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4화
64화 시나이반도의 결투 (1)
"킴 필비와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었지?"
"옙."
"그때 킴 필비가 자신을 MI6 요원이라고 소개했었고?"
"정확히는 MI6에서 일하는 중이라고만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런 적 없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나?"
"저야 모르죠."
"하긴...... 그래, 그날 자네는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그와 만났고?"
"예."
내 말을 작은 노트에 적던 마븐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 말이 사실인가? 산책을 하던 도중에 우연히 킴 필비와 만난 게 아니라 그를 만나기 위해 나갔던 게 아니고?"
그는 내가 킴 필비와 만나기 위해 산책을 나갔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아니, 정말로 우연히 만난 게 맞다니까?
"사실입니다. 그와 만난 건 정말 우연입니다."
사실대로 얘기했지만(적어도 이번 질문만큼은), 마븐은 여전히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중위. 듣고 기분 나빠하진 말게나."
"예."
듣고 기분 나빠하지 말라니,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상부에는 자네가 어떻게 킴 필비와 그 동료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사이가 틀어져서 자네가 필비를 죽이게 되었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이 말일세."
"......허허."
즉, 일부에선 내가 사실 킴 필비와 한통속이 아니었나 의심하고 있다는 소리다.
하긴, 그렇게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금까지 간첩인 걸 속이고 다니던 자가 파티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대뜸 전향을 권유하며 자기 비밀은 물론 동료들 이름까지 댔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거든. 너무 어설프잖아.
"정말로 킴 필비가 자기 입으로 자네한테 동료들 이름을 댄 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사실 킴 필비는 내게 자기 동료들 이름을 댄 적 없다.
다만, 내가 미래인이라서 알고 있었을 뿐.
"알겠네. 사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그냥 단순히 확인차야. 불쾌하게 느꼈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이게 우리 일이라 이해 좀 해주게."
"물론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취조는 이걸로 끝이었다.
떠나기 전, 마븐의 동료-이름이 두걸 딕슨이라 했던가?가 내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자네는 이대로 군에 계속 있을 생각인가?"
"아직 결정하진 못했습니다. 전쟁이 한창인데, 그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와닿지 않아서 말이죠."
"보기보다 현실적인 친구구만. 그래, 아직 전쟁 중인데 전쟁 이후의 일을 생각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
잘 알고 계시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본 거야?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마븐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상부에는 자네를 의심하는 사람 외에도 자네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혹시 전쟁이 끝나고 이쪽에 관심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우리 조직은 새로운 인재를 상시 환영하거든. 아, 물론 킴 필비 같은 작자는 빼고 말이야."
MI6 요원들이 떠나자 브랜슨 중령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레이 중위, 별일 없었나?"
"예? 잘 모르겠습니다만?"
"표정을 보니 괜찮아 보이는군. 킴 필비와 우연히 만났다는 이유로 MI6에서 직접 조사관까지 보내다니, 참 철두철미한 곳이구만. 안 그런가?"
"아, 예. 물론입니다......."
앞의 두 사람이 브랜슨 중령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몰라도, 그는 내가 이번 사건에 직접적으로 얽혀있다곤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 역시 괜히 일을 키울 생각이 없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
2월 중순.
전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각하! 급보입니다!"
"또 뭔가?"
"이라크가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이......!"
이라크가 추축 동맹에 가입하고 영국에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을 들은 처칠은 이마를 탁 쳤다.
맙소사, 이젠 하다하다 이라크 같은 잡것들까지 말썽이군.
이라크는 본래 중립국이었지만, 영국의 간섭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영국의 내정간섭이 불만이지만 힘이 없어 분을 삭여야만 했던 이라크인들에게 추축군의 연승은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집트를 봐라! 독일,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영국을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지 않았는가!"
"우리도 할 수 있다!"
총리 라시드 알리를 주축으로 한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에 대항해 역사보다 두 달 일찍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라크를 추축 동맹에 가입시키고, 영국에게 선전포고함과 동시에 독일과 이탈리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라크가 지원을 요청해왔습니다, 총통 각하."
기세를 타고 전쟁을 선포하긴 했지만, 후진국이었던 이라크는 영국과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육군은 20세기 초에 머물러 있었으며, 공군은 미약했고, 해군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롬멜 장군이 이라크까지 도달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합니다."
"그래도 동맹인데 못 본 척할 순 없지. 우리에겐 프랑스가 있지 않나? 프랑스령 시리아를 통해 이라크로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보내도록. 그리스에 협력 좀 해달라고 말해주고."
"예!"
독일과 영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도 추축국에 가입했다.
이로써 발칸반도 전역이 추축국의 영역에 들어왔다.
더군다나 이집트의 추축군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곧 적군이 수에즈 운하를 넘어 공세를 시작할 것이라는 보고가 속속 전해졌다.
적들의 다음 목표가 어디가 될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확실한 것은 적들이 수에즈 운하를 넘어 아시아 진출을 허용해서는 안 됐다.
"인도, 동남아 주둔군까지 모두 동원하게! 호주랑 뉴질랜드도! 절대로, 절대로 적들이 진격할 수 없게 막도록!"
"이번에도 밀리면 대영제국은 정말로 끝이다!"
우리는 서둘러 중동으로 향했다.
갈수록 악화하는 정세와 다시 전쟁터로 간다는 사실 때문에 다들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고난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
1941년 2월의 마지막 날,
"발사!"
"쏴!"
전선을 따라 배치된 수백 문의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고, 동시에 활주로에서 이륙한 슈투카들도 영국군의 참호 위로 폭탄을 투하했다.
"엎드려! 온다!"
"살려줘!"
"위생병!"
포격이 시작되기 무섭게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 위생병을 찾는 부상자의 절박한 외침이 쏟아졌다.
모래 먼지와 화약 연기 아래로 이름 없는 병사들의 아우성이 들끓었다.
영국군은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하여 수에즈 운하 일대에 참호와 벙커, 대전차호 등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반도로 진출하려는 추축군에게 영국군의 방어선은 매우 큰 장애물이었다.
추축군은 공격에 앞서 포격과 폭격으로 영국군의 방어선을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영국군 병사들은 쏟아져 내린 흙더미에 파묻히거나 참호째로 날아갔다.
허나, 영국군이라고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쏘아!"
"쏴!"
후방의 영국군 포병대도 최전선의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쉬지 않고 포격을 가했다.
둔중한 25파운더가 포구에서 불꽃을 토해내면 탄약수가 잽싸게 약실을 열어 탄피를 빼내고 다음 포탄을 집어넣었다.
영국군 포병이 쏜 포탄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있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상륙을 위해 보트를 타고 대기 중이던 병사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피해!"
포탄이 근처에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을 가득 태운 보트는 손쉽게 뒤집혔다.
물에 빠진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을 치며 주변의 병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의 팔다리와 조각난 나무판자 따위가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이만큼이나 두들겨 맞고도 아직도 버티고 있다니. 과연 대영제국의 군대답군."
포병 관측용 잠망경으로 운하 저편의 영국군 진지를 살피던 롬멜이 말했다.
영국군 진지는 불바다 그 자체였다.
이쯤 되면 항복하거나 도망칠 법도 한데, 영국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전에 상대했던 나약한 적들-벨기에군이라던가, 프랑스군이라던가-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군인이 아닐 수 없네. 병사들도, 지휘관들도 모두."
롬멜은 말하면서 씩 웃었다.
훌륭한 군인인 것과는 별개로, 그들은 엄연한 적군이다.
총통과 독일 민족의 이상을 방해하는 적들.
그렇다면 가차 없이 밟아주는 수밖에.
"슈, 슈투카다!"
슈투카가 진지 위로 나타나자, 야포를 조작하던 영국군 포병들은 금방 패닉에 빠졌다.
슈투카가 내는 기괴한 사이렌 소리도 그들의 공포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대공포가 서둘러 불을 뿜었지만, 슈투카는 겁을 먹기는커녕 되려 고도를 낮추며 폭탄을 투하할 준비를 했다.
"도망쳐!"
"잠깐, 어디 가는 거야?"
공포로 이성을 잃은 병사들은 야포를 내팽개치고 뒤로 도망쳤다.
장교들이 권총을 꺼내 들고 병사들의 도주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대다수 병사가 자신들을 막으려는 장교들을 밀치고 도망치기 바빴다.
"모두 위치로 돌아가! 도망치는 자는 사살하겠─."
슈투카가 투하한 폭탄이 착탄하자, 포병 진지는 초토화되었다.
야포 주변에 있던 탄약까지 한꺼번에 터지면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포병 진지와 근처의 대공포 진지까지 쓸어버렸다.
인간의 살점과 군복 조각들, 자잘한 파편 부스러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영국군의 저항이 시들해지자 뭍에서 대기하던 수천 명의 독일군 병사들은 일제히 운하를 도강하기 시작했다.
"자, 드가자!"
"가즈아!"
보트에 탄 병사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노를 저었다.
영국군은 포격과 슈투카의 공습 탓에 사격은커녕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덕분에 독일군은 무사히 운하를 도강할 수 있었다.
병력 1진이 도강을 무사히 마치자, 포병들은 포격을 중지했다. 잘못하다간 겨우 운하를 도하한 아군이 포탄에 맞을 수 있었다.
포격이 끝나 겨우 고개를 든 영국군이 본 것은 착검한 채 달려오는 독일 병사들의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커헉!"
"뒈져라 토미!"
가슴에 총검이 박힌 영국군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참호에 뛰어든 독일군은 포격의 충격에서 헤매고 있는 영국군 병사들을 가축처럼 도살했다.
기관단총이 불을 뿜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수류탄이 폭발했다.
사람의 피와 내장 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수륙양용으로 개조된 2호 전차들도 운하를 도강해 아군 보병들을 지원했다.
20mm 기관포탄에 맞은 병사들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고, 잘게 다져진 살점과 뼛조각들이 무한궤도에 들러붙었다.
뒤이어 3호 잠수전차와 4호 잠수전차도 잇달아 운하를 도강했다.
운하를 도강에 뭍으로 올라오는 전차들과 적병들을 본 영국군의 사기는 바닥을 뚫고 떨어졌다.
무슨 수를 써도 저 괴물들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쏘지 마, 쏘지 마라! 항복하겠다!"
"항복! 항복한다고 새끼들아!"
"쏘지 마!"
1진으로 출발한 병사들이 건너편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2진 병사들도 운하를 건널 준비를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본국에서 보급받은 고무보트와 현지에서 만든 나무 보트들을 들고서 대기하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제2진, 준비 완료했습니다!"
"좋아, 출발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