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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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7화
67화 시나이반도의 결투 (4)
나는 휘하 병사들에게 어디서 적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주변을 경계하라고 일러두었다.
지도판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숨겨진 적 진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보통 중요한 기지 근처에는 최소한 한 두 개 이상의 방어진지-대전차포 진지라던가, 하다못해 기관총 진지 같은-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 기지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그 어떤 적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에게 공격당한 이탈리아군 중대는 너무 신속하게 털린 나머지 무전으로 후방에 우리의 공격 사실조차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우리가 후방의 보급기지에 도달할 때까지 전방의 아군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직진. 조금만 더 가면 적 진지가 나타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듬성듬성 세워진 막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이 적의 보급기지였다!
"적 기지입니다!"
조준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잭슨이 흥분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행여 지도판이 잘못 표시된 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공연한 걱정이었다.
천하의 이탈리아군도 지도판 만큼은 제대로 만든 것이다.
그 결과가 대재앙이라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여기는 민들레 1! 모두 좌우로 산개해라. 동시에 치고 들어간다!"
휘하 전차들로부터 '수신 완료!'가 빗발치는 가운데 나는 쌍안경으로 적 진지를 살폈다.
별다른 이상징후는 없었다.
보급기지의 적 병력은 우리가 자기네들 코앞까지 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태연하게 움직였다.
이쯤 되면 엔진소리를 듣고 대충 눈치챌 만도 한데 말이다.
"토마스, 유탄 장전."
"알겠습니다!"
***
"모두 차렷!"
한 달 전 두체의 명령으로 그라치아니 원수를 보좌하기 위해 이집트로 보내진 조반니 메세 장군은 최전선 보급기지를 방문해 병사들과 악수를 했다.
"음, 고생이 많군.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적들과 싸우느라 아주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메세와 악수를 한 병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일부로 큰소리로 대답했다.
메세는 껄껄 웃었다.
"아니긴 무슨. 여기 있는 모두가 고생하고 있네. 나 같은 늙다리보다 훨씬. 자네들이 있기에 이탈리아가 다시 로마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거 아닌가."
조반니 메세는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로 여러 전과를 올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부관으로 임명된 바 있었다.
그는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기계화여단을 이끌고 참전, 에티오피아군을 격파하는 공적을 세웠으며, 형편없기로 유명한 이탈리아군 안에서도 몇 안 되는 명장이라 칭송받고 있었다.
전쟁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다른 이탈리아군 장군들과 달리, 직접 병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등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남자였다.
이번 방문도 위험하다는 참모들의 진언을 뿌리치고 달랑 부관과 당번병 몇 명만 데리고 온 것으로, 그의 갑작스런 방문에 병사들은 어쩔 줄 몰랐다.
"자네는? 이름이 뭐지?"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데, 얼마나 되나?"
"제노아 출신이라고? 하하, 나도 거길 가 본 적 있지. 무척 아름다운 도시더군."
병사들과 소소한 잡담을 나누던 그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음에 말을 멈추었다.
"이건 무슨 소린가? 전차 엔진음 같은데─."
"비상! 비상!"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비상 소리가 들리더니, 기지 저편에서 고함과 비명이 들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썩 좋은 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영국군이다! 모두......."
뒤이어 들린 폭음으로 누군가의 외침은 뚝 끊어졌다.
멀리서 화염이 치솟는가 싶더니, 이내 수십 배 크기의 폭발로 변해 강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강풍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메세의 군모를 가지고 날아가 버렸다.
일렬로 서서 그와 악수하던 병사들이 서둘러 무기고로 뛰어가는 동안, 부관과 당번병들이 달려와 얼이 반쯤 나가 있던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각하! 적의 기습입니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아, 알겠네."
그들이 서둘러 몸을 피하려는 순간, 장벽처럼 높게 쌓인 피복 상자들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마틸다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
"우왓!"
잭슨이 쏜 막사는 사실 막사가 아니라 탄약고였다.
유탄이 내리꽂히자마자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사방으로 강풍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나무판자 같은 잡다한 쓰레기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서둘러 포탑 안으로 몸을 피했지만, 해치를 닿지 않은 탓에 쓰레기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대신 먼지와 나무 부스러기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말았다.
지진 같은 초대형 재난 사태의 생존자들과 비슷한 몰골이 된 나를 보고 토마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총성에 녀석은 금방 웃음을 그쳤고, 나는 다시 해치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방에 적들이다! 잭슨, 기관총으로 갈겨버려!"
"예!"
휘하 전차들도 잇달아 유탄과 기관총을 퍼부어 사방에 널린 이탈리아군을 쓰러뜨렸다.
공축 기관총 샤워를 맞고 고꾸라지는 이탈리아군들을 보고 있자니 B급 액션 영화의 현장에 온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영국군이다! 튀어!!"
"살려줘!"
우리의 출현은 적들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 자체였다.
그렇잖아도 여기에 있는 병력 대부분이 비전투병과인 보급병과 행정병들.
가뜩이나 제대로 싸울 줄 모르는데 적 전차들까지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대재앙이 따로 없다.
보병들도 자리를 잡고 스텐과 브렌을 갈겨대며 이탈리아군을 토끼 사냥을 하듯 고꾸라뜨렸다.
도망치다가 뒤통수에 총알이 박혀 쓰러지는 이탈리아군의 움직임이 무척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이름도 없는 괴상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민들레 2, 3은 좌측으로, 민들레 4, 5는 우측으로 이동해서 적 병력을 박멸한다."
-알겠다!
-수신 완료!
"우린 앞으로 간다! 애덤, 밟아!"
"알겠습니다!"
지면에 찰싹 달라붙은 적들의 시체를 그대로 밟아가면서 전진하는데, 미처 보지 못했던 장애물이 시야에 잡혔다.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상자들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애덤은 이걸 비켜서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야, 방향 틀지 말고 그대로 직진해!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 죄다 못 쓰게 만들어야 해!"
"아, 옙!"
만일에 대비해 미리 해치를 닫았다.
전차가 부딪치자, 상자들의 산이 그대로 우르르 무너지면서 뒤편에 있던 한 무리의 이탈리아군이 나타났다.
우리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하나같이 놀란 얼굴들이었다.
"쏴버려!"
공축기관총이 불을 뿜자, 그들은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나자빠졌다.
쓰러진 적 중에 일반 병사들과 달리, 화려하게 치장된 군복을 입은 장교가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영관급 장교거나, 그 이상의 계급인 듯했다.
도망치는 적병을 쫓아 포탑을 돌리는데 우측에서 날 선 금속음이 들렸다.
고개를 그리로 돌리니, 우릴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며 달려오는 탱켓이 있었다.
이탈리아군이 전쟁 동안 사용했던 L3 탱켓이었다.
"2시 방향에 적 전차다. 탄종은 유탄 그대로."
기관포도 아니고 기관총 두 정만 탑재한 L3 따위로 마틸다에게 싸움을 걸어오다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어차피 저놈은 우릴 잡을 수 없으니, 나는 느긋하게 잭슨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준 끝!"
"발사!"
마틸다의 주포가 자신들을 조준하자 놈은 그제야 후진을 시도했다.
그러나 녀석이 멀리 가기도 전에 2파운더 유탄이 녀석의 전면에 명중했다.
철갑탄이 아닌 유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녀석은 완전히 전투 불능이 되었다.
"으아아아!"
승용차보다 작은 L3 내부에서 전신에 불길에 휩싸인 기갑병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바닥에 쓰러져 발버둥 치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무모한 싸움을 건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남은 L3들도 아군 전차들의 포탄을 맞고 하나둘 불덩이로 변했다.
게이츠 상사의 전차는 도주하는 적들을 향해 사격하느라 포탑을 뒤로 돌리고 있었는데, 대신 그대로 돌진해서 L3를 그대로 깔아뭉개버렸다.
전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일방적인 학살이 진행되는 가운데, 몇몇 이탈리아군은 폭탄을 들고 직접 전차에 육박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사격하느라 움직임을 멈춘 전차에 올라가 엔진 위에 수류탄 다발을 놓고는 잽싸게 도망쳤다.
-여기는 민들레 3, 피격당했다!
민들레 3인 4호차가 이 방법에 당했다.
엔진에 불길이 치솟자, 전차병들은 탈출을 위해 해치를 열어젖혔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총알 세례를 가해 탈출하는 전차병들을 사살했다.
"저 새끼들이!"
그 모습을 본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공축기관총으로 사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기관총은 불을 뿜지 않았다.
"야, 얼른 안 쏘고 뭐 해? 내 말 못 들었냐?"
"바, 발사가 안 됩니다!"
나보다 더 당황한 잭슨이 기관총의 불발 소식이 알려왔다.
아무래도 총탄이 걸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잼이 걸리다니.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민들레 3을 불덩이로 만든 적들은 잽싸게 도망쳤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그사이 또 한 대의 적 전차가 나타났다.
기종은 M11/39.
앞의 L3보다 그나마 전차답다고 할 수 있는 녀석이지만. 주포가 차체에 달리고, 기관총이 포탑에 달리는 바람에 전투력이 바닥을 치게 된 비운의 녀석이다.
주포가 포탑에 달렸다 한들 마틸다 입장에선 밥이나 다름없지만.
"정면에 적 전차, 철갑유탄 장전!"
토마스가 포탄을 장전하는 사이, 녀석이 먼저 발포했다.
포탄은 역시나 도탄.
하지만 동시에 포탑의 기관총도 불을 뿜어서 나는 잽싸게 포탑 안으로 몸을 숙여야 했다.
"장전 완료!"
"발사!"
철갑유탄을 차체 정면에 직격당한 M11/39는 불타는 관짝이 되어 기동을 정지했다.
탑승객들은 죄다 즉사했는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M11/39까지 게이츠 상사의 포탄을 맞고 격파되는 것으로 이탈리아군의 모든 저항은 완전히 끝났다.
아군의 피해는 전차 1대 전소 및 전사 9명, 부상 11명.
반면, 이탈리아군의 피해는 수백 명 사살(수를 세어보지 않아서 자세한 숫자는 모른다)에 기지에 있는 보급품 파괴.
'전투'는 아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비록 금쪽같은 전차 1대와 전차병들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전투 결과를 보고하자, 무어 대위는 엄청 기뻐하면서 내게 복귀를 명령했다.
방금 정찰기가 돌아왔는데, 적 주력이 이동 중이라고 한다.
이곳으로 올지 모르니, 빨리 후퇴하라는 거였다.
멀쩡해 보이는 적 보급품 상자들을 한곳에 모아 수류탄으로 죄다 날려버린 후에야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아군의 피해도 없지 않았지만, 모처럼 거둔 승리에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