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화
13화 퇴각
중대장이 되어버린 폐급을 아시오?
그것도 이 모든 게 겨우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면 믿겠소?
나는 믿소.
왜냐면, 바로 내 이야기거든.
고작 하룻밤 사이에 (폐급)소대장에서 중대장이 된 나는 두뇌가 새하얗게 변색 되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내게 중대장을 맡긴다고? 제 앞가림도 못 하는 개폐급에게?
사양할 수만 있다면 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대에는 나 말고 다른 장교가 없었다.
타 중대의 상황도 거의 다 비슷했다.
어제 있었던 전투로 장교들이 적잖이 전사한 탓에 지금 연대는 장교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겐 게이츠 상사가 있었다.
비록 직위는 나보다 낫지만, 짬밥과 경험만큼은 나보다 훠~얼씬 위에 있는 고참 중 고참이라 의지가 되는 사람이다.
다행히 본인도 내가 미덥지 않았는지 부중대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에 그는 놀라면서도 흔쾌히 수락했다. 이런 부탁 자체가 꽤나 뜻밖인 반응이었다.
내게서 무슨 반응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눈앞의 일들부터 해치우기로 했다.
한시도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부대는 다시 퇴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독일군의 진격이 워낙 빨라서, 사령부에서조차 개별적으로 알아서 퇴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패색이 짙어진 지금 조금이라도 빨리 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다.
최종 목적지는, 내 예상대로 됭케르크였다.
"이봐, 그건 그냥 놔둬!"
"어, 하지만 상사님, 이건 나름 중요한......."
"이 멍청한 놈아, 전차도 없는데 예비 부품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려고? 고물상에서 팔아서 용돈으로 쓰게? 쓸데없이 공간만 잡아먹으니 그냥 버려."
역시나. 게이츠 상사는 아주 효과적으로 병사들을 지휘하며 철수 작업을 이끌었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능수능란하게 지시를 내리며 뭘 하면 되는지, 뭘 두고 가고 뭘 챙겨야 하는지 직접 설명했다.
나는 그 옆에서 짐짓 근엄한 척을 하며 뒷짐을 지고 서 있기만 했다.
게이츠 상사가 내게 요구한 사항이기도 했다.
"소위님께선 그냥 어디가지 마시고 제 옆에 있기만 하시면 됩니다. 지시를 내리는 것은 제가 할 테니, 아시겠습니까?"
남들이 보기엔 장교 체면에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내겐 체면이란 게 원래부터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아무튼 게이츠 상사 덕분에 철수 작업은 금방 끝이 났다.
작업이 끝나자,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긴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라고.
"대대장님, 제1중대, 철수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래? 인원이 없어서 그런지 무척 빠르군. 먼저 출발하게. 나머지 중대는 아직일세."
대대장은 내 보고를 듣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먼저 출발할 걸 명령했다.
중대로 돌아와 대대장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며, 미리 운전석에 앉아 트럭에 시동을 걸어놓고 있던 운전병에게 소리쳤다.
"출발해! 우리가 할 일은 이제 끝났어!"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이제 끝났다.
남은 일은 됭케르크로 떠나는 것뿐이었다.
***
됭케르크로 가는 길은 예상대로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도로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과 패잔병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달라붙어 자기들도 태워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마차나 짐들 때문에 막힌 도로를 뚫어야 할 때도 있었고, 진창길에 차가 빠져 몇 시간 동안 끙끙대며 겨우 차를 빼낸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적은 바로 독일기들이었다.
제공권이 독일군의 수중에 있었기에 됭케르크로 가는 내내 우린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언제 구름 뒤에서 Bf109나 슈투카가 나타나 기총을 드르륵하고 갈겨댈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살고 싶다면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아주 작은 실수나 방심으로도 목숨이 오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한 번은 엔진이 덜덜거려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손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비행기 1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처음엔 적기인 줄 알고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날개에 철십자 마크 대신 둥근 원 3개가 겹친 표식이 있었다.
녀석은 Bf109가 아니라 RAF(영국 공군)의 호커 허리케인이었다.
"안심해, 이 녀석들아. 저건 아군기야."
갑작스런 비행기의 출현에 당황했던 병사들도 아군기란 말에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은 곧장 기수를 낮춰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우릴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뭐, 뭐야?!"
아니, 대체 뭔데? 왜 우릴 향해 총을 쏘는 거야?
다행히 녀석이 쏜 총탄에 맞아 죽은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난데없이 아군기로부터 공격을 받은 우리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했다.
나무 뒤로 몸을 피한 게이츠 상사가 내게 항의하듯 소리쳤다.
"뭡니까, 소위님! 저놈, 아군기 맞습니까?"
이, 이상하다. 분명 아군기가 맞는데.......
순간, 내가 잘못 봐서 적기를 아군기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내 위상은 앞으로 영원히 회복될 수가 없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야가 누레지면서 진짜 X 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놈은 적기가 아니라 아군기가 분명했다.
기수를 돌릴 때, 꼬리에 그려진 RAF 표식이 선명하게 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꼬리를 봐요! 아군이 확실하다니까!"
"그런데 왜 저놈은 같은 아군인 우릴 공격하는 겁니까?"
그러게. 왜지.
왜 같은 아군인 우릴 공격하는 거야?
설마, 우리를 적군으로 오해해서?
가만 생각해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공중에 있는 조종사 입장에선, 지상에 있는 우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아직 실전 경험이 전무한 햇병아리 조종사라면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쏘려고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우리가 적군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그 방법뿐이었다.
"모두 일어서서 옷을 흔들어! 흔들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모자를 벗어 손에 쥐고 마구 흔들었다.
처음엔 날 미친놈처럼 바라보던 병사들도, 곧 내 뜻을 이해하곤 옷가지를 벗어서 마구 흔들었다.
다행히도 재차 오인 공격은 없었다.
우리에게 재차 공격을 퍼붓기 위해 다가오던 허리케인은 이내 기수를 올려 동쪽 하늘로 날아갔다.
늦긴 했지만 아군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전투기가 구름 사이로 사라진 직후,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십년감수했네, 진짜.
하마터면 목숨과 체면,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잃을 뻔했지만. 간신히 대형 사고를 비켜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건진 뜻밖의 소득이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소위님."
"응, 뭐가요?"
"그 짧은 순간에 그런 판단을 다 내리시고. 다시 봤습니다, 정말. 전 소위님께 그런 용기가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 하하하...!"
게이츠 상사의 신뢰를 조금이나마 얻었다는 것 정도?
분명 몇 분 전과 비교해서 나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긴 했다.
여전히 미덥지 않다는 시선도 있지만, 예전만큼이나 답 없는 간부라고 무시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뎠다는 게 어딘가.
천 리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장하다, 나!
"자, 자!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야지! 수리는 다 끝났냐?"
"앞으로 5분만 있으면 됩니다!"
"좋아, 5분 뒤 출발이다! 미리 볼일 다 봐둬! 중간에 오줌 싸고 싶다는 놈 있으면 내 손에 죽는다, 알겠냐?"
"예, 상사님!"
게이츠 상사의 기세 좋은 외침과 함께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우리는 졌네."
참모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영국 해외원정군 총사령관 고트 경 존 베레커는 침울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의 말을 들은 참모들은 일제히 고개를 떨구거나 천장을 올려다봤다.
패전.
그 말 한마디가 그들의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며 심장을 후벼팠다.
이보다 더 무겁고, 사태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동맹인 프랑스군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으며, 벨기에와 네달란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믿을 만한 영국군 또한 큰 타격을 입고 붕괴 직전이었다. 살아남은 부대들은 모두 신속히 퇴각 중이었다.
한편 독일군의 장갑차가 파리에 입성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소식이 전해졌는지 이미 파리에는 공황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보다 안전한 시골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중이었다.
"헨리."
고트 경은 자신의 부관 헨리 포월리 중위를 불렀다.
"예, 각하."
"지금 전군에 전달하게. 며칠 전 내렸던 공격 명령은 취소라고. 전부 다."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그래. 더 이상의 공격은 아무 의미가 없어. 피해만 늘어날 뿐이지."
"......."
"그리고, 전 병력은 즉시 대서양 해변 일대로 퇴각한다. 그런 다음 본국에서 온 배를 타고 이곳을 떠난다. 이게 내 명령일세. 알아들었나?"
"알겠습니다, 각하."
헨리 중위가 명령 전달을 위해 회의장 밖으로 나가자 고트 경은 찻잔을 집어 들었다.
잔 속의 홍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마셨다.
홍차는 오늘따라 더욱 썼다.
설탕을 넣지 않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리라.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눈치를 보던 참모장 중 한 명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고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각하, 그렇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계획? 계획이라...... 방금 말하지 않았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그는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았다.
홍차의 표면에 물결이 일었다.
"그런 다음에는......."
"그건 모르겠군. 당장 눈앞의 문제만으로도 죽을 거 같거든. 다음이야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 작자가 영국 상륙을 시도하면, 우리의 임무는 이를 막는 게 될 테고. 그자가 다른 계획을 세운다면 우리 계획도 달라지겠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일세."
질문은 한 참모장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이미 고트 경의 시선은 참모를 떠나 벽에 걸린 거대한 유럽 전구 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총리께 전해야지. 우리도 프랑스 꼴이 되지 않으려면, 이만 물러서야 한다고. 총리께서도 이해하실 거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벗어두었던 군모를 챙겼다.
참모들도 모두 기립했다.
"회의는 그만 끝내도록 하지.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