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8화
48화 사막의 여우들 (7)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부터 카이로는 혼란에 빠졌다.
홍해를 거슬러 올라와 이집트에 도착한 병력은 땅에 발을 딛는 즉시 전장으로 향했다.
휴식? 재편성?
독일군이 당장 카이로로 밀고 들어오게 생겼는데 그딴 게 있을 리가.
독일군도 문제였지만, 바닥을 뚫고 멘틀까지 추락한 병사들의 사기와 이집트인들의 민심도 큰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수에즈 운하를 소유하고, 자국의 정치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영국에 대한 반감이 큰 상태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추축군이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켰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이집트의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부관의 보고에 중동 사령부 총사령관직을 맡고 있는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은 미간을 좁혔다.
"환장할 노릇이구만. 당장 독일군이 코앞까지 왔는데, 이젠 아랍놈들 눈치까지 봐야 한다니."
그는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히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천하의 대영제국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추락했지?"
"......."
부관은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서서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사령부 건물 밖에선 피난을 떠나려는 이집트인들과 이를 막으려는 헌병들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군수물자 통행 때문에 안 된다니까! 몇 번을 말해!"
"집으로 돌아가!"
도로는 전선으로 향하는 트럭들로 꽉꽉 들이차 있었다.
교통 통제를 담당하는 헌병들은 수레에 짐을 싣고 밖으로 나온 이집트인들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지만, 이집트인들은 막무가내였다.
"언제 전쟁터가 될지 모르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는 거야?"
"거기 당신! 당신도 이집트인이잖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영국군 헌병들과 함께 교통 통제를 하고 있던 이집트인 경찰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영국군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던 이집트인 경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자, 자. 여러분, 일단은 도로 통행이 불가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언제 독일군이 올지 모른다잖아!"
"집에 있다가 공습이라도 당하면, 그땐 어떡하고?"
이집트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었다.
전선에 보낼 병사 한 명도 아쉬운 판국에 언제 이집트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줄 몰라서 후방에도 병력을 묶어놔야 한다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됭케르크만 아니었어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텐데 말이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만, 됭케르크의 일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웨이벌이 파이프를 재떨이에 대고 재를 털어내려는 순간,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가, 각하! 공습입니다! 서둘러 대피를!"
"젠장, 알겠네."
웨이벌은 서둘러 외투를 걸쳤다. 그리곤 파이프와 각종 기밀 서류가 담긴 가방을 들고 서둘러 사령부 지하에 위치한 방공호로 뛰어갔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카이로의 모습은 사진책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게다가 시간이 밤인 것도 컸다.
"이렇게 어두워서야, 뭐가 피라미드고 뭐가 스핑크스인지 알 길이 없구만."
라머스는 가볍게 농담을 하면서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그의 목에 걸린 1급 철십자훈장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자, 가자!"
OK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출입구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 그의 중대원들도 중대장을 따라 출입구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윽고 카이로의 밤하늘은 수백 개의 낙하산으로 수놓아졌다.
"제리들이다!"
"대공사격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낙하산들을 본 지상의 영국군 병사들은 서둘러 대공사격을 시작했다.
루이스 경기관총부터, 보포스 대공포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화포가 미친 듯이 불을 뿜었다.
지상으로부터 날아오는 총탄에도 라머스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다만, 다른 병사들이 적들의 대공포화에 희생되는 것이 우려스러울 뿐이었다. 대공포화에 맞아 추락하는 병사들이 많을수록, 임무 수행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한 병사의 낙하산에 구멍이 연달아 생기더니, 낙하산이 쪼그라들면서 지상으로 추락해버렸다.
빌어먹을. 용맹한 전사가 싸우지도 못하고 헛된 죽음을 맞이했다.
라머스는 그게 가장 슬펐다.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헛되이 죽는 것이.
쾅 소리가 나더니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Ju52 한 대가 불꽃을 토하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좌측 날개가 반토막 난 걸로 보아 대공포에 맞은 것이 분명했다.
"젠장, 빨리! 빨리!"
다급한 마음에 라머스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그는 충분히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지만, 이걸로 부족했다.
조금 더, 더 빨리! 1초라도 더 빨리 지상에 닿아야 한단 말이다!
그 순간, 라머스의 낙하산에 구멍이 뚫렸다.
"어? 어어?!"
낙하산에 구멍이 뚫리기 무섭게 낙하하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풍압이 거세 눈조차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잠깐만. 이렇게 빨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렇게 멀어만 보이던 지상은 기겁할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티끌만 한 크기의 건물들이 동전 크기로 변하더니, 몇 초 뒤엔 주먹만 한 크기가 되었다.
이젠 끝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와지끈 소리가 나며 그는 지상에 추락했다.
***
공수부대가 카이로에 낙하하는 동안, 추축군 지상부대는 카이로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의 강력한 주장대로, 이번 공격의 선봉에는 이탈리아군이 섰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그라치아니는 병사들을 불러놓은 뒤 연설을 했다.
"제군들, 이제 곧 카이로다. 옛 로마 제국의 도시가 다시 로마의 품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제군들의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적들은 만만치 않은 상대지만, 놈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세상은 새 지배자를 원하고, 우리의 조국은 그 새로운 지배자로 영원히 군림할 것이다. 잊지 마라. 우리는 지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신(新) 로마 제국의 위대한 역사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이보다 더 이탈리아인의 로망을 자극하는 말이 있을까.
로마 제국을 건설한 조상들이 걸어갔던 길을, 자신들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이탈리아군의 저돌적으로 만들었다.
"우리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간다!"
"우리가 신(新) 로마 제국의 병사들이다!"
"오늘 저녁은 카이로에서 먹자!"
하지만, 모든 병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이고 나발이고 전쟁만 빨리 끝났으면 소원이 없겠어. 그래야 빨리 미국에 갈 수 있지."
머릿속에 오직 미국행밖에 없는 카를로에겐, '옛 로마 제국의 재건'과 같은 거창한 목표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자신들의 삶이 나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경험해서였다.
이탈리아는 1차대전에 참전해 승전국이 되었지만, 돌아온 것이라곤 코딱지만 한 영토와 수십만 명이 넘는 사상자들이 아니었던가.
카를로의 아버지도 전쟁이 끝나면 삶이 더 윤택해지리란 희망을 품고서 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삶이 윤택해지기는커녕 되려 어려워지기만 했다.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이 심해져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렇잖아도 위태로웠던 가계가 순식간에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카를로는 승전이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동감이야. 전쟁이 나쁜 이유는, 전쟁터에 있는 동안에는 여자들이랑 부대끼며 놀 수가 없거든."
알베르토가 씩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카를로는 질리지도 않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도 참 징하다, 진짜. 그래서 결혼은 하겠냐?"
"그럼, 당연히 하지! 나처럼 멋진 남자를 마다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참고로 난 돈 많고 예쁜 여자하고만 결혼할 거야. 이 정도 외모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 않아?"
"전혀. 잠깐만, 전에 만났던 옆집 누님이랑은?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어?"
카를로의 질문에 알베르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누나도 미인이긴 하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해서 말이지. 여친감으론 합격이지만, 신붓감으로는 불합격이다, 이 말씀이야."
"이야, 이거 완전 인간쓰레기구만? 사탄도 널 보면 혀를 찰 거다, 아마."
전우가 보여준 놀라운 인성에 카를로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때, 그들이 속한 대대는 영국군의 방어선에 당도했다.
이탈리아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영국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총탄을 퍼부으며 그들을 환영했다.
"다 왔다! 내려!"
소대장의 외침에 따라 그들은 일제히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선두의 전차들은 이미 영국군과 교전 중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M11/39 전차 2대가 나란히 불길에 휩싸였다. 적 대전차포에 당한 것이었다.
연기에 휩싸인 전차에서 전차병들이 탈출을 시도하다 기관총에 맞아 즉사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의 공격 의지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권총을 빼든 장교들이 연신 돌격을 외쳐대는 가운데, 병사들이 착검한 소총을 들고 적 진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영국군의 기관총 총구에서 불꽃이 튈 때마다 이탈리아군 2, 3명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목숨이 끊어진 병사들이 땅에 쓰러질 때 나는 소리는 감자포대가 쓰러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공격, 공격!"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앞을 가릴 지경이 되어도 장교들은 오직 공격만을 외쳐댔다.
M11/39 전차가 전사자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전진하다가 2파운더를 맞고 우뚝 멈춰 섰다. 해치 틈 사이로 연기가 뿜어졌다.
"쏘가리 새끼, 머리가 돈 거 아냐? 이 상황에서 공격이 가능하겠냐?"
시체들 뒤에서 숨을 고르던 카를로는 주구장창 공격만 외치는 소대장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군복은 죽은 전우들의 피와 모래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더러운 것이라면 질색을 하던 카를로였지만, 이제는 군복이 피로 얼룩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서 날아오는 총알부터 피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벌써 100명은 죽었을 거야. 이것 좀 보라고."
카를로 옆에 웅크리고 있던 알베르토가 말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싸늘하게 식어가는 이탈리아 병사들의 시체뿐이었다.
지금이 밤이었기에 망정이지, 낮이었다면 시체 썩는 고랑내로 숨조차 쉬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숫자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계속되는 이탈리아군의 공격에 영국군도 슬슬 한계에 봉착했다.
총알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군의 공격이 뜸해지자 이탈리아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나가자! 모두 튀어 나가!"
장교들이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아대며 독려하자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돌격했다.
시체 뒤에 숨어서 간을 보던 카를로는 그만 소대장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소대장은 카를로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카를로, 뭐 하고 있냐! 너도 튀어 나가!"
'젠장, 젠장, 젠장!'
카를로는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돌격했다.
어느새 알베르토도 일어서서 카를로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총알 날아다니는 소리가 귀에 웅웅거렸다.
가장 먼저 돌격한 병사들이 참호로 뛰어들어 총검으로 영국군의 가슴팍을 찔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곧 참호는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의 백병전이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카를로는 저 생지옥의 한복판에 뛰어들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대신 그는 참호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워 기관총을 거치했다.
"2시 방향에 영국 놈들이다!"
한 무리의 영국군이 아군을 돕기 위해 참호로 뛰어오고 있었다.
카를로는 그들을 향해 총구를 돌린 뒤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튀어 나가며 영국군을 고꾸라뜨렸다.
탄창 안의 총알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즈음, 참호는 이탈리아군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전진을 재개했다.
카이로까지 가기 위해선 쉴 틈이 없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카이로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 이 자식들아!"
카를로에겐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낼 틈조차 없었다.
동료들을 따라 달리면서도 그는 저녁을 먹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