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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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1화
41화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9)
"우웃!"
묵직한 진동이 느껴지면서 전차가 흔들거렸다.
다행히 적의 포탄은 장갑을 뚫지 못하고 도탄 되었지만, 갑작스런 충격에 다들 당황했다.
"침착해. 전차는 멀쩡하다. 토마스, 재장전!"
"알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잭슨은 느릿느릿 다가오는 샤르 B1 bis의 정면을 조준했다.
조금 전 우릴 향해서 포를 쏜 놈이다.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장전 완료!"
"조준 완료!"
"발사!"
잭슨은 정확하게 적의 전면장갑을 타격했지만, 포탄은 힘없이 위로 미끄러졌다.
"빌어먹을, 튕겼습니다!"
젠장. 혹시나 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샤르 B1 bis의 전면장갑은 60mm, 그것도 경사가 진 형태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방호력은 수직장갑 80mm에 달한다.
100m에서 68mm를 관통하는 2파운더로는 녀석을 정면에서 관통하는 게 불가능했다.
놈을 격파하기 위해선 측면이나 후면을 노려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눈앞의 샤르 B1 bis가 한 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좌측에 적 중전차 출현!
-X발, 우측에도 나타났다!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샤르 B1 bis의 숫자는 총 5대.
전차 숫자는 아군이 훨씬 많지만, 전차 자체의 위력으로 따지면 사실상 대등한 싸움이었다.
-여기는 뻐꾸기, 각 소대는 좌우로 산개하여 적의 측면을 공략한다!
"수신 완료!"
무어 대위의 지시에 따라, 나는 휘하 전차들을 이끌고 우측으로 향했다.
근데 놈들도 우리의 의도를 간파했는지 차체를 돌리기 시작했다. 포위하려는 우릴 막으려는 거겠지.
육중한 차체에 달린 작은 포탑의 섬광이 일었다. 이어 선풍기 4로부터 다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여기는 선풍기 4, 궤도가 끊어졌다!
적탄에 맞아 우측 궤도가 파괴된 선풍기 4는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궤도가 끊어진 상태에서 기동한 탓에 그만 차체가 옆으로 돌고 말았다. 그 결과 장갑이 얇은 측면이 그대로 적에게 노출되고 말았다.
적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체에 달린 75mm 주포를 쏘았다.
차체 측면에 75mm 포탄을 직격으로 맞은 선풍기 4는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포탑 해치가 허공으로 치솟고, 내부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하필이면 적탄에 맞은 부분이 탄약고 바로 근처다 보니, 탄약이 일제히 유폭을 일으킨 것이다.
-선풍기 4가 당했다!
"나도 알아, 제기랄!"
휘하 전차의 처참한 죽음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군 전차를 해치운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포탑을 돌려 사격을 계속했다.
놈이 쏜 포탄은 내 전차의 포탑 측면을 때렸다. 그 탓에 포탑 측면에 달린 공구 박스가 날아가 버렸지만, 전차 자체에는 이상이 없었다.
나는 매튜에게 이대로 계속 우측으로 움직일 것을 명령한 다음, 무전기를 들었다.
"선풍기 2와 3은 지금부터 좌측으로 움직여라! 나는 우측으로 움직여서 적의 시선을 끌겠다!"
-선풍기 2, 수신 완료!
-선풍기 3, 수신 완료!
나란히 움직이던 전차 3대가 갑자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기동하자, 적은 잠시 당황한 듯했다.
녀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내 쪽으로 차체를 회전시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놈이 포탄을 쏘기 전, 선풍기 2와 3이 동시에 불을 뿜어 측면에 직격타를 날렸다.
"좋았어! 바로 그거야!"
측면에 구멍 2개가 뚫린 샤르 B1은 기동을 멈췄다.
포탑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얼마 못 가 회전을 멈췄다.
포탑 후면의 해치가 열리면서 전차장이 기어 나왔다.
전차 밖으로 뛰어내린 그는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공축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다.
하지만, 우측에서 날아온 포탄에 선풍기 2가 후면을 맞고 말았다.
엔진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끊어진 무한궤도가 바닥으로 촤르륵 흘러내렸다.
이어 조종수가 해치를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포탑 쪽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매튜, 좌측으로 움직여!"
"예!"
***
"명중!"
쥘은 후면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정지한 마틸다를 보며 손뼉을 비볐다.
아직 그의 눈앞에는 2대의 마틸다가 더 남아있었다.
"클로드, 좌측으로 선회해라! 저놈부터 먼저 잡는다!"
"예!"
클로드가 좌측으로 차체를 움직이자, 쥘의 조준경에도 마틸다가 들어왔다.
적의 궤도를 조준한 뒤, 주포를 격발시켰다.
"쳇, 빗나갔군."
그러나 그가 발사한 포탄은 표적을 맞히지 못했다.
메나르로부터 받아든 새 포탄을 약실 안으로 밀어넣은 뒤, 이번에는 조준을 조금 앞으로 향한 다음 주포를 격발시켰다. 이번에는 명중이었다.
"좋아, 궤도가 끊어졌다!"
47mm 철갑탄이 마틸다의 사이드스커트를 뚫고 궤도를 망가뜨렸다.
기동성을 잃은 마틸다는 그대로 정지한 채 서둘러 포탑을 돌려 쥘의 전차를 조준했다.
하지만 마틸다의 빈약한 2파운더로는 샤르 B1 bis의 전면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클로드, 해치우게!"
"알겠습니다!"
마무리는 클로드의 75mm 야포가 맡았다.
야포탄에 측면을 관통당한 마틸다는 맹렬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이 해치를 열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차체 기관총을 맞고 벌집이 되었다.
"맛이 어떠냐, 영국 놈들아!"
불길에 휩싸인 적 전차의 잔해를 바라보며 쥘은 악마처럼 웃었다.
허나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차 후면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
"맞았습니다!"
선풍기 2, 3의 희생 덕분에 나는 적의 후면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적의 후면이 조준경에 들어오자, 잭슨은 즉시 페달을 밟았다.
포탄을 맞은 자리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엔진 탱크도 망가진 모양인지 연료가 줄줄 새기 시작했다.
놈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지만,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진 상태였다.
좋아, 이대로 마무리다.
"잭슨! 측면에 한 발 더 먹인다! 토마스, 이번에는 철갑유탄을 장전해!"
"예!"
철갑탄보다 관통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작약량은 더 많은 철갑유탄이 적을 제압하는데 더 효과적일 터였다.
토마스가 장전을 끝내자, 잭슨은 곧바로 주포를 쏘았다.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널찍한 측면에 철갑유탄을 맞은 프랑스제 중전차는 이내 맹렬한 불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탈출해라!"
전차 내부는 금방 유독가스로 가득 찼다.
쥘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해치를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어 손가락 감각만으로 해치를 열어야 했다.
겨우 해치를 열고 서둘러 전차 밖으로 기어 나왔다. 허나 그의 앞에선 화염이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불은 금방 쥘을 덮쳤다.
상체가 화염에 휩싸인 쥘은 괴성을 지르며 전차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굴러, 몸에 붙은 불을 껐다.
메나르도 해치 밖으로 빠져나오다 화염에 휩싸였다.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던 그는 그만 전차 안으로 다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대위님!"
먼저 전차에서 내린 클로드와 에밀은 쥘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투를 벗어 쥘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이 옷을 벗기도 전에, 뒤에서 총탄이 날아와 그들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3명의 전차병은 온몸에 총알구멍이 뚫린 채 알제리의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
"드디어 잡았다, 이 망할 놈들."
기관총에 벌집이 된 프랑스군 전차병들을 노려보며 잭슨이 뇌까렸다.
그들의 처참한 죽음에 잠시 동정심이 일었지만, 저들이 아군을 죽인 적들이란 사실을 떠올리니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게 전쟁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적을 죽여야 했다.
게다가 아직 전투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샤르 B1 한 대가 자신을 향해 돌격해오는 마틸다 전차들을 향해 맹렬히 포를 쏘고 있었다. 이곳에선 적의 측면이 훤히 드러났다.
"저기, 저 옆구리 드러낸 놈이다, 발사!"
"발사!"
100m도 되지 않은 근거리라서 자세히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철갑탄에 직격당한 샤르 B1은 곧 정지했고, 이어 아군 전차들에게 측면과 후면을 난타당하며 허무하게 리타이어했다.
"격파! 다음......."
새 목표를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 오른쪽 궤도에서 콰직 소리가 나면서 매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측 궤도가 파손되었습니다!"
나는 매튜의 말에 답을 하는 대신, 포탄을 쏜 적 전차를 찾았다.
내 쪽을 향해 차체를 선회하고 있는 샤르 B1의 포탑에 달린 주포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선회를 끝낸 놈은 차체에 달린 굵직한 75mm 야포로 이쪽을 정조준했다.
녀석의 포구를 보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이윽고 섬광이 뿜어져 나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강렬한 충격이 전차를 뒤흔들었다.
"......!!!"
전차가 피탄 당할 때의 충격으로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오줌처럼 뜨뜻한 액체가 뒤통수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게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라는 사실도 모른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띵한 머리에 의식이 현실에서 벗어난다.
이 모든 게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게 흐리멍텅하게 보였다.
"......! ......님!"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니, 애초에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장님! 소대장님!"
나를 다시 현실로 되돌려 놓은 것은 부하들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날카로운 외침에 나는 겨우 의식을 현실로 되돌릴 수 있었다.
"소대장님! 전차에 불이 붙었습니다!"
토마스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그 말대로, 전차는 지금 막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차 내부에 연기가 차오르자, 숨쉬기가 점차 곤란해졌다.
지독한 연기로 눈 뜨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해치를 열어젖혔다.
서둘러 해치 밖으로 나온 나는 전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런 다음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모래 알갱이들이 혀에 잔뜩 묻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공기를 마시는 게 더 중요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호흡했다.
이어서 토마스와 잭슨도 덩달아 전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적 전차가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서둘러 전차 뒤로 몸을 피해야 했다.
분명 살아남은 우리를 적 전차가 노릴 게 분명하니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직후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샤르 B1이 기관총을 쏘았지만, 조준이 엉망인 탓에 총탄은 우리의 옆으로 지나갔다.
게다가 녀석은 우리를 쫓는데 정신을 판 나머지 적이 측면으로 도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적의 측면으로 다가선 아군 전차들이 일제 사격을 가하자, 샤르 B1은 화염에 휩싸이며 정지했다.
전차 내부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내지르는 것이라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괴성이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괴물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