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6화
36화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4)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다니엘 프로스트 중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어 땅이 진동하면서 귀청을 찢을 듯한 포격이 울렸다.
모래와 자잘한 돌멩이들이 참호 안으로 쏟아졌다.
다니엘은 옷 안으로 모래와 돌멩이들이 들어가자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평소 온화한 성격에 기품 있는 말투로 소대원들의 호감을 샀던 그가 욕설한 사실을 알면 소대원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폭음 때문에 그가 욕하는 걸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서 쉬이익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고 몸을 바짝 엎드렸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땅은 반으로 쪼개질 기세로 흔들거렸다.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은 멀미를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한 명이 구토하면, 참호의 전 인원이 구토했다.
매캐한 화약 연기와 시큼한 토사물 냄새가 섞여 상상을 초월하는 악취를 풍겼다.
"X발! 우리 포병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어지는 폭음 사이로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폭음과 땅울림 사이에 낀 다니엘은 지구에 최후의 날이 온다면 아마도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병사 중에선 가혹한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줄을 놔버리는 병사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괴성을 지르며,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말렸는데, 하도 몸부림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야전삽이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려서 기절시켜야만 했다.
간혹 힘 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그대로 죽어버리거나, 뇌에 영구적인 손상을 불상사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 어쩔 수 없이 전장에 그대로 버려졌다. 후송하기엔 트럭에 자리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늘 목에 차고 다니는 펜던트 속에 든 약혼자 제니의 사진을 응시했다.
사진 속의 제니는 예뻤다.
다니엘의 기억 속의 모습과 같았다.
전쟁이 끝나면 둘은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이런 황량한 사막에서 죽을 수 없지.
지옥 같았던 프랑스 전장과 됭케르크 해변에서도 살아남았지 않은가.
다니엘은 차오르는 의지를 느끼며 펜던트를 닫았다.
어느새 포격은 끝나 있었다.
"위생병! 여기야, 여기!"
포격이 끝나자, 병사들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사방에서 위생병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무기를 점검해라! 곧 파스타 놈들이 올 거다!"
다니엘은 철모에 쌓인 모래를 털어내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곤 자신의 리-엔필드 소총의 상태를 확인했다. 안에 모래가 조금 들어간 것만 빼면 총은 멀쩡했다.
"부상자는 뒤쪽으로! 걸을 수 있는 놈들은 무기를 들어!"
"위생병! 여기라니까!"
겨우 어수선한 분위기가 진정되려고 할 즈음, 이번에는 이탈리아군이 나타났다.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개 무리처럼 떼를 지어 달려오는 이탈리아군 병사들의 모습을 본 다니엘이 소리쳤다.
"왔다! 모두 준비!"
그렇잖아도 더운 날씨에 땀까지 흘리니 현기증이 올 것 같았다.
다니엘은 햇빛을 받아 뜨겁게 달궈진 철모를 벗어 던지고픈 욕망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적들의 대열을 주시했다.
아지랑이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수는 원래 수보다 더 많아 보였다.
빌어먹을. 총알보다 열사병으로 먼저 죽겠군.
다니엘은 지독하기 짝이 없는 더위와 이런 최악의 환경 속에서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니엘은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래침은 강렬한 햇볕 아래 금방 말라버렸다.
다니엘이 사격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그의 소대원 중 한 명이 긴장감을 못 이기고 그만 발포하고 말았다.
총성이 울리자, 다른 병사들도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난데없는 사격에 다니엘은 당황했다.
"누구야? 아직 사격 명령이 안 떨어졌는데!"
그의 계산대로라면 조금 더 적들을 끌어들인 다음에 사격을 가해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영국군의 사격이 시작되자,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던 이탈리아군은 바닥에 엎드렸다.
오랜 시간 동안 햇빛에 달구어진 지면에 닿자 배 속 내장이 익는 듯했지만, 날아오는 총알에 맞는 것보다 배가 천천히 익어지는 편이 나았다.
"젠장, 누군지 몰라도 나중에 가만 안 둬!"
다니엘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바닥에 엎드린 이탈리아군을 향해 사격했다.
그가 쏜 총알은 병사들을 향해 돌격을 외치던 한 장교의 어깨를 맞추었다.
어깨에 총알이 박힌 장교는 얼굴을 팍 구기면서 뒤로 쓰러졌다.
그러나 이탈리아군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쓰러진 동료들을 받침대 삼아, 기관총을 올려놓고 영국군 참호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리-엔필드 소총의 노리쇠를 젖혀 탄피를 빼내던 병사가 턱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뜨거운 모래 알갱이들 사이로 스며들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이탈리아 만세! 돌격!"
거대한 삼색기를 든 병사가 일어서서 돌격하자, 영국군의 사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이탈리아군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 모습을 본 이탈리아군 병사들도 일제히 일어서서 돌격을 감행했다.
"이탈리아 만세!"
"앞으로!"
다니엘은 깃발을 든 이탈리아군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병사가 쓰러지면서 거대한 깃발이 병사의 몸을 덮었다.
다니엘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는 다시 일어서서 뛰기 시작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뭐야 저 녀석! 불사신이라도 되는 거야?"
다니엘은 황당함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노리쇠를 당겼다.
하지만 그가 총을 쏘기 전에 다른 병사가 총을 쏘아 적군의 기수를 쓰러뜨렸다.
그 이탈리아군 병사는 이번에는 일어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루이스 경기관총이 좌에서 우로 회전하며 돌격해오는 이탈리아군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적들의 수는 여전히 많았다.
이제는 서로 얼굴에 드러난 표정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지원군이 도착했다.
바로 영국군이 자랑하는 스핏파이어였다.
"만세! 스핏파이어다!"
뜻밖에 아군의 등장에 다니엘은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총알이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여전히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스핏파이어는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아군 참호를 향해 돌격하는 이탈리아군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총탄에 맞은 이탈리아군이 무더기로 쓰러지자, 영국군 참호에서 환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하늘에 나타난 적기는 단 한 대였지만, 그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훈련대로라면 침착하게 대공사격을 가해 적기에 위협을 가했어야 했지만, 이미 단체로 패닉에 빠진 이탈리아군에게 침착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정면에선 영국군의 총알이 날아다녔다.
지상과 하늘에서 동시에 가해지는 공격에 이탈리아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끝내 사기가 떨어진 이탈리아군은 무기고 동료고 뭐고 다 내팽개친 채 처절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파스타 놈들이 도망친다!"
이탈리아군이 물러서자, 영국군은 안도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다니엘은 그제야 철모를 벗어 던지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전투 도중에 뺨에 상처가 생기긴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스핏파이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사방에 널린 이탈리아군들의 시체로 고개를 돌렸다.
날씨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시체는 벌써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곧 상상을 초월하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조금 전의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이 병사부터 장교들까지 모두가 구토하기 바빴다.
지면에 널린 썩어가는 시체들과 악취에 구토하는 병사들.
이 처참한 광경이 이곳 엘 알라메인 전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처칠은 이집트 전역의 상황을 '실'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했다.
그것도 아주 얇은 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얇은 실처럼, 이집트 전선은 연일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맹공을 받으며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오늘도 처칠은 이집트 전역에 관한 전황을 보고받았다.
이번에도 용감한 영국군은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지만, 희생이 너무 컸다. 게다가 아군의 피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탄약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칠은 해군을 총동원해 이집트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날랐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게다가 대서양을 한 바퀴 돌아 인도양으로, 인도양에서 홍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소모되는 연료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몰타를 상실한 뒤로 소모되는 연료의 양이 몰타를 상실하기 전보다 4배나 늘었다.
이러다간 연료가 먼저 바닥을 드러낼 판이었다.
지브롤터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강행 돌파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몰타를 장악한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은 그들의 눈을 피해 알렉산드리아로 은밀하게 향하던 영국 수송선단을 귀신같이 찾아내 족족 격침했다.
피해가 커지자, 결국 영국 해군은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수의 함선과 선원들이 지중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뒤였다.
초조해진 처칠은 더욱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공략에 매달렸다.
덕분에 알렉산더는 거의 매일같이 빨리 알제리로 진격할 것을 독촉하는 처칠의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하루라도 빨리, 더 멀리 전진하시오. 알제리와 튀니지를 점령해야만 이집트를 지키고, 독일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단 말이오!"
처칠은 강박증에 걸린 환자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알렉산더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처칠에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그는 늘 성과를 원했다.
보다 더 큰 성과를.
***
"에휴, 내 팔자야......."
좋은 날은 첫 신병위로휴가처럼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모로코를 떠나 전선으로 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언젠가 다시 전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모두가 무거운 한숨이 먼저 나왔다.
"좋은 날도 다 끝이구만."
"그럼 여기서 평생 빈둥거릴 줄 알았냐? 우린 지금 전쟁 중이다."
투덜거리는 병사에게 게이츠 상사가 일침을 놓았다.
괜히 나까지 뜨끔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윽고 이동할 채비를 모두 마친 대대는 놀랍게도 배에 오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배에 탄다는 말은, 이전의 전장과 다른 곳으로 간다는 뜻이었다.
전차에 탄 채로 배에 오를 때, 잭슨이 내게 물었다.
"소대장님,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갑니까?"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 소대장님도 모르십니까? 장교들은 다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야, 장교라고 뭐든지 다 아는 것은 아니거든?"
"혹시 이대로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토마스가 은근히 기대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국에선 모래 먼지 마실 일도 없고, 땡볕에 피부가 탈 일도 없으니 말이다.
모로코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중충하고 부슬비가 자주 내리는 영국 날씨를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근데 지금은 모두가 영국 날씨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우리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수송선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 동쪽으로 향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우리의 새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알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