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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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2화
72화 악의 태양 (1)
중대는 피해 보충 및 재편성을 위해 잠시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우리 중대를 제외한 다른 중대들은 피해가 별로 크지 않았던 탓에 전장에서 계속 싸울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수비적인 입장에서 방어만 하던 아군이 갑자기 공격 태세로 전환해 반격을 가해오자, 추축군은 맥을 추리지 못했다.
독일군은 그럭저럭 아군의 공세를 막아냈지만, 독일군보다 약세인 이탈리아군은 그렇지 못했다.
"모두 도망쳐! 영국군이 온다!"
"항복, 항복!"
이탈리아군 대다수가 아군이 나타나면 퇴각하거나, 항복하기 바빴다.
물론 그렇지 않고 용감하게 싸운 이탈리아군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전쟁터로 투입된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전 전선에서 패퇴를 거듭하며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무능한 독재자의 과욕과 오만이 빚어낸 대참사였다.
***
"각하, 15기갑사단의 반격이 격퇴당했습니다!"
"급보입니다! 측면을 지키던 이탈리아군이 붕괴했다고 합니다!"
"90경보병사단에서 퇴각 요청이......!"
동맹이었던 이탈리아군이 붕괴하자, 덩달아 독일군도 아군에게 포위당할 지경이 되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동맹군의 붕괴 소식과 휘하 사단장들의 퇴각 요청을 받은 롬멜은 이를 악물었다.
환장할 노릇이군.
총통께 이번 달 안으로 시나이반도를 손에 넣고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겠노라고 공언했는데.
지금은 시나이반도 장악은커녕 도로 퇴각하게 생겼다.
영국군은 이번 공세에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과 물자를 아낌없이 털어 넣는 도박을 감행했다.
이전에 수비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도박의 결과는 가히 성공적.
이어진 승전으로 자만심에 빠져있던 추축군은 영국군의 회심의 일격에 제대로 당하고 말았다.
이탈리아군은 만신창이가 됐으며, 천하의 독일군조차 늘어나는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튀니지의 아군으로부터 지원 요청까지 들어왔다.
알제리에 주둔한 영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이유였다.
눈앞의 적들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이젠 뒤통수까지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나아가기도 물러나기도 어려운 상황이군."
롬멜은 뒷짐을 지고서 한참 동안 고민했다.
계속 공격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이탈리아군이 이미 나가리 된 판에 영국군이 물러설 리가 없다.
자칫 잘못하다간 저들에게 역으로 포위될지도 모른다.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물자도 그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롬멜은 영국군의 방어가 더 단단해지기 전에 서둘러 공세를 가해 격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물자와 병력의 보충이 완료되기 전에 공세를 감행하는 바람에 군단 전체가 인원과 탄약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식량과 연료는 말할 필요가 없었고.
아무래도 이번에는 물러나야 할 듯싶었다.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리게. 수에즈 운하까지 퇴각한다고."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퇴각을 준비하는 동안, 롬멜은 군모를 벗어 시들시들해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라디오에선 영국군의 선전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 달 전부터 반쯤 재미 삼아 영국 방송을 듣고 있었다.
퇴각을 '작전상 일시적 후퇴'니, '전선 축소' 따위의 말들로 바꿔 변명하는 앵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참모들과 영국군을 비웃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서 그레이 중위는 휘하 전차들을 이끌고 이탈리아군 보급기지를 급습, 적군 수백 명을 사살하고 조반니 메세 장군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영화와도 같은 활약에 영국 전역에서 찬사가 쏟아지고 있으며.......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일개 중위한테 보급기지를 털린 것으로 모자라 장군까지 사살당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이탈리아군은 사건의 원흉인 아서 그레이란 영국군 중위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현실은 복수는커녕 줄행랑치기 바빴지만.
***
-속보, 독일군 총퇴각!
-아군이 거둔 값진 승리에 영국 전역이 환호
추축군은 수에즈 운하 너머로 퇴각했고, 아군은 시나이반도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모처럼 이뤄낸 승리에 부대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연대장이 직접 강림하여 연대의 모든 중대 중에 우리 중대가 가장 큰 전공을 세웠다고 치하했다.
더불어 포상으로 하루 간의 전투 휴무와 초콜릿, 홍차, 쿠키 같은 부식을 뿌린 것도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다른 중대 병사들이 뺑이를 치는 동안, 우리는 느긋하게 앉아 차나 마시며 뉴스를 듣는 호사를 누렸다.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위대한 시민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께 밝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의 용감한 육군은 강력한 적에 맞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 시나이반도를 사수하고 적들을 수에즈 운하 너머로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장 최악의 위기를 피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굴의,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강철과도 같은 의지와 용기가 있다면 그 어떤 고난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무난했다.
뒤에 나온 말이 문제지.
-이 기세를 몰아,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할 것입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우리는 다시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탈환할 것이며, 첫눈이 내리기 전에는 리비아 국경까지 전진할 것이며, 크리스마스이브 전까지 악의 무리를 아프리카까지 몰아내고 몰타를 탈환할 것이라고 감히 선언하는 바입니다!
......농담이겠지?
처칠 이 양반은 말은 잘하는데, 꼭 뒤에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서 문제다.
방금까지 시끌시끌하던 병사들도 문제의 발언이 나온 뒤로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지금쯤 다들 머릿속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우리가 또 선봉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전공을 많이 세워서 칭찬도 받고 포상도 받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듯이, 전공을 많이 세울수록 불려 나갈 일이 많이 생기는 법이다.
오죽하면 군대에선 너무 잘하지도, 못하지도 말고 딱 중간만 가는 것이 최고라는 말이 나왔을까.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겠죠?"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요......."
게이츠 상사도 불안한 듯 옆머리를 긁적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남들이라면 단순히 허세용으로 하는 말이라도 처칠이 하면 존나게 불안하단 말이지.
처칠의 연설이 끝난 뒤엔 바깥세상 뉴스가 나왔다.
미국의 원조물자를 실은 수송선단이 영국에 도착했다는 소식과 석유 금수 조치 해제를 위한 일본과 미국의 협상이 끝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
1931년, 만주를 침공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운 일본은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영토확장의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일본은 당장은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프랑스가 무너졌다고?"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까지 무너뜨리다니, 히틀러는 정말 보통이 아니군!"
"곧 영국도 독일에 무릎을 꿇을 것 같은데......."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독일과 동맹을 맺읍시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이 정복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 진출을 위해선 독일의 양해가 필요했다.
동시에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일본 혼자서 상대하기 어려운 영국에 대한 견제도 가능했고.
이러한 일본의 확장에 영국과 미국은 극도의 불만을 표출했다.
영국과 전쟁 중인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으니, 이제 일본은 사실상 영국의 적국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지금 당장은 추축군의 중동 진출을 막아야 했으므로 영국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주둔군까지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지키는 병력의 수는 줄어만 갔고, 이는 일본의 욕망을 더욱 부채질했다.
"버마와 말레이시아 주둔군은 합쳐서 5만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황군이 지금 당장 쳐들어간다면, 무조건 이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야욕에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
그렇잖아도 독일의 연승과 영토 확장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일본이 중국에 이어 동남아로까지 손을 뻗치려 하자, 일본을 손봐주기로 결심했다.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물자는 바로 석유.
일본은 전체 석유의 8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석유는 전차와 항공기, 전함을 움직이는 데 쓰였고, 이 전쟁 병기들은 일본군의 손발이 되어 중국 침략에 쓰였다.
하지만 석유가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무기라 할지라도 석유가 없으면 움직이질 못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전차와 항공기는 문자 그대로 고철 더미나 다름없다.
1941년 1월, 미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때려버리자 일본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미국이 석유를 안 팔겠다니?!"
"그럼 전쟁은 어떻게 하라고?!"
갑작스런-어디까지나 일본한테만-미 정부의 폭탄선언에 놀란 일본은 미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사시미로 저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양키들 배때지에 칼빵을 놔주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중국을 먼저 쓰러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은 양키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척 대충 기분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석유 금수 조치를 빠르게 해결하게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 말이다.
일본은 다음과 같은 협상안을 꺼내 들었다.
만주국의 승인 및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 묵인, 석유 금수 조치 해제와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 철회, 삼국 동맹 인정, 일본이 점령한 중국 영토, 특히 화북 지역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할 것.
일본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요구가 '최소한 기본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의 요구사항을 받아든 미국 정부의 대답은 일본의 생각과 달랐다.
"저놈들, 미친 거 아닌가? 우리가 정말로 이 요구를 들어주리라 생각한 건가?"
"이거, 칼만 안 들었지 순 날강도잖아?"
당연하지만 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동시에 중국에서의 전면적인 철수, 삼국 동맹 조약 폐기, 장제스의 충칭 정부 외 다른 정부를 승인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위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면 석유 금수 조치를 취소할 생각이 있었다.
수용 못 하면, 석유 수입은 나가리 되는 거고.
"저 빌어처먹을 양키 새끼들이 진짜!"
"놈들의 오만함이 도를 넘었습니다!"
"다 이긴 전쟁을 포기하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이러한 미국의 요구가 전해지자 일본 정부, 특히 군부는 더욱 들끓기 시작했다.
협상을 포기하고, 당장 미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주장을 더욱 큰 지지를 받았고.
태평양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