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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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8화
38화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6)
"소대장님! 이제 어디로 갑니까?"
"좌측으로 돌아. 그 다음 그대로 전진!"
게임 속 몬스터들처럼 이따금 좌우에서 튀어나오는 프랑스 보병들을 공축 기관총으로 정리하면서 나아가자, 축구장만큼 널찍한 공원이 나타났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였다.
저 공원 너머에 프랑스군 보급기지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가 공원을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후속 차량들이 도착할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이윽고 도착한 선풍기 2, 3, 4는 내 지시에 맞춰 좌우로 나란히 도열했다.
"소대, 전진! 다 깔아뭉개버려!"
4대의 전차들이 뒤에 보병들을 대동한 채 전진하자 프랑스군의 총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셔먼이 마틸다로, 미군이 영국군으로, 독일군이 프랑스군으로, 배경이 1945년의 독일에서 1940년의 알제리로 바뀐 것만 빼면 영화 <퓨리>의 한 장면 같았다.
참호 밖으로 고개를 내민 프랑스군들은 전차가 나란히 다가오자 발광하듯 마구 총을 쏘아댔다.
그럴수록 보병들은 죽지 않으려고 전차에 찰싹 달라붙었고.
"쓸어버려!"
공축 기관총이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민 프랑스군을 휩쓸었다.
적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틈을 타 참호에 다가가 수류탄을 까 넣었다.
여러 번의 폭음이 울리자, 그들은 참호 안으로 뛰어들어 아직 숨이 붙어있는 적들을 처리했다.
이런 방법을 반복하며 전진하는데, 정면에서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전차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엔 대전차포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대전차포가 아니었다.
궤도와 회전이 가능한 포탑이 보였다.
"주의! 정면에 적 전차!"
잔해에 가려 적 전차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목표물을 확인한 나는 토마스에게 유탄을 빼내고 철갑탄으로 재장전할 걸 지시했다.
"장전 완료!"
"조준 완료!"
"발사!"
주포에서 섬광이 뿜어지면서, 포탄이 적 전차의 포탑에 명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포탄이 튕겨 나가는 게 아닌가.
"젠장, 도탄! 토마스! 빨리 장전해!"
"예!"
이윽고 녀석도 잔해더미 사이로 기어 나와 포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녀석이 쏜 포탄도 마틸다의 장갑에 튕겨 나갔다.
적 전차의 정체는 소뮤아 S35로,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4대였다.
이윽고 나타난 나머지 3대도 아군 전차들을 향해 발포했다.
녀석들이 쏜 포탄은 모두 도탄 되었지만, 아군이 쏜 포탄도 놈들의 장갑판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애덤, 속도 늦추지 말고 그대로 전진해! 내가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알겠습니다!"
내가 녀석에게 다가가자,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속도를 올려 접근해왔다.
어느새 우리 둘의 사이는 약 200m 정도로 줄어들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발포했다.
"쏴!"
펑 소리와 함께 포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탄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찰나 적이 쏜 포탄이 전차의 전면장갑에 명중했다.
적의 포탄은 전면장갑에 기다란 탄흔을 남기고 미끄러지듯 도탄 되었다.
2파운더의 철갑탄도 적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포탄이 튕겨 나가는 걸 본 잭슨이 반사적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런 씹......!"
"젠장, 저 녀석 대체 뭐야? 쏘는 족족 다 튕겨내잖아?"
이전까지 맞았다 하면 장갑이 종이처럼 뚫리는 놈들만 상대해온 우리 입장에선 처음으로 상대하는 만만찮은 적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소뮤아 S35의 47mm 주포도 마틸다의 전면장갑을 뚫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애덤, 더 바짝 다가가!"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녀석에게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잭슨에게는 소뮤아 S35의 약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잭슨, 내 말 잘 들어라. 포탑 바로 아래, 수직에 가까운 부분 보이냐?"
"예? 아, 보입니다!"
"저기가 놈의 약점이다. 정확하게 저곳을 노려. 아니면 우리가 당할 수 있어!"
"해, 해보겠습니다!"
거리는 어느새 100m 안팎으로 좁혀졌다.
잭슨이 포탑을 돌리는 사이, 적이 발포했다.
"우왓!"
일순간 전차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포탑이 돌아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아무래도 포탑링에 맞은 모양이었다.
잭슨은 느릿느릿 돌아가는 포탑으로 간신히 적을 조준했다.
적은 기동을 멈추고, 포탑을 우릴 향해 돌리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어디에 명중할지 몰랐다.
다급해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잭슨, 조준 끝나는 대로 바로 쏴!"
"예!"
마침내 조준을 끝낸 잭슨은 발사 페달을 밟아 주포를 격발시켰다.
철갑탄은 소뮤아 S35의 차체 전면 관측창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맞았다!"
차체에 구멍이 뚫린 소뮤아 S35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정지했다.
잠시 후, 포탑 후면에 해치가 열리면서 피투성이가 된 전차장이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전차 뒤로 도망쳤다.
"좋았어, 다음!"
아직 아군 전차들은 남은 3대의 적들과 교전 중이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4:4로 동급이었지만, 이제는 4:3이다.
프랑스군은 눈앞의 상대와 싸우느라 자신들이 불리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오른쪽에서부터 차례대로 해치운다. 철갑탄 장전!"
"철갑탄 장전!"
내가 목표로 지정한 소뮤아 S35는 우리를 향해 측면을 내보인 채 싸우고 있었다.
저 앙증맞은 모습 좀 봐라.
철갑탄 한 발 맞으면 종잇장처럼 뚫리게 생겼다.
"장전 완료!"
"쏴!"
2파운더 한 방에 소뮤아 S35는 엔진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멈춰 섰다.
이윽고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오던 전차병들이 아군 보병들이 쏜 총탄에 벌집이 되어 널브러졌다.
"격파! 다음!"
-여기는 선풍기 3! 피격당했다! 탈출한다!
격파를 외치기가 무섭게 무전기에서 휘하 전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내 눈에 엔진에서 불꽃이 튀는 마틸다가 들어왔다.
차체 후면에 뚫린 구멍으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애덤, 차체 반대로 돌려! 이쪽으로 온다!"
아군 전차를 격파한 소뮤아는 곧장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황급히 차체를 돌리려는 찰나, 적이 먼저 발포했다.
간발의 차이로 녀석이 쏜 포탄은 전면장갑에 맞고 튕겨 나갔다.
만약, 내가 적을 발견하는 게 조금만 더 늦었어도 녀석의 포탄은 우리가 탄 전차의 측면을 관통했을 것이다.
죽음은 매 순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장전 완료!"
"발사!"
포탄이 적의 장갑에 맞는 순간, 수류탄보다 조금 더 큰 폭발이 일었다.
처음엔 적이 격파된 줄 알았지만, 놈은 여전히 무사했다.
"뭐야? 저 새끼 멀쩡하잖아?"
뜻밖의 광경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뒤늦게 나는 잭슨이 쏜 포탄이 철갑탄이 아니라 유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적이 멀쩡하지!
"야, 토마스! 너 이 새끼 장전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탄종을 헷갈리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토마스를 혼내는 사이, 재장전을 끝낸 적이 두 번째 포탄을 쏘았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정면에서라면 무적인 게 바로 이 마틸다인데.
적의 포탄은 이번에도 깡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장전 끝!"
따로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잭슨은 전차포에 불을 당겼다.
소뮤아의 우측 궤도에서 작은 폭발이 일자, 녀석은 발에 차인 강아지처럼 옆으로 획 돌고 말았다. 그 바람에 얇은 측면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재장전!"
"장전 완료!"
"발사!"
또 한 대의 소뮤아 S35가 침묵했다.
탈출자는 없었다.
남은 2대도 선풍기 2와 선풍기 4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격파된 전차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프랑스군 전차병들은 모두 공축 기관총의 제물이 되었다.
방해꾼들이 사라졌으니, 다시 전진해야지.
아직 전투는 한창이다.
***
늙은 노원수는 북아프리카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매일같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로코는 끝내 무너졌고, 이젠 알제리도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오랑에선 프랑스군과 영국군 사이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프랑스군은 생각 이상으로 분전하며 영국군을 애먹이는 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황이 불리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군.
차라리 베르됭에서 독일군과 대치할 때가 더 낫겠어.
페탱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책상 위의 호출 벨을 눌렀다. 그러자 곧장 중년의 보좌관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그래. 알제의 방어 준비는 어느 정도로 진척되었는지 알 수 있겠나?"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밖으로 나간 보좌관은 5분 후 몇 장의 서류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각하."
"수고했네. 그리고 히틀러에게 전한 '요청'은 어떻게 되었지? 답변이 왔는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각하."
역시 그런가.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그래도 페탱은 실망감은 감출 수 없었다.
"알겠네. 그만 돌아가게나."
보좌관은 묵례한 뒤 소리 없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페탱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겨우 병력과 장비를 모아 알제리로 보내긴 했지만, 여전히 영국군에겐 무리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더 많은 병력과 장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프랑스를 의심하는 독일은 페탱의 요청을 쉽사리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너희가 해달라는 대로 해줬다가, 통수 치고 영국군에게 붙으면 어쩔 텐데?
독일의 불신은 프랑스군이 영국군에게 붙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없진 않았다.
대다수의 프랑스군은 영국군에 맞서 싸우긴 했지만, 몇몇 부대는 싸우는 걸 포기하고 영국군에게 투항하거나, 아예 편을 바꿔 아군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독일이 의심할 수밖에.
페탱은 그럴 때마다 일부 지휘관들의 반역 행위일 뿐이라며, 일부의 사례를 가지고 전체에 적용할 수 없다고 반박했지만.
독일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방 안의 공기도 조금 탁해진 것 같았다.
창문을 열자, 찬 공기가 방 내부로 쏟아졌다.
페탱은 그대로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봤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조국의 거리를.
거리는 평범했다.
해가 저물어가자,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마다 장사하는 선술집들이 문을 열었고, 거리를 순찰하던 경찰들과 헌병들은 하품을 하거나 졸음을 떨쳐내기 위해 담배를 물었다.
전쟁 중이라는 사실만 잊으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삶이 이토록 평화로워야 하거늘.......
그가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 조금 전 나갔던 보좌관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각하! 각하!"
"무슨 일인가?"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 페탱이 묻자, 보좌관은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독일에서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페탱은 즉각 보좌관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그리곤 종이에 적힌 글들을 천천히 읽어갔다.
노원수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졌다.
"그래. 이제야 좀 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