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5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5화
65화 시나이반도의 결투 (2)
처칠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수하라고 엄명을 내렸던 수에즈 방어선은 끝내 붕괴했다.
아군 방어선을 무너뜨린 추축군은 수에즈 운하를 넘어 시나이반도로 진공(進攻)을 개시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 전 시나이반도에 도착한 인도와 동남아 주둔군과 호주-뉴질랜드군이 적들을 막아섰다는 것이다.
해군과 공군도 연일 수에즈 운하와 그 일대에 공격을 가하는 중이었고.
이들의 투혼 덕분에 적들의 진격은 매우 더뎠지만, 여전히 전황은 아군에게 극도로 불리했다. 빌어먹을.
'수에즈 방어선, 끝내 붕괴...... 독일의 성장세는 어디까지?'
'대영제국의 봄날은 여기까지인가?'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반전 시위대 기습 시위...... 경찰 진압으로 20명 중경상'
신문들은 하나같이 한 부를 더 팔아보려고 자극적인 기사를 써내며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더욱 자극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라디오 뉴스까지.
-신원을 밝힐 수 없는 정보통에 따르면, 최근 처칠 수상의 인지능력에 대한 우려가 정부 고위층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요?
-히틀러는 우리에게 먼저 평화를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위대하신 총리 각하께서 평화 제안을 먼저 걷어차셨죠. 그리고 멍청한 국민들은 그걸 또 지지했고요.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참 환장할 노릇이다.
공정성이란 정치적 중립은 죄다 어디에 팔아먹었냐?
21세기나 20세기나 이런 면에선 다른 게 하나도 없구만.
아무튼, 그건 그거고.
지금 내 상황도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하씨, 괜히 떨리네."
다시 그 독일군과 싸울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몸이 떨렸다.
아직도 지난 아라스 전투에서 88mm와 슈투카에 의해 아군 전차들이 학살당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부하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 못했다.
전장으로 가는데, 표정이 밝으면 그게 이상한 거긴 하다만.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이제까지 유럽과 북아프리카 각지에서 연승을 거둔 독일군.
과연, 그 괴물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분위기는 축 처지다 못해 거의 장례식장 수준이었다.
아직 전투하기도 전인데 이런 분위기라면 이거 싸우기도 전에 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불안했다.
장교 회의 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쭉 이어졌다.
"다들 왜 이래? 여기가 무슨 장례식장이나 공동묘지라도 되냐?"
"아닙니다!"
죽을상을 한 우리와 달리, 브랜슨 중령은 다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뭐야, 혹시 독일군이 무섭지도 않은 건가.
아니면 다른 믿는 구석이 있다던가.......
"제군들에겐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가 이번에 상대할 적은 제리들이 아니라 파스타 놈들이니 말이야."
파스타...... 가만, 파스타라고?
적이 바뀌었다는 소식에 갑자기 온몸에 없던 힘이 넘쳐흐르는 기분이다.
독일군 대신 이탈리아군과 싸운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를 본 브랜슨 중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이고, 요놈들 좀 봐라. 제리들이 그렇게 무서웠냐?"
"아닙니다!"
"아니긴 개뿔.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떻게 베를린까지 가겠냐? 뭐, 아무튼 상부의 계획은 이렇다.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듣도록."
작게 헛기침을 하고 그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방금 도착한 정찰조의 보고에 따르면, 이탈리아군은 현재 연이은 승전으로 사기는 높지만 자만감에 빠져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다고 한다. 제대로 된 방어 진지는커녕 달랑 참호와 개인호 몇 개만 파두고, 기갑부대와 보병들 모두 따로 놀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말 다 했지."
유럽의 당나라 군대 아니랄까 봐.
전쟁에 나온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보고였다.
어떻게 될지 모를 전장에서 단지 전황이 좀 좋다고 저리 군기가 빠지다니.......
"거기다 보급에 비해 진격이 빨라 현재는 보급품이 부족한 상황. 그야말로 기습으로 한 방 먹이기 딱 좋은 상태다."
브랜슨 중령의 어조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대대는 총 3면에서 적군을 공격한다. 1중대가 북쪽에서, 2중대가 정면에서, 3중대가 남쪽에서. 각 중대마다 보병 2개 중대가 뒤따를 예정일세. 유감스럽게도 포병과 공군 지원은 없다. 그치들은 전부 제리들을 상대하러 갔거든. 하지만 나는 제군들이라면 포병과 공군의 지원 없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좋아. 작전은 1530시에 시작한다. 오줌 눌 사람은 미리 오줌 싸고, 전차에 탄약 쟁여두는 것도 잊지 말도록."
본격적인 반격의 서막이 올랐다.
***
"후우, 내 살인을 좋아하지 않아 이젠 손을 씻고 살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세상이 우릴 가만 놔두지 않는 것 같구려."
아이고, 지랄들 하네.
우리가 싸울 적이 천하무적 독일군이 아니라 만만한 이탈리아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방금까지 도축장에 끌려가던 돼지처럼 침울해 있던 것들이 무협물 속 고수들이라도 된 것처럼 떠들고 있었다.
참 간사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말만 들으면 무슨 방랑 기사라도 되는 줄 알겠네. 조금 전까지 질질 짜던 놈들이 하여간 입만 살았어요."
"소대장님 오셨습니까."
"엔진 정비는 다 끝냈냐?"
"헤헤, 걱정마십쇼. 공장에서 갓 나온 것처럼 정비해뒀으니."
손을 비비며 얍삽한 표정을 짓는 애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시트콤 속 악역 회장님이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정비는 착실하게 해뒀다.
군데군데 아직도 먼지랑 기름때가 끼어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봐주지.
전투를 앞둔 터라 다소 긴장된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병사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안도감이 흘렀다.
싸울 상대가 바뀐 게 이리 크다니.
하기사 나도 독일군 대신 이탈리아군과 싸운다는 얘기에 반색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공격을 앞두고 다시 정찰기가 적진으로 날아가 정찰을 하고서 돌아왔다.
여전히 이탈리아군은 우리가 공격해오리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는지 무사태평이라고 한다.
적들이 방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기쁜 소식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그만큼 깔보고 있다는 말도 된다.
괘씸한 파스타 녀석들.
독일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저어~기 엘 알라메인 언저리에서 빌빌거리고 있을 놈들이 참으로 괘씸하도다.
내 직접 천벌을 내리는 수밖에.
***
"휴. 존나게 덥네, 진짜."
개인호 파기를 끝낸 카를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물을 들이켰다.
수통 속 물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지경이었지만, 참고 마셨다.
이곳에서 물은 금보다 더 귀했으니까.
"물을 끓이지 않아도 파스타를 익힐 수 있겠어."
알베르토도 투덜거리면서 자기 몫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들이켰다.
그들은 수에즈 운하를 넘어 시나이반도에 최초로 발을 디딘 이탈리아군 선봉대였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공을 독일군에 뺏겨 내심 자존심 상해하던 이탈리아군 사령관 그라치아니 원수는 휘하 사단들을 닥달해 진격을 재촉하고 있었다.
상부에 잘 보여서 진급할 욕심에 눈이 먼 사단장들도 일선의 부대 간의 경쟁심을 부추기면서 진격을 독려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터로 끌려온 최전선의 병사들은 왜 자신들이 상관들의 진급을 위해 황량한 사막에 뺑이를 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참나, 그까짓 공이 뭐라고. 그냥 독일군에게 다 맡기고 우린 느긋하게 있으면 어디 덧나냐?"
"내 말이. 어차피 전쟁에서 이겨도 이곳에서 살 것도 아닌데."
두체의 말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면 이집트는 물론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머나먼 남쪽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모두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로 불리는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생활 공간이 될 예정이었다.
신 로마 제국의 건설!
이 얼마나 가슴이 웅장해지는 말이 아닌가.
로마의 라디오 방송에 나온 두체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 생각이 없는 카를로와 알베르토에겐 그저 쓸모없는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황량한 땅에서 뭘 할 수 있다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름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누가 미쳤다고 이런 사막에 살고 싶어 하겠어?"
"내 말이. 두체도 이런 황량한 땅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을걸? 그냥 지도에서 아프리카와 중동을 이탈리아 색으로 칠하고 싶을 뿐이지."
누가 들으면 위험해질 말조차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겨우 개인호를 완성한 알베르토가 땅에 야전삽을 꽂고 기지개를 켰다.
"배고프다."
"나도."
더군다나 배까지 고팠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오늘 저녁은 뭐 나온다냐? 아는 거 있어?"
"몰라. 그런데 별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보나 마나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마카로니가 전부겠지."
체념한 듯 알베르토의 말에 카를로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탈리아의 요리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지만, 전투식량만큼은 단연코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카로니는 너무 오래 삶아서 만들어진 탓에 푹 퍼지고 팅팅 불어서 맛이 없었고, 토마토소스는 짠맛과 신맛이 어우러진 빨간 국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빵은 진흙 덩어리에, 비스킷은 모래를 뭉쳐서 만든 듯한 식감이었고, 통조림 속 고기는 힘줄과 연골 덩어리였다.
이탈리아군은 음식이라기보단 폐기물에 가까운 전투식량을 살기 위해 억지로 먹었다.
그러나 억지로 먹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대부분 병사는 현지인들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구매하거나, 영국군이 버리고 간 물자를 뒤져 식량을 챙기기 급급했다.
"참나, 우리 과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딴 음식물 쓰레기들을 먹으라고 만들다니."
"그 자식들은 우리가 먹는 걸 처먹지 않아서 그따구로 만드는 것일지도 몰라. 개새끼들."
병사들과 달리 장교들, 특히 영관급 장교들부터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그들에겐 병사용 전투식량과 차원이 다른 제대로 된 음식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맛대가리 없는 짬밥에 형편없는 무기를 들고 찌는 듯한 더위 아래서 영국군과 악전고투할 때, 그들은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안전한 후방에서 태연하게 지도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직접 장갑차를 타고 전선을 누비며 병사들과 같은 전투식량을 먹는 롬멜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뭐지?"
"왜 그래?"
이상한 기운을 느낀 카를로는 일어서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런 카를로를 알베르토가 어리둥절하여 쳐다보았다.
"저건 또 뭐야?"
"어떤 거?"
"저어기, 지평선에서 보이는 거 말이야."
카를로의 말에 알베르토도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에서 모래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모래폭풍인가?"
"그런 거치곤 어째──."
모래폭풍 아래로 전차들이 튀어나오자, 카를로는 말을 멈추었다.
눈이 접시만큼 휘둥그레졌다.
틀림없는 영국군의 마틸다 전차였다.
"저, 적이다!"
"뭐, 뭐?!"
"적이라고, X발!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