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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5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3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5화

35화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3)

 

 

"바로 이거야, 이거."

"어떤 거 말입니까?"

"이게 사람 사는 거라고. 마음 놓고 편히 쉬는 게 말이야."

"아~ 옳으신 말씀입니다, 소대장님."

 

우리는 지금 라바트 해변에 드러누워 따스한 햇볕을 쬐는 중이다.

 

지난 전투로 인해 제법 큰 피해를 입은 탓에 우리는 후방으로 빠져 휴식과 재편성하게 되었다.

 

전차들은 모두 정비중대로 보내져 수리와 점검을 받았고, 우리는 브랜슨 중령의 자비 덕분에 아무 일과 없이 그대로 푹 쉴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만세!

 

오랜만에 맛보는 휴식은 설탕보다 달았다.

 

이곳에선 포성과 총성도 없고, 죽거나 다칠 일도 없으며, 매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

 

여전히 맛이 없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미지근한 커피에 비스킷을 불러서 먹는 것보단 훨 낫다.

 

"아프리카라면 무진장 더운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게까지 덥진 않은 것 같습니다."

 

게이츠 상사도 느긋하게 누워서 모로코의 햇살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턱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서 거의 산적이나 다름없었는데,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나니 어디 동네 아저씨처럼 보인다.

 

"그러게 말입니다. 11월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저희야 다행이죠, 뭐."

 

우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앞으로의 일들에 관한 얘기도 나누기 시작했다.

 

게이츠 상사가 조금 진지해진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소위... 아니, 중위님은 우리가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무르게 될 거라 보십니까?"

"음,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소시지와 파스타 놈들이 아프리카를 떠날 때까지겠죠?"

"그렇다면 우린 그때까지 계속 이곳에서 있겠군요?"

"뭐, 그렇겠죠?"

"하아, 이거 참 큰일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1년 이상은 이곳에서 모래 먼지를 마시면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전에 폐병이나 열사병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겠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여기가 싫다고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으니. 꾹 참고 버틸 수밖에."

"하하하, 중위님 말씀이 맞군요. 군인이면 의무를 다해야지! 암!"

 

그런데 잠시 후, 뜻밖의 불청객이 나타나는 바람에 모처럼의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애덤의 목소리였다.

 

"소대장님!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또 뭔데 그래?"

 

잠자다 도중에 깨서 그런지 괜히 짜증이 난 나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대대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바로 가보셔야 합니다!"

 

뭐, X발?

 

대대장이 날 찾는다는 말 한마디에 잠이 확 깼다. 냉수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나는 벗어두었던 상의를 걸쳐 입으면서 자리를 박차고 지휘 텐트로 뛰어갔다.

애덤 녀석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를 따라 달렸다.

 

"아니, 무슨 일로 나를 찾는데?"

"저도 모릅니다! 일단 데리고 오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서 지휘 텐트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브랜슨 중령이 환한 얼굴로 날 맞아주었다.

 

"아, 왔구만. 어서 오게."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불호령을 예상했던 나는 뜻밖의 환대에 잠시 당황했다.

 

그런데 지휘 텐트에는 나와 브랜슨 중령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대장 무어 대위도 있었는데,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대충 귀찮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무어 대위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일단 계급장을 보니 나와 같은 중위였다.

 

혹시 중대에 새로 배속된 장교인가?

근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대장님, 저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다른 게 아니라, 중요한 일이 생겨서 말이지."

"중요한 일 말입니까?"

 

브랜슨 중령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무어 대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갑습니다, 아서 그레이 중위님."

 

남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일단 악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아...... 반갑습니다."

"저는 윌리엄 호즈라고 합니다. 육군 선전부대에서 나왔지요."

 

선전부대라고? 선전부대가 여긴 또 왜?

 

"저어, 무슨 일인지 한 번 물어봐도 됩니까?"

"아차차, 제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 그레이 중위님은 모르겠지요."

"하하하... 그렇죠...?"

 

알긴 아네.

그래서 뭐 때문에 온 거요?

 

"제 임무는 바로......."

 

***

 

"......전차, 앞으로."

 

시동을 건 전차가 앞으로 굴러가자, 미리 설치해뒀던 폭약이 터지면서 모래 먼지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애덤, 멈춰. 잭슨, 2시 방향에 적 전차......."

"잠깐, 잠깐!"

 

호즈 중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갑자기 카메라를 내리고 손을 휘저어댔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예, 그게 말이죠, 대사에 너무 힘이 없어요. 조금 더 박진감 넘치게 부탁드립니다, 그레이 중위님."

"허허...... 알겠습니다......."

 

......이게 뭐야, 지금?

 

호즈 중위의 임무는 바로 우리의 전투 장면을 촬영해가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실제 전투처럼 보이는 연출된 장면'을 촬영해가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실제 전투라고 착각하게끔 현실적인 연기를 보여달라고요?"

"맞습니다, 중위님! 요즘 사람들이 보는 눈이 높아져서 어설픈 연기력으론 다 티가 나거든요. 그러니 지금이 실전이다, 생각하시고 연기해주셔야 합니다."

 

하, 이 양반 좀 보소?

본인이 마치 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네?

 

"잠깐, 여기서 회전할 수 없습니까?"

"회전이오?"

"전차가 회전하면서 모래를 쫙 뿌려주면 박진감 있어 보이고 좋을 것 같아서요!"

 

결국 시키는 대로 전차를 회전시켰다.

 

그런 다음에서야 호즈 중위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OK! 아주 좋습니다! 화면이 확 사네! 이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시죠!"

 

가뜩이나 쉬고 있다가 불려 나와서 이런 어설픈 연극을 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빡치는데, 이 자칭 감독님께선 요구사항도 많았다.

 

"보병들이 돌격할 때 뒤에서 폭발이 일어나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려면 공병대의 협조가 필요한데......."

 

결국 브랜슨 중령의 부탁으로 공병대대에서 온 인원들이 참호 뒤편에 폭약을 설치한 다음, 보병들이 돌격할 때와 맞추어 터뜨려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역시 쉬다가 갑자기 강제로 끌려온 거라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얼굴이 너무 살벌해서 마치 부모의 원수라도 쳐다보는 듯했다.

 

근데 왜 우리까지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냐.

우리도 같은 피해자인데.

 

"애덤, 멈춰! 잭슨, 2시 방향에 적 전차다!"

"예엡!"

 

잭슨은 포탑을 돌려 2시 방향에 위치한 적 전차를 조준했다.

 

"장전 끝."

"잠깐!"

 

토마스가 포탄을 밀어 넣으며 말하자, 이번에도 호즈 중위가 난입해 훼방을 놓았다.

 

"이봐,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조금 더 힘찬 목소리로 말할 수 없나?"

"......."

 

하다하다 이젠 장전하는 것까지 뭐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호즈 중위의 '부탁'에 전적으로 협조하라는 브랜슨 중령의 엄명 때문에 우린 찍소리도 못하고 그가 해달라는 대로 해줘야만 했다.

 

"자, 다시 시작!"

"......잭슨, 2시 방향에 적 전차다!"

"예엡!"

 

전차 포탑이 다시 돌아가자, 굳은 얼굴의 토마스가 약실에 포탄을 밀어 넣었다.

사전 지시대로 녀석의 목소리에는 악이 받쳐 있었다.

 

"장전 끄읕!!!"

"발사!"

 

묵직한 포성이 울리고, 아군이 노획한 르노 FT-17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폭발했다.

 

미리 전차 안에 수류탄과 폭약을 잔뜩 채워놔서 그런지, 녀석은 제 몸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섬광을 내뿜으며 대폭발했다.

 

폭발의 위력으로 포탑이 날아가고, 차체도 종이처럼 찢어졌으니 말 다 했지.

 

당연하지만, 이 역시 호즈 중위의 요청이다.

 

그냥 전차가 불타는 장면만으론 관객들을 압도할 수 없다나?

 

"그래, 난 이걸 원했어! 아주 좋아!"

 

본인이 원하는 장면을 찍게 된 호즈 중위는 연신 브라보를 외치며 발정 난 말처럼 사방을 뛰어다녔다.

그와 함께 온 카메라맨들은 이미 익숙한 듯 덤덤한 모습들이었다.

 

"완벽해! 그 누가 보더라도 이게 연출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거라고!"

 

그거야 본인 생각이고.

우리 같은 실전 경험자들은 딱 봐도 연출인 걸 바로 알아볼 수 있거든?

 

승용차만 한 경전차가 저렇게 폭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아무튼 본인이 만족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또 같은 뻘 짓을 반복할 필요는 없게 되었으니까.

 

이다음에는 프랑스군과의 전투 장면이었다.

 

아니, 전투라기보다는 항복하는 장면이라고 해야 맞겠군.

 

포로들에게서 빼앗았는지 멀쩡한 프랑스군 군복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미리 파둔 참호 안으로 들어갔다.

 

저 엑스트라들 모두 인근 보병 중대에서 데리고 온 친구들로, 이번 연극에 동원된 불쌍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진격하는 '영국군'을 향해 총을 쏘다가(물론 허공을 향해서) 얼마 못 가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며, 적의 참호에 큼지막한 유니언 잭을 게양하는 것이었고.

 

"자, 이제 몇 장면 안 남았습니다! 이대로 계속 갑시다! 시작!"

 

아주 본인 혼자만 끝까지 신났다.......

 

***

 

결국, 이틀을 꼬박 새우고서야 호즈 중위는 만족스러운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촬영에 동원되었던 우리는 죽어 나갔고.

 

하지만 호즈 중위는 고생한 병사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촬영이 끝나자마자 브랜슨 중령과 무어 대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고생 많았네, 중위."

 

호즈 중위가 떠난 뒤, 브랜슨 중령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예, 대대장님."

 

보통 때 같으면 '아닙니다'가 튀어나왔겠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브랜슨 중령이 직접 호즈 중위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란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그 고생을 하고 말았으니, 빈말로라도 별거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네 소대원들에게도 고생했다고 전하게. 이틀 동안 고생 좀 했을 테니, 특별히 오늘 밤만큼은 점호는 생략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대대장님."

"앞으로 일주일 뒤면 그가 찍어갔던 영상이 영국 전역의 영화관에서 상영될 걸세. 이제 자네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야, 하하하!"

"하하하...... 그거 참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였군.

호즈 중위와 만날 때부터 싱글벙글했던 이유가.

 

호즈 중위는 브랜슨 중령이 참호에서 병사들과 소소한 얘기를 나누거나 지시를 내리는 장면들도 함께 찍어갔는데, 덕분에 본인도 뉴스영화에 나오게 되어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본인도 덩달아 유명해지면, 추후 진급 심사에도 제법 유리해질 테니 말이다.

 

대충 의미 없는 덕담이나 듣고 지휘 텐트를 나오는데, 게이츠 상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중위님."

"아, 감사합니다, 상사. 상사도 고생 좀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저 말입니까? 하하, 저는 고생 안 했습니다. 마침 대대장님 명령으로 연대본부에 갔다 왔거든요."

 

어쩐지, 한 며칠 동안 왜 안 보이는가 했더니 이런 이유였구만?

 

내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을 봐서일까,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어쩌겠습니까? 대대장님 명령인데. 그래도 곧 있으면 전국의 영화관에서 중위님 얼굴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뭐...... 그래도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고 싶네요. 다시 이등병 시절로 돌아간 줄 알았어요. 그때도 국방TV에서 촬영 나왔다고 해서 하루 종일 뺑뺑이만 돌았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게이츠 상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중위님도 이등병 시절이 있으셨습니까?"

 

이런 X발. 나도 모르게 내 옛날 군 생활 얘기를 꺼내버리고 말았다.

 

전에도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이번에 또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전에 같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즉석에서 적당한 변명거리가 떠올랐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능청스럽게 행동했다.

 

"...아차차, 생도 시절을 잘못 말했군요. 이거 원, 이젠 말도 헛나옵니다."

"하하하, 중위님은 아직 젊으신데, 벌써부터 그러시면 안 됩니다....... 잠깐, 그런데 국방TV는 뭡니까? 처음 듣는 말입니다만."

"......신문사 이름이에요. 지금은 신문사가 망해서 사라진 듯 안 보이더군요."

"아~."

 

왠지 가면 갈수록 능청만 느는 건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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