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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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2화
52화 어둠의 시간 (2)
옥스퍼드에 마련된 새 주둔지에 도착한 대대는 대대적인 재편성에 들어갔다.
북아프리카에서 머문 한 달하고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후송된 병사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신병들이 대거 투입되었고, 새 장비도 지급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점은 그 유명한 스텐 기관단총이 지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실제 역사에서 스텐은 1941년에 개발이 완료되어 보급이 시작되었지만, 여기선 빨리 개발을 마친 모양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됭케르크에서 육군이 괴멸당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높으신 분들이 개발자들을 열심히 갈군 덕택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자, 모두 주목하도록. 이 신형 기관단총의 이름은 스텐이다. 우리 개발자들이 너희들을 위해서 만든 총이지. 가격도 싸고, 무엇보다 생산성도 좋은 효자 같은 녀석이다. 이 녀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줄 테니 집중해서 보도록."
그동안 밀려있던 진급식이 있었다.
내 충실한 부하들인 많은 이들이 진급했는데, 애덤과 잭슨, 토마스도 이등병 딱지를 떼고 일등병으로 진급했다.
진급식을 진행되는 내내 이 세 놈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떠나질 않았다.
"진급 축하한다, 새끼들아!"
"감사합니다, 소대장님!"
자식들, 진급한 게 그리도 좋을까.
이때만큼은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표정이다.
하긴, 나도 국군에 있을 적에 저랬지.
전역까지 1년이 넘게 남았다는 것을 깨닫곤 금방 수그러들긴 했지만.
내게 있어 진급보다는 집에 돌아가는 게 가장 좋은 거긴 하지만.
아, 물론 지금 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는 다르려나.
어딜 가든 전쟁터니 꼭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편하란 법도 없으니까.
아무튼, 꼭 이 말은 해야겠지.
"너희들, 너무 좋아하진 마라. 아직 전역하려면 한~참 남았으니 말이야."
"아, 모처럼 기분 째지는데 왜 초를 치십니까?"
모처럼 노가리나 까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잭슨이 달려오면서 나를 찾았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지만 꽤나 급해 보였다.
"소대장님, 대대장님께서 장교들은 모두 모이시랍니다!"
응? 갑자기?
***
"인터뷰...... 말씀입니까?"
"그래. 인터뷰 말일세."
브랜슨 중령은 귀찮게 됐다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요즘 전황이 많이 안 좋아. 그래서 이미지 쇄신 차원인지 뭐니 하는 이유로 부대에 기자들을 대거 초청해서 인터뷰를 한다고 하네. 뭐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미리 병사들 교육 좀 하라 연대장님께서 말씀하셨네. 괜히 안 좋은 소리 했다가 기사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을 하면 됩니까, 대대장님?"
이름을 모르는 중위-2중대 출신인가?-가 손을 들고 발언했다.
그러자 브랜슨 중령은 답답하다는 듯이 질문한 중위를 흘겨보았다.
"내가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하나? 병사들 입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말들, 패배주의니 뭐니 하는 것들 말일세. 무조건, 무~조건! 기자들 앞에선 좋은 말만 해야 하니, 다들 명심하도록. 행여 실수라도 했다가 일이 커지면 그땐 전부 다 끝장이야. 알겠나? 알아들었으면 다들 가봐."
그럼 그렇지. 이래야 군대지.
프로파간다는 시대와 국가를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든 통용되는 법이다.
군대의 밝고 긍정적인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 기자들을 초청해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발상 덕분에, 나는 쉬지도 못하고 소대원들을 불러 모어 내일 있을 인터뷰에서 얘네들이 헛소리하지 못하도록 교육해야만 했다.
국군에 있을 적에 국방일보에서 기자들 온다고 개인 정비 시간 때 집합해서 강제로 정신교육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잖아도 모처럼 TV에서 <아는형님> 재방송 보고 있다가 끌려 나온 터라, 그때 기분이 참 뭣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반대 입장이 되어 병사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해서, 내일 있을 인터뷰 때 하면 안 되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 설명할 테니 주의해서 듣도록."
예상대로, 소대원들은 반응은 한결같이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들이다.
이해한다, 이해해.
잘 쉬고 있는데 불려 나와서 이딴 소리나 듣고 있으면 누구나 현타가 오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바로 군대인데.
"새끼들, 표정 봐라? 나중에 질문해서 제대로 못 하면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지?"
적당히 협박성 멘트 한 번 날려주자 죽은 동태 눈깔 같던 눈들이 금방 초롱초롱해졌다.
음, 성능 확실하군.
애꿎은 소대원들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혹시 모를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선 필요한 희생이다. 그렇고 말고.
***
결전의 날 아침이 밝았다.
"자, 여러분!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기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우린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청소를 끝마친 뒤 연병장에 도열했다.
정문을 통과해 부대 안으로 들어온 기자들은 간단한 수속을 끝낸 뒤 흩어져서 병사나 장교, 아무나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더 썬>의 제이 포머 기자입니다. 잠시 몇 가지 좀 여쭤봐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생전 처음 하는 인터뷰에 바짝 언 병사들은 가벼운 질문에도 큰소리로 대답하기 바빴다.
음, 아주 좋은 자세야. 어제 시간을 들여 교육한 보람이 있군.
"먼저 성함이랑 계급을 말씀해주세요."
"애덤 키드! 계급은 일병입니다!"
"하하...... 목소리 톤 좀 낮추셔도 됩니다. 전 기자니까요."
"알겠습니다!"
"군대에 입대하고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적 없습니다!"
좋아. 완벽하군.
"잭슨 씨, 자신이 무엇을 위해 복무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명예와 조국, 자유를 위해 복무한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씨는 나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쳐죽일 놈들이죠."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들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장교와 하사관들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댔다.
마침 날 알아본 기자 여럿이 달려와 나를 둘러싸고 여러 질문을 던져댔다.
"아서 그레이 중위님?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이 양반, 시작부터 애매한 말을 하는군.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당연히 비극이자 일어나선 안 되는 나쁜 일이지.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이 질문에 숨은 함정을 파악해야 한다.
위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간, 나중에 패배주의니 반전주의니 뭐니 하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1세기도 그렇지만, 20세기에도 참된 기자 정신을 가진 기자들은 몇 명 없거든.
대다수의 기자들이 사소한 발언 하나에 여러 양념을 묻혀서 자극적인 발언으로 포장하길 좋아한다. 신문 파는 데 도움이 되니까.
"일어나선 안 되는 비극이지만, 현실로 닥치면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내 대답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서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대놓고 지어 보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첫 난관을 무사히 넘긴 내게 두 번째 난관이 찾아왔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사라 모즈 기자입니다. 전쟁터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반전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제가 감히 뭐라고 그분들께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자신을 사라라고 밝힌 여기자는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함정이었군.
다행히 세 번째 질문부터는 정상적인 질문이었다.
"어쩌다 기갑병과에 지원하신 건가요?"
"기갑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거든요."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리라고 확신하시나요?"
"물론이죠."
주변을 둘러보니 무어 대위와 게이츠 상사도 자신들 몫의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행히 관록 있는 양반들이라 기자들의 다소 무례해 보이는 질문도 요령 있게 넘겼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하실 계획이신가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죽은 전우들이 떠오를 때마다 전쟁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우리가 이겨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할 게 바닥났는지 말수가 줄었다.
이제 끝났나 싶은 마음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기자 몇 명이 브랜슨 중령과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엔 인터뷰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었다.
"1중대장!"
"예!"
"기자분들이 인터뷰만으론 뭔가 밋밋하다가 조금 더 색다른 것을 보여줄 수 없냐고 하시는데, 뭐 좋은 방법이 있나?"
색다른 거?
아니, 군대가 무슨 놀이동산이냐?
그 얘기를 들은 나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난데없이 황당한 질문을 받은 무어 대위도 얼굴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작 사건의 원흉인 기자들은 한 발치 떨어진 곳에 서서 우리한테 '어떻게 좀 해봐'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아, 그래! 이건 어떤가?"
"?"
한참을 고민하던 브랜슨 중령은 이내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자네, 사관학교에서 하던 '완전군장 축구' 기억나나?"
완전군장 축구? 그건 또 뭐야?
국군에서 하는 전투축구는 알고 있어도, 완전군장 축구는 처음 듣는데. 서로 비슷한 건가?
"예, 기억납니다."
"그럼 모처럼이니, 저기 기자분들께 우리의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을 보여주자고. 좋은 그림이 될 걸세."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
'완전군장'이란 말이 붙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브랜슨 중령이 제안한 완전군장 축구는 그야말로 지옥의 형벌 그 자체였다.
이름 그대로, 완전군장을 한 채로 축구를 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그래, 바로 이거야! 이거! 난 이걸 원했어!"
브랜슨 중령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대단히 만족스러운 듯 박수를 쳐댔고, 기자들은 카메라의 셔터를 눌리기 바빴다.
'X발, X발, X발, X발, X발!'
무어 대위에 의해 반강제로 공격수로 지정된 나는 무게가 수십 kg이나 되는 군장을 메고, 머리엔 전투 때도 쓰지 않는 보병용 철모를 쓴 채 연병장 위를 굴러다니는 축구공을 죽어라 쫓아다녀야 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이렇게 무겁게 힘든 것일 줄이야. 생전 처음 아는 사실이다.
"이봐, 그레이 중위! 공이 저쪽으로 갔잖아! 빨리 빨리 뛰라고!"
브랜슨 중령의 참견을 들으며 나는 내면에 살인 충동이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당장 기자들한테 보여줄 게 필요하다며 완전군장 축구를 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그냥 하면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지는 소대는 일주일간 화장실 청소가 말이 되냐고.
덕분에 설렁설렁해도 되는 축구가 갑자기 모두의 명운을 건 데스매치가 되어버렸다.
"소대장님! 저쪽입니다! 저쪽!"
"패스, 패스해! 이 새끼야!"
"다 비켜, X발!"
"구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