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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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3화
43화 사막의 여우들 (2)
-달려라, 달려! 저 지평선 너머까지 더, 더, 더!
-오늘 저녁은 카이로에서 피라미드를 보며 먹는다!
-총통께서 보고 계신다! 엔진이 터질 때까지 달려!
무전기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전진과 전진, 그리고 전진이었다.
거기다 양념으로 판처리트(Panzerlied) 한 큰 술, 릴리 마를렌(Lili Marleen) 두 큰 술.
폭풍이 불어도, 눈이 불어도,
태양이 우릴 향해 웃어도,
불에 타듯 뜨거운 한낮에도, 서릿발 서는 시린 밤에도,
먼지 투성이 얼굴을 하고도,
우리들은 행복하다네. 그래, 행복하다네.
우리의 전차는 폭풍 속에서 돌진한다!
가로등은 알고 있다네,
당신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저녁마다 가로등은 켜지지만
그녀는 나를 잊은 지 오래.
그리고 나에게 고통이 생긴다면
누가 가로등 곁에 서 있을 것인가,
그대 릴리 마를렌과 함께
그대 릴리 마를렌과 함께
최고의 조합이다.
군인들 사기 올리는데 유행가보다 더 탁월한 것도 없다.
이어지는 승전보와 적군의 퇴각 소식은 독일 병사들을 광분시켰다.
그들은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동시에 롬멜은 영국군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
평범한 사륜구동 차량인 퀴벨바겐에 아마포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더미를 씌워, 멀리서 보면 전차로 보이게끔 위장했다.
전차의 주포처럼 보이게끔 더미에다 나무 막대기나 쇠 파이프를 달아놓은 건 덤이다.
독일 병사들은 롬멜이 고안한 이 '전차 호소인'을 '롬멜의 전차', '달리는 피라미드'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맙소사, 무슨 전차가 저렇게 많아?"
"제리 새끼들, 이집트에 몰빵한 게 틀림없어!"
퇴각에 퇴각을 거듭한 탓에 사기가 바닥을 뚫고 멘틀까지 추락한 영국군은 롬멜이 만든 가짜 전차를 진짜 전차라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만 제대로 확인하면 바로 모조품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겠지만, 도망치기 바쁜 그들에겐 진격해오는 적들의 전차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여유는 없었다.
그대로 속은 영국군은 뒤도 안 돌아보고 지레 겁을 먹으며 후퇴를 반복했다.
"토미들이 도망친다! 쫓아라!"
"저 병신 새끼들, 이걸 속냐."
하지만 영국군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엘 알라메인을 지나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무지성으로 돌격하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영국군은 있는 전력을 쥐어짜 방어선을 형성했다.
움직일 수 있고, 총을 쏠 수 있는 이라면 모두 방어선을 형성하는 참호에 배치되어 독일군을 상대로 싸웠다.
"싸워라! 여기가 뚫리면, 알렉산드리아는 제리 놈들에게 넘어간다!"
"알렉산드리아가 뚫리면, 그다음은 카이로가 될 테고, 카이로가 뚫리면 수에즈 운하가 놈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피라미드 앞에서 캠프파이어 하는 걸 보고 싶은 생각이 1도 없는 영국군 지휘부는 알렉산드리아 사수에 모든 판돈을 쏟아부었다.
부상병을 제외한 전 병력이 투입되었고, 기름이 다 떨어진 전차는 땅에 포탑만 남기고 파묻어서 고정포대로 사용되었다.
현지에 징병한 이집트 현지인들도 방어선 구축에 동원되었지만, 정작 그들은 이 싸움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애초에 영국군은 이집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에즈 운하를 위해서 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
"야야, 압델! 적당히 파. 좀 쉬엄쉬엄하면서 파라고."
사이드 마흐샤르는 친구인 압델에게 손짓하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묵묵히 삽질을 하고 있던 압델 사시는 그런 사이드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아니, 곧 독일군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느긋해도 되는 거야?"
사이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모자란 녀석 같으니라고. 그럼, 너처럼 열심히 일한다고 저 영국 놈들이 우릴 좋게 봐줄 것 같냐?"
"그건 아니지만......."
사이드의 지적에 압델은 말꼬리를 흐렸다.
"애초에 우리가 원해서 이곳에 왔냐?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강제로 우릴 트럭에 태워서 이곳까지 데려온 거잖아. 그런데 뭐 좋다고 저놈들을 위해서 열심히 삽질을 해야 해?"
"그래도 나중에 돈 준다고 했잖아."
"넌 그 말을 믿냐?"
사이드는 어처구니가 없는 친구의 말에 성을 냈다.
"애초에 돈 줄 놈들이었으면 우릴 강제로 트럭에 태우지도 않았겠지! 저 영국 놈들은 원래 속이 시커먼 놈들이라 공짜로 사람을 마구 부려 먹곤 나 몰라라 하는 게 주특기라고! 저런 돼지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쓸데없는 짓이야!"
"옳소! 말 잘한다!"
"맞아!"
사이드의 말을 들은 주변의 이집트인들도 삽질을 멈추고 일어서서 그의 말에 동조했다.
"3일 동안만 일하면 돈 준다고 하길래 따라왔는데, 벌써 닷새가 지났어. 그런데 저놈들은 돈은커녕 우릴 보내줄 생각도 안 해!"
"어, 당신도?"
"나는 친척 만나러 시장에 가는 길인데 저 영국 놈들한테 납치당했어."
"오늘 아버지 생신인데...... 이게 뭐 하는 거야, 대체?!"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현장을 감독하던 영국군 중위가 뛰어와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냐고 아랍어로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분노 게이지가 MAX를 찍기 일보 직전인 이집트인들에겐 중위의 호통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사람들을 강제로 납치해서 마구 부려 먹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야?"
"약속한 돈이나 줘!"
"집에 보내줘! 이 사기꾼 새끼들아!"
예상치 못한 이집트인들의 격렬한 항의에 아직 경험이 적은 중위는 당황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야유하는 이집트인들을 단속하는 것보다, 상관에게 말해 병사들을 데려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곤 등을 돌렸다.
하지만 중위가 등을 돌리자 이집트인들은 더욱 흥분했다.
"어, 저 새끼 도망친다!"
"야 이 사기꾼 새끼야! 어디 가!"
도망쳤던 영국군 중위는 잠시 후 보병 1개 소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손에 빨간 확성기를 든 중위가 이집트인들에게 명령했다.
"소란을 멈추고 삽질을 계속해라.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하지만 중위의 협박도, 이미 분노로 가득 찬 이집트인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사방에서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X까, 이 애미 뒤진 새끼야!"
"다 필요 없으니 집에 보내달라고!"
"니 엄마를 우리가 따먹어버리기 전에!"
"이, 이 새끼들이......!"
이집트인들의 조롱과 욕설을 들은 중위는 발끈하여 확성기를 던져버리고 권총을 뽑았다.
하지만 중위의 손에 들린 권총을 보고서도 이집트인들의 항의는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집단으로 번진 불만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려버릴 정도로 폭발한 상태였다.
"쏴 봐! 이 돼지새끼들아!"
"우리가 그런다고 겁먹을 줄 알았냐?"
아랍어를 모르는 일개 병사들조차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소란이 커지자, 다른 구역에서 작업 중이던 이집트인들도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작업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 제각기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돈은 대체 언제 주는 거야? 지금 딸린 입이 몇 개인데......."
"형씨도 강제로 끌려오셨수?"
"애초에 난 장사꾼이지, 잡부가 아니라고."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영국군 중령이 이집트인 통역장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같은 나라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사태가 조금 진정되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서였다.
"그만, 그만! 당신들의 불만을 잘 알겠소이다. 그러니 잠시 진정하고 침착하게 대화를 나눕시다!"
영국군의 군복을 입은 이집트인 통역장교가 나서서 중재를 시도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입 닥쳐, 매국노 새끼야!"
"영국 놈들의 밑이나 닦아주는 놈이 무슨 말이 많아!"
영국군 중령의 생각과 달리, 강제로 끌려와 며칠 동안 삽질만 하던 이집트인 노동자들의 눈에 비친 통역장교는 그저 압제자의 옷을 입은 매국노로 보일 뿐이었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의 욕설과 항의를 받은 통역장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릴 집에 보내줘!"
"돈은 언제 주는 거야?"
"우린 노예가 아니다! 우린 이집트인이란 말이다!"
"영국의 돼지들은 당장 꺼져라!"
체불된 임금과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모집, 즉 사실상의 납치에 대한 항의는 어느새 압제자 영국에 대한 성토와 비판으로 변했다.
당황한 영국군은 도저히 대화가 불가능하다 판단하곤 강제진압을 시도했다.
먼저 영국군 병사들이 허공을 향해 소총을 쏘았다(공포탄이 없어서 모두 실탄이었다).
총성을 들은 이집트인들은 잠시 움찔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한순간이었다. 그들은 다시 분노에 찬 항의와 욕설을 이어나가며 영국군에 맞섰다.
"영국은 물러가라!"
"신을 믿지 않는 이단자들은 당장 이 땅에서 꺼져라!"
"이집트는 우리 이집트인들의 것이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쉬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모래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경멸의 눈초리로 이집트인들을 바라보던 영국군 중위는 주변의 병사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자리엔 커다란 구덩이와 핏자국만 남았다.
"포, 포격이다!"
"엎드려!"
영국군과 이집트인들 사이의 대립을 중단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군의 포격이었다.
포격이 시작되자 양측은 싸움을 멈추고 즉시 참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생존의 위험 앞에서는 광기처럼 퍼졌던 불만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 후로 포격은 1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영국군과 이집트인 모두의 머리 위로 평등하게.
***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구만."
쌍안경으로 적진을 관측하던 롬멜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관 루크에게 쌍안경을 넘겼다.
"공격 개시합니까?"
"그래."
롬멜의 신호가 떨어지자 대기하던 전차와 장갑차들은 지체없이 돌격을 감행했다.
"공격 개시!"
"전차, 전진!"
기갑차량들이 먼저 돌격하고, 보병들이 뒤를 따랐다.
보병들 일부는 하노마크 장갑차에 탑승하여 전차들을 뒤따랐지만, 장갑차의 수량이 부족한 관계로 대다수 보병이 두 다리로 뛰어서 이동했다.
"저 친구들 좀 보게나. 가만히 서 있어도 힘든데, 저렇게 열심히 달리다니. 아주 만족스러워."
롬멜은 돌격하는 보병들의 모습을 보고 감격한 듯 말을 이어갔다.
"우리만 이렇게 편하게 차에 타고 있으니 미안해지는군. 우리도 같이 뛸까?"
"예?"
원래대로라면 '잘 못 들었습니다?'가 튀어나와야 정상이겠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롬멜의 대답에 루크는 자신도 모르게 '예?'를 내뱉고 말았다.
부관의 놀란 얼굴을 본 롬멜은 씩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일세. 농담 한 번 한 것 가지고 그렇게 정색하진 말게나."
"아,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이제 우리도 출발하자고."
"예, 각하!"
롬멜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운전병은 즉시 가속 페달을 밟았다.
롬멜을 태운 하노마크는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대열의 모래폭풍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