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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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7화
37화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5)
본래 역사에서도 영국군은 오랑과 알제에 상륙을 감행했다.
작전 도중에 프랑스군의 저항이 있긴 했지만, 사전에 진행된 포섭작업으로 프랑스군 지휘관 상당수가 전향하거나 싸울 의지가 없었던 탓에 두 곳 모두 금방 제압되었다.
하지만 여기선 달랐다.
당장 미군도 없을뿐더러, 아군의 숫자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이상하리만큼 프랑스군의 저항 의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높았다.
알제는 프랑스군의 방어가 워낙 두터워 상륙은커녕 접근 자체가 힘들었다.
결국 아군은 오랑에 전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상륙에 앞서, 폭격기들과 전함들이 오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모로코에서 방심하다가 크게 피를 봐서 그런지, 이번 포격은 모로코 때보다 더 길고 집요했다.
그야말로 초장에 적을 쓸어버릴 기세로 마구 퍼부었다.
오랑 해변의 프랑스군 포대도 아군 함대를 향해 포격을 감행해 피해가 나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큰 피해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지만.
프랑스군 포대가 어느 정도 제압되었다고 판단한 아군은 곧바로 병력을 상륙시켰다. 라바트 때와 똑같았다.
상륙 전 함포 사격과 폭격, 그리고 상륙.
왠지 모를 데자뷔가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겠지. 너무나도 순서가 익숙해서 그다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단 말이야.
라바트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병사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맨몸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해변을 지나 적진까지 돌격할 것을 생각하면, 긴장을 안 하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이때만큼 내가 전차병인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만약 보병이었다면, 틀림없이 저들 한가운데에 섞여서 상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아니면 이미 라바트 해변에서 죽었거나.
"후우, 존나 떨리네."
"내가 만약 저 땅개들 중 한 명이었다면 지금쯤 심장마비로 죽었을 거야."
잭슨과 토마스가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 나는 호주머니에 꿍쳐놨던 카라멜을 꺼내 포장을 벗겼다.
이 야릇한 갈색 속살 좀 봐라. 탐스럽기 짝이 없구만.
괘씸해서 입에 넣고 씹으니 농후한 단맛이 혀를 감싸 안았다.
단것을 먹으면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잘은 모르겠고 아무튼 맛있었다.
"새끼들, 이번이 처음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얼어있냐? 긴장 풀어, 새끼들아."
"알겠습니다, 소대장님."
나 역시 긴장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번의 경험 탓에 그렇게 두렵다거나 하지는 않다.
전에는 수능을 앞둔 재수생의 심정이었다면, 지금은 롤러코스터를 탄 잼민이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라고 할까나?
보병들을 태운 상륙정들이 먼저 출발하고, 수송선이 그 뒤를 따랐다.
상륙정 도크가 열리면서 병사들이 해변으로 뛰어내렸다.
그런데 프랑스군의 사격은 없었다.
뭐지? 포격 맞고 다 뒤졌나?
적들의 격렬한 사격을 예상하던 병사들은 막상 총알이 한 발도 날아오지 않자 역으로 당황했다.
이윽고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수송선에서 내린 전차들이 사람이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해변을 횡단했다.
여전히 총알은 날아오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정말로 폭격 처맞고 다 죽은 거 아냐?"
병사들이 주저하며 오랑 시가지로 들어설 때,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적의 공격이다!"
"엎드려!"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지!"
프랑스군은 해변을 포기하고 시가지에서 영국군과 싸우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오지마에서 쿠리바야시가 이끄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전술처럼 말이다.
아, 이곳에선 아직 이오지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으니, 프랑스군이 원조겠군.
아무튼, 그것보다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잭슨! 발사해!"
"어, 어디로 쏩니까?"
"그냥 정면을 향해서 쏴! 저 개구리 새끼들 기 좀 죽여놓게!"
"알겠습니다!"
미리 장전해둔 유탄을 발사하자, 토마스가 다음 포탄을 장전했다.
나는 녀석에게 적 전차가 나타날 때까지 무조건 유탄만 장전해두라고 일러두었다. 아직까진 잘하고 있군.
적 전차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의 역할은 아군 보병의 전투 보조다.
정확하게 적 병사를 공격하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공격의 기세를 늦추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적 전차 등장에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보병을 엄호하는 가운데 나는 주변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 즐비한 유럽풍의 건물들 때문에 이곳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날씨가 더운 것만 빼면, 다시 프랑스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프랑스군은 프랑스식으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우릴 공격해왔다.
시가지에서 적들과 싸우는 일은 여간 위험하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적들에겐 없는 전차까지 우리는 모두 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전에는 철갑탄밖에 없어서 공축 기관총으로만 싸워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프랑스군의 기관총 진지로 추정되는 3층 주택의 옥상을 가리켰다.
"1시 방향에 적 기관총 진지다. 돌려!"
"예!"
조준을 마친 잭슨이 내게 보고하자, 나는 지체 없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쏴!"
쾅 소리가 나기 무섭게 옥상에서 폭발이 일었다.
옥상에서 신나게 기관총을 쏴재끼던 프랑스군 두 놈은 모래주머니들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애초에 듣고 싶지도 않았고.
"전진!"
정면에선 총알이 셀 수 없이 쏟아지고 있지만, 상관없다.
보병들한텐 효과적일지 몰라도 전차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거든.
지금부터 칼춤을 출 시간이다.
***
쩐민다우옌은 양손에 탄약통을 들고 열심히 참호 안을 내달렸다.
그렇잖아도 무더운 날씨에 무겁기 짝이 없는 탄약통을 두 개나 들고 뛰니 금방 옷이 축축해졌다. 땀으로 샤워를 하는 수준이었다.
"여기, 탄약 도착했습니다!"
"거기 내려놔!"
기관총 진지에 탄약통 배달을 완료한 뒤, 다시 진지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계단을 타고 내려갈 때, 폭음이 울리면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들었던 것과 비슷한 목소리다.
설마.......
다시 옥상으로 돌아간 그는, 조금 전까지 기관총을 쏘아대던 두 병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터진 모래주머니들 사이로 핏자국이 즐비했다.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그도 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쩐민다우옌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뒷문으로 나갔다.
사방에서 총성과 고함, 비명이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기관총 좀 잡아! 사수랑 부사수 둘 다 죽었어!"
"뒈져라, 영국 놈들아!"
"내 팔! 내 팔!"
"위생병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러다 장이 죽겠어!"
대부분 프랑스어였지만 간간이 아랍어와 베트남어도 들렸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캄보디아어와 중국어도 들을 수 있었다.
쩐민다우옌은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진지까지 달렸다.
겨우 도착한 진지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무전기에 대고 악을 쓰는 장교와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하사관, 자기 몸집보다 크고 무거운 탄약상자를 들고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병사들까지.
"행보관님, 다녀왔습니다!"
쩐민다우옌은 조금 전 자신이 배달을 다녀온 진지가 적 포탄에 날아갔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2소대로 이것들 들고 가. 총탄이 거의 다 떨어져서 돌멩이를 던져야 할 판이라는군."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총탄이 가득 든 탄약통을 들고, 목덜미엔 기관총 탄띠를 주렁주렁 매단 채 2소대를 향해 뛰어갔다.
그가 뛸 때마다 총탄으로 이루어진 목도리가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X발, X발!"
너무 힘들어서 자연스레 입에선 욕이 튀어나왔다.
내가 미친놈이지.
괜히 돈 좀 벌어보겠다고 입대했다가 남의 나라 전쟁터에 와서 이 고생이라니.
쩐민다우옌은 대다수 베트남인처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이었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사이공으로 노가다를 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지만, 정작 벌이는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실망한 쩐민다우옌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사이공을 배회하다가 프랑스군의 모병 포스터를 발견했다.
베트남어로 쓰여진 포스터에는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평범한 농부나 잡부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봉급이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사실, 프랑스인들이 받는 봉급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였지만 쩐민다우옌 같은 베트남인들에겐 큰 액수였다.
쩐민다우옌은 망설임 없이 바로 지원했고, 간단한 신체검사와 시험을 통과한 뒤 정식으로 군인이 되었다.
넓은 식민지를 유지하려면 프랑스 자국의 젊은이들로는 택도 없었기에, 프랑스는 알제리와 모로코, 베트남 등 식민지 현지인들 사이에서 모병을 했다.
그렇게 프랑스군의 군복을 입은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식민지로 삼은 프랑스를 위해 싸우게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쩐민다우옌은 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황당함이 가시기도 전에 그가 속한 부대는 알제리로 재배치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영국이 쳐들어왔지 뭔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독일군과 싸우게 될 줄 알았는데, 정작 영국군과 싸우게 되다니.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탄약입니다!"
쩐민다우옌은 서툰 프랑스어로 소리쳤다.
열심히 총을 쏘던 병사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탄약이 이제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쩐민다우옌에게 돌아온 건 감사의 말 대신 멸시와 조롱이었다.
"늦었잖아, 이 원숭이 새꺄!"
"하여간 동양인 새끼들은 느릿느릿 걷기만 하지. 침팬지보다 못한 저능아 새끼들 같으니라고."
쩐민다우옌은 그들이 자신을 흉보는 소리를 무시한 채 다시 진지로 뛰어갔다.
이런 일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나마 늦게 도착했다고(실제로는 빨리 도착한 것이지만) 발길질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진지로 돌아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던 그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쳤다.
멀쩡하던 담벼락이 무너지면서, 전차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이건 또 뭐야?!"
놀라서 눈이 주먹만 해진 그의 앞에 나타난 전차는 무심한 듯 그대로 앞으로 굴러갔다.
뒤이어 나타난 영국군 병사들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던 그를 발견하고 총을 겨누었다.
"손 들어!"
쩐민다우옌이 할 수 있는 일은 얌전히 손을 드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영국군은 그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쌍욕을 내뱉거나 침을 뱉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어깨에 멘 소총을 빼앗고 걷게 시켰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