번에 잃어버리게 된다면, 영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이 아주 곤란해지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구데리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조용히 지도를 노려보는 동안, 불쌍한 참모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공손히 기립해 있어야만 했다.
한참 말이 없던 구데리안이 마침내 입을 열자 슬슬 지쳐가던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래, 결심했어."
오랜 침묵을 깨고 내뱉은 첫마디에 참모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하, 무슨 일이신지......."
"결단을 내렸다, 이 말일세."
구데리안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에겐 아직 10기갑사단이 있지 않나."
"예? 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최고사령부에선 10기갑사단은 예비대로 돌리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구데리안 휘하의 3개 기갑사단 중, 1기갑사단은 칼레 방면에 2기갑사단은 불로뉴에 있었다.
됭케르크를 맡을 예정이었던 10기갑사단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대장이 이끄는 제1기갑집단군의 예비대로 지정된 상태였다.
"최고사령부에선 온 명령을 잊게. 지금부터 제10기갑사단은 원래의 임무를 수행한다."
구데리안의 폭탄 발언에 지휘 텐트에 있던 모든 이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참모들은 물론, 무전기를 만지작거리던 통신병과 차를 내오던 당번병들까지 모두 다.
"하지만 각하! 그랬다간 최고사령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네. 지금부터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네. 그러니 자네들은 군말 없이 내 명령에 따르도록, 알겠나!"
우물쭈물거리는 참모들에게 구데리안은 지휘봉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승리가 코앞에 있다! 역사를 바꿀, 절호의 기회가 지금 우리 손안에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구데리안의 명령이 떨어지고 1시간 뒤,
제10기갑사단의 전차들은 일제히 됭케르크를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