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3화
63화 케임브리지에서 생긴 일 (4)
"몇 번이나 말합니까. 저는 결코 공산주의자 따위가 아니라고요."
자신을 매의 눈으로 노려보며 이것저것 캐묻는 조사관에게 앤서니 블런트는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킴 필비, 그 친구와 절친한 사이였던 것은 맞습니다만, 저는 그 친구가 공산당 활동에 몸을 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게다가 저는 일평생 부족함 없이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뭐가 아쉬워서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겁니까?"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온 인재답게 블런트는 수려한 말솜씨로 조사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사관은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 어떤 호소나 항변도 먹히지 않자, 블런트는 사실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조사관이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의 감정 따윈 없는 그저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차가운 기계.
"일단은 알겠소."
지금까지 묵묵히 블런트의 얘기를 듣던 조사관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지. 당신은 친구들과 자주 만났는데, 그들한테서 수상한 낌새 같은 것은 없었소?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던가 등등."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모르겠소?"
"예."
조사관은 블런트를 아무 말 없이 그저 지그시 쳐다봤다.
이에 질세라 블런트도 그를 노려보았다.
오랜 대치가 이어진 끝에 조사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서류를 챙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소이다. 오늘 조사는 이걸로 끝이오."
"그럼, 저는 이제 가봐도 되겠지요? 며칠째 면도도 못 하고 이곳에 붙잡혀 있었으니 말입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나흘 만에 자유의 몸이 된 블런트는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집에도 조사관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다녀갔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블런트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던 그는 만일에 대비하여 집 대신 다른 거처에 자료를 두고 다녔다.
허나 당장은 넘어가더라도, 이제부터 그는 감시 대상이었다.
앞으로 어딜 가던지 미행이 붙을 것이다.
그가 소련의 간첩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 쭉.
이제 어떡한담?
한동안 감시가 삼엄할 테니 소련과 접선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몰래 어디론가 잠적할 수조차 없고.
게다가 간첩 의심을 받기 시작한 이상 MI5에도 더 이상 있지 못할 것이다.
틀림없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직으로 옮겨지겠지.
굴욕스럽더라도 한동안은 참아야 한다.
지금 같은 전시에 간첩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목숨조차 유지하기 힘들다.
당분간은 몸을 사리면서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요즘 전황이 나쁘다고 하니, 상부도 그를 오랫동안 주시할 수 없을 것이다.
상부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소련으로 망명하면 된다.
집에 도착한 블런트는 열쇠를 찾기 위해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블런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틀림없이 집을 뒤진 조사관들이 문을 잠그지 않고 그대로 나간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안으로 들어간 블런트는 예상대로 집이 어질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닥에 찍힌 신발 자국부터 너덜너덜해진 카펫, 찢어진 벽지, 바닥에 널린 각종 서류와 깨진 액자들까지, 멀쩡한 게 없었다.
하지만 블런트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집에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서조차 알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소파에 앉아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놀란 블런트가 주춤거리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담배를 비벼 끄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앤서니 블런트 씨?"
"누, 누구요? 당신은."
남자는 블런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웃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당신이 앤서니 블런트 씨요?"
"그렇소만."
블런트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소매에서 권총을 꺼내 블런트의 이마를 쏘았다.
소음기가 총성을 어느 정도 줄여줬지만, 그래도 충분히 컸다.
총탄이 머리에 박힌 블런트는 힘없이 뒤로 넘어졌다.
임무를 완수한 남자는 서둘러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간 뒤, 건너편 건물 옥상을 향해 뛰었다.
남자가 계단을 타고 내려와 거리와 나왔을 때, 앤서니 블런트의 집을 향해 한 무리의 사복요원들이 우르르 들어가고 있었다.
***
-여기는 솔개. '여왕'은 안식에 들어갔다.
-여기는 오리. 수고했다.
-'왕자'와 '국왕'은 어떻게 되었나.
-아직 취조 중인 것으로 보인다. 기회를 봐서 처리하겠지만, 당분간은 힘들 것 같다.
-알겠다.
***
앤서니 블런트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은 곧장 처칠에게 전해졌다.
간첩 용의자가 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죽었다고? 그것도 암살?
이 모든 게 가리키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놈은 진짜로 소련의 간첩이었나 보군."
처칠의 말에 참석자들은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특히 MI5와 MI6 관계자들은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처칠은 그들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우려와 달리, 처칠은 호통을 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참겠네. 당장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으니 말이야."
처칠은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잠시 내려놓았다.
"스파이들이 소련으로 유출한 정보들이 독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은?"
"예, 각하. 현재 우리가 해독한 독일의 암호를 모두 재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아직까진 비슷한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거, 확실한 건가?"
처칠이 영 미덥지 않다는 듯이 말하자, 자신 있게 보고했던 암호 해독부 관계자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 아직 더 조사를 해봐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만......."
"일단은 믿지. 더 빡세게 조사하도록."
"옙."
처칠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MI6 요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볍게 묵례를 한 뒤, MI6 국장에게로 가 귀엣말로 새로운 정보를 전하곤 물러났다.
새 정보를 전해 들은 국장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나머지 셋이 입을 열었답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자신들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간첩이라고 자백했답니다."
***
부대로 복귀하고 일주일 뒤,
영국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충격실화! 케임브리지 5인조의 정체!'
'영국 사회에 침투한 공산당의 그림자!'
'이념을 위해 조국을 배신하다!'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영화보다 더한 현실!'
결국, 어찌 되었는지 몰라도 케임브리지 5인조의 정체가 밝혀졌다.
상부에서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몰라도, 내겐 아무런 일도 없었다.
무어 대위도, 게이츠 상사도, 브랜슨 중령도 휴가 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내가 말을 안 한 것도 있지만, 상부에서는 사건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케임브리지 5인조의 정체가 드러나는 바람에 정치권은 물론 민간에서도 아주 난리가 났다.
분노한 군중이 소련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여는가 하면, 평소 공산당 활동을 하거나 소련을 옹호하던 이들이 거리로 끌려 나와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는 일까지 도처에서 벌어졌다.
거기다 독일보다 소련이 더 문제라며 소련과의 국교 단절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소련은 아직 아무런 공식 입장도 내고 있지 않지만, 그들도 제법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겨우 영국 상층부에 스파이들을 심어놨는데, 전부 다 발각당해서 지금까지의 노력이 죄다 수포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영국과의 관계조차 악화했으니 말이다.
원래도 바르바로사 작전 전까지 소련과 영국은 사이가 서로 좋지 않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더더욱 나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불똥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까지 튀었다.
미국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간첩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퍼지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뉴욕에 있는 미국 공산당 당사가 불타고, 미국 대선에도 출마한 적이 있는 얼 브라우더는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다.
파티장에서 우연히 킴 필비와 마주친 일이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올 줄이야.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앞의 일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제법 충격이었던 일은 또 있었다.
평소처럼 기동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한 무리의 병사들이 훈련을 받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자주 보는 광경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는데,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병사들치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홈가드 소속인가 싶었지만, 그들은 영국 육군의 정규부대였다.
내가 게이츠 상사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게이츠 상사는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 모르셨습니까? 2주 전부터 징집 연령이 달라졌잖습니까."
"징집 연령이 달라졌다고요?"
"네. 육군에서 사람이 하도 모자란 탓에, 이젠 18세부터 42세까진 징병 대상이랍니다. 대신, 나이가 40이 넘은 징집병들은 해외 파견 대신 본토 방어만 맡는다더군요. 저 멀리 중동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것보단 도버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됭케르크에서 입었던 육군의 피해를 만회하려면 당연한 일이다.
당장 병사 숫자부터 채우는 게 우선이니까.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과 인도 등 영연방 각지의 병력이 있다지만, 그래도 됭케르크에서 정예병력을 상실한 일이 너무 컸다.
충격적인 광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는 훈련 중인 여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교관의 쌍욕을 들으며 진흙밭을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아니, 저들은 여군이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여군은 군인 아닙니까? 본인들이 자원해서 온 군대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맞는 말이다.
근데 여군은 주로 통신병과 같은 비전투 병과에 소속되어서 저렇게 빡센 훈련은 안 받은 것으로 아는데.
부대로 복귀한 후 찾아본 결과, 이젠 여군도 남자들처럼 전투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대신 배치는 통신이나 취사, 보급 같은 비전투 병과에만 보내진다고 한다.
비전투병과에 소속된 여군이 많아질수록 본래 비전투병이었던 병사들의 전투병 전환이 많아져서 효율적이라는 사설의 평론은 덤이었고.
***
부대로 복귀해 물자 정리를 끝내고 저녁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잭슨이 허둥거리면서 뛰어왔다.
"소대장님! 대대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응? 대대장님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대대장실로 간 나는 생각지 못한 광경과 마주했다.
브랜슨 중령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진한 감색 코트를 입은 두 남자와 조용히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중위 아서 그레이, 명을 받고 출두했......."
"아, 왔나? 그럼 나는 나가볼 테니 얘기 잘하라고."
"예? 무슨─."
영문도 모르는 나를 남겨두고 브랜슨 중령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뭐지, 대체?
"자네가 아서 그레이 중위인가?"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돌아보며 물었다.
척 보기엔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말투 자체는 굉장히 딱딱했다.
"그, 그렇습니다만......?"
"나는 나이젤 마븐이라고 하네. MI6에서 왔지. 자네랑 긴밀히 할 얘기가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