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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1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7화

47화 사막의 여우들 (6)

 

 

튀니지에서 아군이 대패하고 빤스런을 쳤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나는 오랑에 있었다.

 

오랑에 정박한 병원선 '마리아나' 호에 입원하게 된 나는 뜻밖에도 1인실을 배정받았다.

 

일개 중위 따위에게 무슨 1인실인가 싶었지만, 말 그대로 딱 '1인실'이었다.

 

홍콩의 빈민가에 흔히 볼 수 있는 쪽방이나 다름없는 넓이로, 침대 하나가 공간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전장의 비좁고 냄새나는 야전 텐트에 비하면 호텔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이 방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만큼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바로 옆에 있어서 급하면 바로 튀어갈 수도 있었다.

물론 환자용 변기가 따로 있긴 하지만, 진짜 엔간해선 쓰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겠지.......

 

좋은 환경에 좋은 대우, 좋은 식사까지 더해지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덕분에 내 몸 상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설사도 줄어들고,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된 나는 병원선 옥상으로 향했다.

 

간만에 바깥 풍경 구경도 하고, 산책-그래봤자 병원선 내부지만-도 좀 하고 싶어서였다.

 

옥상은 비교적 한산했다.

 

공군 소속 병사 셋이 테이블에 모여 카드를 치고 있었고, 뚱뚱한 간호사가 담배를 피우며 수첩에다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 옆에는 콧수염을 기른 상사가 커피를 앞에 두고 조는 중이었다.

 

날씨 한번 끝내주네.

 

난간을 붙잡은 나는 말없이 오랑 시내를 바라보았다.

 

유럽풍의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길모퉁이마다 배치된 장갑차와 병사들만 없었다면 전시라는 사실을 깜빡 잊을 정도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아무튼 조용히 경치나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아서 그레이 중위님?"

 

이름이 불리자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목에 큼지막한 카메라를 건 여자가 환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서 그레이 중위님 맞으시죠? 맞네!"

"저어 뉘신지......?"

 

여자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었다.

 

갑작스런 눈뽕에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그보다는 의문이 더 컸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야?

 

"누구세요? 누구시길래 갑자기 사진을......."

"맞다, 내 정신 좀 봐. 저는 <데일리 메일>에서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는 레이첼 로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편하게 레이첼이라고 불러주세요."

 

여자는 형식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건넸다.

아무튼 여자가 건네는 손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내 이름을 말했다. 상대도 이미 알고 있지만.

 

"아서 그레이 중위라고 합니다...... 레이첼 양."

 

나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응시했다.

 

양쪽 뺨에 주근깨가 많고, 머리칼은 갈색빛이 도는 검은색이었다.

 

나이는... 서른 정도 되려나?

서양인들의 발육은 동양인들과 달라서 겉만 봐선 정확한 나이를 유추하기 어렵다니까.

 

"뒷모습 보고 혹시? 했는데,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요. 신문이랑 뉴스영화에 나온 사람을 실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오늘따라 운이 좋네요. 요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사진을 찍지 못해 속이 영 불편했거든요. 아무튼 뭐 찍을 만한 게 없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 보이는 거 있죠. 바로 당신이 딱! 하고 나타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대뜸 사진부터 찍을 때부터 대충 눈치챘는데, 말이 정말 많은 여자다.

이 정도면 입에 모터가 아니라 제트엔진을 단 수준이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나를 아는가 싶었는데 신문과 뉴스영화에서 봐서 그런 것이었다니.

뭔가 쑥스러웠다.

 

"영광입니다, 레이첼 양. 저는 밖에서 누가 절 알아보리라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겸손은. 물론, 엄청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총리와 함께 찍은 사진 덕분에 아는 사람이 제법 생겼죠. 저처럼 말이에요. 게다가 뉴스영화에도 나오셨잖아요? 이쯤 되면 본인이 유명 인사라는 자각이 슬슬 생길 법도 한데, 중위님은 그렇지 않으신가 봐요?"

"뭐... 아직은 그렇죠?"

 

아니, 21세기에도 대통령이랑 사진 한 번 찍거나 뉴스에 나왔다고 일약 스타가 된다거나 그러진 않는다고.

 

"보아하니 한가하신 것 같은데, 제 부탁 좀 들어주실 수 있나요?"

"무슨 부탁인가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포즈만 취해주시면 돼요. 아, 신문에 실린 사진이니까 조금은 신경 써주시고요."

"......."

 

***

 

"좋습니다, 마지막이에요!"

 

펑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지고, 레이첼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내렸다.

 

"이제 됐나요?"

"네, 덕분에 좋은 사진을 잔뜩 찍었어요. 고맙습니다, 중위님."

 

그녀는 진심으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어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 정도 사진이면 1면은 아니더라도 2면이나 3면 정도에는 충분히 실릴 수 있다나?

 

"안 그래도 요즘 편집장한테서 조금 더 그럴듯한 사진을 찍어올 수는 없냐고 한 소리 듣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중위님 사진을 보여주면, 그 편집장도 찍소리도 못하겠죠. 안 그렇나요?"

"제 사진이 그렇게까지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또, 또. 겸손한 척하시기는. 사진도 찍게 해주셨으니, 보답으로 차 한잔하지 않으실래요? 제가 살게요."

 

그녀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서 매점으로 걸어갔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앞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레몬티가 놓여 있었다.

 

"홍차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레몬티밖에 없데요. 혹시... 레몬티 싫어하시는 건 아니죠?"

"아, 설마요. 저도 레몬티 좋아합니다."

 

병원선의 매점에서 파는 레몬티는 생각보다 훨씬 뜨겁고, 훨씬 달았다. 어느 정도냐면, 거의 설탕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

레몬티인데, 레몬향만 나고 맛은 찐~하게 탄 꿀물 수준이었다.

 

그런데 레이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잘만 마셨다.

단 거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시대의 레몬티가 죄다 이런 맛이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중위님? 실례가 안 된다면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하시죠."

"중위님은 어쩌다가 이곳에 온 건가요? 겉만 보면 참 멀쩡한데."

"아, 저, 그게......."

 

레이첼의 질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생각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에게 식중독으로 입원했다고 하기엔 살짝 쪽팔린다.

뭐라고 말하면 좋지?

 

"......전투 중에 가스를 마셔서 그래요. 음, 그게 생각보다 많이 마셨거든요. 그리고 다리에 파편이 박히기도 했었고. 전방에선 치료가 힘들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죠."

"저런. 고생이 많으셨네요."

 

레이첼에겐 내가 둘러댄 말이 통한 모양이다.

 

다리에 파편을 맞은 것은 사실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주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그러면 레이첼 양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된 건가요?"

"저요? 그야 간단하죠. 전방으로 가서 신문에 실릴 사진을 찍어올 사람이 필요한데, 거기에 지원했거든요. 이번 일만 잘 풀리면 계약직에서 벗어나 진짜 정직원이 될 수도 있으니, 놓칠 수가 없죠."

"계약직이라고요?"

"제가 말 안 했나요? <데일리 메일>에서 일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2년 계약직이거든요. 그나마 이것도 친척 빽으로 겨우 들어간 거라서,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하고, 더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하면 2년 뒤에 다시 실업자 신세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말아야죠. 안 그런가요?"

"정열이 넘치시는군요."

 

이 사람, 보기와는 다르게 엄청 노력파였군.

 

"오랑에는 혼자 오셨나요?"

"아뇨. 동료들이랑 함께 왔어요. 그런데 이곳에 온 첫날에 물을 잘못 마셔서 단체로 급성 장염에 걸렸지 뭐예요. 그렇게 내가 밖에서 물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일러뒀는데도 허 참.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죠."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는 동안, 나는 식어서 먹기 좋은 온도가 된 레몬티를 마셨다.

 

마시기는 한결 편해졌지만, 단맛은 더욱 강해져서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대체 뭘 넣어야 이 정도의 단맛을 낼 수 있는 걸까.

 

"너무 내 얘기만 떠들었던 것 같네요. 지루하죠?"

"앗, 아뇨. 충분히 재밌었습니다."

 

지루한 게 아니라 말이 하도 많아서 무슨 얘기인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그녀는 웃으며 자기 몫의 레몬티를 입으로 가져갔다.

 

"중위님은 언제까지 이곳에 계시나요?"

"음, 몸이 다 나을 때까지겠죠?"

"몸이 다 나으시면 다시 전방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렇죠.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요."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죄송하지만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손목시계를 본 레이첼은 뭔가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레몬티를 단숨에 들이키곤 빈 컵만 내려놓았다.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럼, 다음에 만나도록 하죠!"

"예? 아, 예......."

 

내가 뭐라고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는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새 혼자가 된 나는 한동안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레이첼 로튼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참 희한한 사람이야.

 

천둥 번개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말도 많고, 직업정신이지는 몰라도 대뜸 사진부터 찍어대는 걸 보면 그다지 좋은 생각은 들지 않으면서도,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일상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줘서 나름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

 

한 마디로 뭐라고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만난다는 거지?

 

***

 

"축하드립니다, 각하!"

"하하, 다들 고맙네."

 

참모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롬멜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

 

히틀러는 롬멜에게 중장 진급과 함께 아프리카 군단이 필요로 하는 탄약과 기름, 식량 등의 보급품과 이제 막 개발을 마치고 배치가 시작된 신형 무기들을 선물했다.

롬멜이 그토록 원하던 것들이었다.

 

"오, 이게 그 신형 3호 전차로구만."

 

롬멜은 50mm 60구경장 주포가 장착된 3호 전차를 보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그가 지휘하는 3호 전차들은 모두 짧고 뭉툭한 37mm 전차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관통력은 물론이고, 유탄의 화력조차 수류탄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구경이 더 크고, 포신도 긴 이 50mm 60구경장 주포는 한눈에 봐도 앞의 37mm 포 따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해 보였다.

 

아주 만족스러워. 이게 바로 '진짜 전차'지.

 

전차의 수량이 모자라, 무장이 기관총 두 정뿐인 1호 전차-전차병들은 이 전차를 '크루프 스포츠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물론, 아마포로 만든 가짜 전차까지 동원해야 했던 롬멜은 총통의 선물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총통이 있는 베를린 방향으로 군모를 벗고 경례라도 올리고 싶었다.

 

"이놈들만 있으면 영국 놈들의 전차를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각하. 더 이상 88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을 겁니다."

 

기존의 3호 전차와 4호 전차로는 장갑이 두터운 마틸다나 발렌타인 같은 전차들을 격파할 수단이 없었다.

기껏해야 궤도를 끊어놓는 게 전부랄까.

 

이 때문에 적 전차들이 공격해오면 88mm 대공포가 나서서 적 전차들과 교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88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어졌다.

 

전차들과 함께 도착한 전차병들의 말에 따르면 이 50mm 장포신은 기존 교전 거리에서도 마틸다의 전면장갑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멋진 전차란 말인가!

 

"이렇게나 멋진 선물들을 받았으니, 더욱 열심히 싸워 총통의 은혜에 보답해야겠군. 그렇지 않은가, 제군들?"

"맞습니다!"

 

부하들의 우렁찬 대답에 롬멜은 만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 바로 출발이다. 수에즈 운하에 도달할 때까지 휴식은 없는 줄 알도록."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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