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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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9화
49화 사막의 여우들 (8)
피터는 정신없이 뛰었다.
사방이 불바다였고, 사방이 전쟁터였다. 포성과 비명이 가득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건물 사이로 필사적으로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데다 불의 열기와 연기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피터는 목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겨우 연기를 뚫고 나온 피터는 얼굴에 검댕이 묻어 걸어 다니는 석탄처럼 보였다.
수통에 든 물을 얼굴에 들이부은 후에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죽겠네, 진짜.
피터는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래포대를 쌓아서 만든 진지 뒤에서 3명의 병사가 제각기 다른 곳을 향해 총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피터, 빨리 와!"
피터의 전우인 제임스였다.
전투 중에 부상을 입었는지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정작 제임스 본인은 이마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 너 혼자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오다가 다 죽었어. 빌어먹을 크라우츠 새끼들 때문에."
피터는 어깨에 메고 있던 리-엔필드 소총을 고쳐잡고 전방을 주시했다.
옥상이 불에 휩싸인 벽돌 건물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제리인가?
주변이 어두워서 상대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좀처럼 구분이 되질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같은 아군을 죽일 수도 있었기에 피터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잠시 망설였다.
그가 망설이는 동안, 건물 뒤에 숨어서 눈치를 보던 그 병사는 이내 결심한 듯 밖으로 튀어나왔다.
머리에 쓴 철모는 납작한 브로디 철모와 달리 냄비 형상이었다.
저걸 썼다는 뜻은······.
"제리다!"
피터는 서둘러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탄은 독일군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노리쇠를 젖혀 탄피를 빼냈을 땐, 이미 적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난 후였다.
"젠장."
공중에서 강하한 독일군 공수부대로 인해 카이로 일대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몰타에서 공수부대를 투입해 한바탕 재미를 독일은 카이로 함락에도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방공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독일군이 강하에 성공하여, 카이로 시내를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었다.
지금 카이로 일대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후방인지 모르는 최악의 전쟁터.
어디서든 적이 나타날지 몰라 순간순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이었다.
"역시 부모님 말씀대로 얌전히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는 거였는데."
"아직도 그 생각 중이냐. 아서라, 아서. 어차피 전쟁 터지면 징집되었을 텐데."
피터의 푸념에 제임스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총에 새 탄창을 끼워 넣었다.
피터와 달리, 교도소 생활도 해 본 적 있는 제임스는 군에 입대한 것을 딱히 후회하진 않았다.
다만, 육군 대신 해군에 입대하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해군에 있었다면, 카이로 한구석에서 이렇게 총질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텐데.
"야, 왜 안 쏴?"
"총알이 다 떨어졌어."
브렌 경기관총을 짧게 끊어서 쏘던 병사는 총알이 다 떨어지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예비 탄창도 모두 소진한 후였다.
총알이 없는 기관총은 무용지물이었다.
사방에서 적들이 나타나면서 보급이 끊긴 지 오래였다.
"인근 진지로 가서 총알을 구해볼게."
"가능하겠냐? 그쪽에서 자기들 쓸 것도 없다고 할 텐데?"
기관총 사수가 탄약을 구하기 일어서는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든 총알이 그의 목을 관통했다.
목에 구멍이 뚫린 병사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무슨······!"
피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엽총을 든 이집트인 두어 명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손에 들린 엽총의 총구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
이집트인은 재차 방아쇠를 당겨 쓰러진 동료를 붙잡고 있던 병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피터와 제임스는 그들을 겨냥해 총을 쏘았다.
두 발의 총알은 제각기 다른 이집트인들을 맞추었다.
이집트인들이 쓰러져 신음을 흘리자 제임스는 다가가서 그들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뭐, 뭐야 이거? 왜 저놈들이 우릴 향해 총을 쏘는 거야?"
"몰라서 묻냐? 제리들에게 넘어간 거지! 이래서 아랍 놈들은 믿으면 안 된다고······!"
난데없는 이집트인들의 습격에 피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건물 아래를 보자, 손에 엽총이나 쇠스랑, 몽둥이 같은 무기를 든 이집트인들이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리들만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이제는 이집트인들까지 상대해야 한다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피터는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아주 환장할 노릇이군.
"야, 피터. 일어나. 움직여야 해."
"어디로 가게?"
"여기 있으면 언제 이놈들의 동료들이 몰려올지 몰라. 그전에 다른 진지로 가야지. 우리 둘만으론 놈들이 몰려오면 상대하기 힘들어."
제임스의 주장도 언뜻 들으면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피터의 생각은 달랐다.
"거기까지 가다가 저놈들 패거리와 마주치면? 그땐 어떡하게? 그냥 다른 진지에서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나아."
피터의 말을 들은 제임스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혼란스럽기는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제임스 말대로 다른 진지로 가야 하나? 어차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하지만 도중에 제리들이나 폭도들과 마주치면?
그들에게도 무기가 있었지만, 수적으로 우월한 적들에게 포위당하면 그땐 정말 끝이었다.
이곳에서 죽치고 있는 게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무방비한 상태에서 적과 마주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고민하는 피터의 뒤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뭐가 떨어진 거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던 피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땅바닥에 떨어진 건 다름 아닌 수류탄이었다.
"이런──."
그가 수류탄을 주워 되 던지기 전에 수류탄은 환한 빛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폭발의 충격으로 제임스는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3, 4m 뒤로 떨어졌다.
지면에 내동댕이쳐진 제임스는 극심한 고통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심장이 폭발한 것만 통증이었다.
그는 일어서고자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피터를 응시했다.
피터, 한때 그의 동료였던 무언가는 처참하게 찢어진 상태로 사방에 널려 있었다.
눈에 흐릿하게 보이는 시뻘건 고깃조각들이 '피터'였다.
제임스의 숨이 서서히 끊어지려고 할 때, 그의 귓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게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환청인지 알 수 없었다.
***
"영국 놈들을 모두 죽여라!"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께서 우릴 지켜보고 계신다!"
이집트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영국이 자신들을 사실상 식민지 취급하면서, 무시하고 차별했던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롬멜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이집트 깊숙히 전진했다.
추축군의 전진과 영국군의 퇴각 소식은 곧 이집트인들에게도 전해졌고, 그들은 세상 두려울 게 없는 것처럼 보였던 그 영국이 연패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다 독일군 공수부대가 카이로에 강하해 한바탕 난리가 나자,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한 이집트인들은 일제히 집을 뛰쳐나와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창 공격을 받고 있는 영국군에 입장에서는 아니 밤중에 홍두깨나 다름없었다.
비록 이집트인들이 통일된 체계가 없고, 무장도 제각각인 오합지졸에 불과했지만. 숫자 하나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그들에겐 '영국을 향한 증오'라는 가장 큰 무기가 있었다.
지금까지 당해온 차별과 억압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신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직접 천벌을 행하자!
분노와 증오는 보잘것없는 무기를 든 이집트인들을 싸움에 미친 광전사로 만들었다.
도처에서 이집트인들이 공격해오자, 영국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장과 규율 둘 다 영국군이 이집트인들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영국군에겐 적이 너무 많았다.
카이로 외곽의 추축군뿐만 아니라 카이로 시내에 강하한 독일군 공수부대까지, 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
"이집트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확실한 정보인가?"
웨이벌은 부관의 보고에 믿기 어렵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렇습니다, 각하. 여러 번 확인한 사실입니다. 무장한 이집트인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아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것도 제리들의 짓인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럴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합니다. 아직 어떤 연결점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빌어처먹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군.
하늘에선 제리들이 내려오질 않나, 이집트 놈들은 갑자기 폭동을 일으키지 않나.
웨이벌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독일군이 카이로에 강하해 대혼란이 일어나자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냐고 판단한 이집트인들도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독일군과 싸우기 바쁜 영국군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번 봉기가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조직화된 움직임 대신, 서로 몰려다니며 눈에 띄는 영국군을 무작정 공격하기 바빴다.
게다가 이집트인들의 무장 수준은 민병대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기껏해야 낡디낡은 구식 엽총과 몽둥이 같은 냉병기가 다수로,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영국군에겐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문제는 카이로에 강하한 독일군 공수부대였다.
몰타에서 그러더니 이곳 카이로에서도 독일군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영국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상상도 하기 싫은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리라.
"전 병력에 전하게. 무장을 갖춘 이집트인들은 사살하되,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대로 놔두라고 말이야. 물론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젊은 소령이 경례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밖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날카로운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총성을 들은 웨이벌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린가?"
"모, 모르겠습니다. 확인을······."
권총을 빼 들고 더듬거리며 밖으로 나가던 부관은 이내 몇 발의 총알을 맞고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부관의 머리가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바닥에 부딪힐 때, 두개골에 금이 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방 안으로 수류탄 한 발이 날아왔다.
바닥을 구르는 막대 수류탄을 본 웨이벌은 본능적으로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가 몸을 숙이자마자 수류탄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