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6화
66화 시나이반도의 결투 (3)
"전진! 다 쓸어버려!"
경계도 게을리하고 퍼질러 있던 이탈리아군은 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혼비백산했다.
패닉에 빠져 얼어붙었다가 기관총에 도륙당하는 병사가 3할, 도망치는 병사가 4할.
나머지 3할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병사들이었다.
남들이 도망치거나 숨기 급급할 때, 무기를 들고 싸울 생각을 하는 저들은 진정 훌륭한 군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이길 수가 없는데.
카르카노 소총 따위론 이 전능하신 '전장의 여왕'에게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적들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다만 가진 무기가 저것밖에 없을 뿐.
"쏴!"
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도주하던 이탈리아군 서너 명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공축 기관총이 적들의 몸통에 구멍을 뚫고, 무한궤도가 적들의 팔다리를 으스러뜨렸다.
황금색 모랫바닥은 금방 검붉은 피와 살점, 내장 조각들로 붉게 물들었다.
"뒈져라 파스타 새끼들아!"
"제리의 똘마니들!"
보병들도 공격에 가세해 도망치는 이탈리아군의 등에 총탄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도 사격을 가해 보병 몇 명을 고꾸라뜨렸다.
제대로 된 대전차무기가 없던 이탈리아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수류탄을 궤도 앞에 던졌지만, 수류탄이 터져도 궤도는 멀쩡했다.
"모두 도망쳐!"
"사람 살려!"
"항복! 항복!"
이제까지 독일군 코인에 탑승해 연승을 거듭해왔던 이탈리아군은 후퇴만 하던 아군이 기습을 가해오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자만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탈리아군 1개 중대를 궤멸시키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하! 승리다, 승리!"
"너무 쉬워서 훈련인 줄 알았습니다."
손쉽게 승리를 쟁취한 병사들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이와 반대로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의 얼굴에는 절망과 허무함이 가득했다.
아군 보병들이 포로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한 곳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훨씬 많은 포로가 발생하는 바람에 이들을 처치하기가 곤란해졌다.
우선은 포로 중 부상자들은 아군 부상자들과 함께 트럭에 태워 후방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보병 1개 소대를 차출해 감시하도록 했다.
"모두 수고했다. 내려서 좀 쉬도록."
"예엡."
나는 헤드폰을 벗고 전차 밖으로 나왔다.
긴장이 탁 풀리면서 소변이 보고싶어졌다.
화장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아무곳에나 보면 되지만, 시체가 즐비한 곳에서 소변을 보자니 어째 사람이 해선 안 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대충 적당히 구석진 곳에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데, 저 멀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탈리아군의 시신이 보였다.
"?"
그 시체는 품에 무언가를 감싼 자세로 죽어있었다.
뒤통수에 구멍이 난 걸로 봐선, 도망치다가 총알을 맞고 즉사한 듯했다.
"대체 뭘 가지고 있길래......."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든 나는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체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시체의 품에서 작은 가방을 발견하고 그것을 빼냈다.
가죽으로 된 네모난 가방이었다.
전투 중 충격으로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다.
"이건......."
안에서 지도판과 만년필, 그리고 서류 여러 개가 나왔다.
이를 확인하곤 난 가방을 끌어안고 곧장 무어 대위에게로 향했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그는 게이츠 상사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브랜슨 중령의 다음 지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뛰어와?"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무어 대위에게 가방을 통째로 건넸다.
가방에서 지도판과 서류를 꺼내 확인하던 무어 대위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 이건......!"
지도판과 서류에는 이탈리아군의 후방 보급소의 위치와 주변 지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보급소의 물자 목록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무어 대위는 즉시 브랜슨 중령에게 무전을 걸어 지도판과 서류의 내용에 대해서 보고했다.
곧 심각한 대화가 오가더니, 무어 대위는 휘하 장교들과 보병 중대의 장교들을 모두 호출했다.
내가 우연히 노획한 정보에 따르면, 이탈리아군의 보급소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이곳에서 전차로 3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보급소를 지키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갑부대가 있긴 하지만, 1개 소대 규모에 불과한데다 성능으로 따지자면 마틸다의 발끝에도 못 따라간다.
일본군의 악명높은 치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니 말 다 했지.
게다가 보급소의 병력도 대다수가 행정병과 보급병 등 비전투병과 소속.
반면 이들이 지키는 보급품 물량은 1개 연대 분량.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잘만 하면 적의 보급소를 털어먹는 것도 모자라 이탈리아군의 작전 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줄 수 있다!
"지금부터 작전 계획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브랜슨 중령은 언제 적의 후속부대가 그리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관계로 전 병력을 동원하는 건 힘들다 말했다.
따라서 이번 작전에 투입될 병력은 내가 지휘하는 3소대와 추가로 증원된 게이츠 상사의 전차 1대, 보병 1개 중대가 전부.
나머지 병력은 이곳에 남아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작전 자체는 단순했지만, 성공한다면 아주 어마어마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저 라틴 잡종들에게 대영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알겠나?!"
"예!"
시대가 시대인만큼 인종 드립은 어쩔 수 없지.
사기를 북돋으려면 뭐든 못하나 싶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으니까.
아무튼 다 같이 기합을 외친 후, 나는 서둘러 내 소대로 돌아와 소대원들에게 작전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런 다음 전차에 올라, 애덤에게 시동을 걸게 했다.
"마지막으로 꼼꼼히 점검해라. 모두 이상 없나?"
"엔진, 연료계 모두 이상 없습니다!"
"조준경, 기관총 모두 이상 무!"
"이쪽도 이상 없습니다!"
셋 다 이상 없다는 희망찬 답변이 돌아왔다.
포탄과 총탄, 기름도 아직 넉넉하다.
소대의 전차들 중 4호차로부터 공축 기관총이 고장 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큰 문제는 아니니 패스했다.
이번 임무에 함께할 보병 중대 지휘관은 나와 같은 중위였지만, 내 지시를 받게 되었다.
본인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나와 같은 계급의, 그것도 나이는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지휘하는 게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다행히 그에게 내릴 지시는 별로 없었다.
"음, 저희 소대가 발포하면, 그때 발포해 주십시오. 적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깐. 제가 만약 죽거나 전투 불능인 상태가 되면, 게이츠 상사가 지휘를 맡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엔진도 예열이 끝난 상태였고, 병사들의 사기도 만땅이었다.
자, 그럼 가볼까.
***
"후우, 씨발."
하염없이 사막의 모래 들판을 걷던 카를로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을 내뱉었다.
오늘따라 그의 두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땀은 비 오듯이 흘렸고, 목은 바짝 타는 것 같았다.
시원한 냉수 한 잔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야, 알베르토."
"왜."
"너 물 남은 거 있냐?"
카를로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알베르토에게 물었다.
그의 두 눈은 알베르토가 옆구리에 찬 수통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알베르토의 대답은 카를로의 한 줄기 희망을 무참히 박살 냈다.
"없어. 있었으면 진작에 마셨지."
"제기랄."
더 이상 걸을 힘이 없던 카를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땀에 젖었다가 햇빛에 말랐다가, 다시 땀에 젖기를 반복한 군복에선 끔찍한 악취가 났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얌전히 포로가 되는 건데."
"누가 아니래."
영국군이 기습해오자 그들의 중대는 순식간에 괴멸되었다.
하지만 둘은 죽은 척을 한 덕분에 영국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 몰래 기회를 엿보다가 탈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 둘은 자신들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카를로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탓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도망칠 생각을 했을까?
조용히 포로가 되었다면 이렇게 개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머리가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야, 카를로."
"왜."
앉아서 넋두리하던 카를로에게 알베르토가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이긴 하냐?"
"아마도."
둘은 기억을 되짚어가며 후방의 아군 기지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기지는커녕 사람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자, 알베르토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미아가 되어 끝없이 사막을 헤매다 탈수로 죽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물도 없고, 체력도 바닥 나고...... 진짜 되는 일이 없구만."
"누가 아니래."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갈까?
그런 생각이 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 사막을 헤매다 죽을 바에는 영국군의 포로가 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비록 적국이긴 해도, 그들을 최소한 사람으로 대우해줄 터였다.
허나 돌아가면 주변 동료들의 비웃음은 감당해야 했다.
기껏 탈주해놓고 제 발로 돌아와서 포로가 되는 얼간이가 있다? 평생 놀림거리가 되겠지.
물론 생존이라는 짐 앞에 주변의 비웃음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여간 꺼려지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되돌아가려면 또 한참을 걸어야 한다.
반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기지가 나올지도 모른다.
조금 더 인내하고 환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돌아가서 비웃음을 받을 것인가.
고민 끝에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조금 더 가보자."
"그래."
한참을 걸은 끝에, 다리에서 쥐가 나고, 발바닥의 감각이 희미해졌을 무렵.
그들의 앞에 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 살았다......."
걷는 중간에 되돌아갈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둘은 안도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지와의 거리는 이제 겨우 1km 남짓. 그동안 열심히 걷기만 했으니, 좀 쉬었다 가도 될 것이다.
"가서 뭐라고 말하지? 영국군이 습격해서 우리 둘만 겨우 탈출했다고 말하면 되려나?"
"아마도?"
"그런데 우리가 무기 없이 빈손으로 왔다고 뭐라 하는 거 아냐?"
알베르토는 꼬투리를 잡혀서 질책받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카를로는 별걱정도 다한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아무리 윗대가리들이 병신이어도 우리를 야단치진 않을 거야."
"그렇겠지?"
충분히 쉬었다고 판단한 그들이 일어설 때였다.
어딘가에서 엔진소리가 들리면서 무한궤도 구르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둘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저거...... 영국군 맞지?"
"맞아."
마틸다 전차 여러 대와 보병들을 태운 트럭이 기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사막에 기다란 타이어 자국을 남긴 채.
"X 됐다, X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