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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2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4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2화

62화 케임브리지에서 생긴 일 (3)

 

 

놈은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나는 녀석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녀석의 몸 위에 올라탔다.

 

주먹을 쥐곤, 그대로 뺨을 강타.

 

빠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먹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녀석이 발버둥 치자, 나는 다시 주먹으로 녀석의 얼굴을 힘껏 때렸다.

 

"카학─!"

 

놈의 입에서 이빨 몇 개가 로켓처럼 튀어나왔다. 입 주위는 피로 뒤범벅되었다.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내가 힘으로 꽉 억누른 탓에 쉽지 않았다.

 

"이 빨갱이 새꺄! 너 때문에 내가 군대에서 얼마나 피 봤는지 알아? 이 X발놈아!"

 

나도 모르게 전생에서의 한이 튀어나왔다.

 

녀석의 입장에선 괜한 화풀이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고, 내가 속한 영국에 적이자 배신자가 아니던가.

이 정도 화풀이는 정상참작이다.

 

무아지경에 빠져 녀석의 얼굴을 사정없이 구타했다.

주먹의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줄줄 흐를 때까지.

 

잠시 후 녀석의 팔다리가 완전히 뻗자 나는 주먹질을 멈추었다.

 

머리가 서서히 식으면서, 그제야 주먹의 통증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더럽게 아프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피부가 까진 탓에 손가락을 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거 나중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 이놈을 어떻게 한담.

 

당장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이대로 경찰서로 끌고 가서 다 불어버려?

 

생각을 해봐도 그 방법 외엔 딱히 방법이 없다. 그럼 이놈을 경찰서까지 옮겨야 하는데.......

 

"억!?"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놈은 내 다리를 걷어차며 나를 넘어뜨렸다.

 

중심을 잃은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뜨뜻한 피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새끼!"

 

킴 필비는 엉망이 된 얼굴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놈의 손에 펜이 들린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대로 지면에 처박힌 펜촉은 파칵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러자 놈은 손으로 내 목을 조르려고 했다.

 

놈의 손이 내 목에 닿기 직전, 나는 있는 힘껏 다리를 올려 녀석의 고간을 그대로 걷어찼다.

 

괴성과 함께 놈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겨우 일어선 나는 다시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MI6 출신 소련 스파이다. 쉽게 이긴다면 그거야말로 코미디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도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와 몸싸움을 벌였다.

 

"잠깐!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요!"

 

한창 치고받고 싸우던 와중에 뒤쪽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순찰 중이던 경관이 우릴 발견하고 멈춰 선 것이다.

 

"젠장!"

 

킴 필비는 X 됐다는 것을 감지하고 일어서서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다리를 걷어찼고, 놈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놈이 내 위로 떨어지려고 하자 몸을 피했다. 그러자 녀석의 뒤통수는 그대로 보도블록에 부딪히고 말았다.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킴 필비의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녀석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손 머리 위로! 그대로 가만히 있어!"

 

경관은 어느새 권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곤 그가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킴 필비의 눈과 코, 입에서 어두운 자줏빛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냐면.......

 

그대로 경찰서로 직행해 유치장에 처박혔다.

 

살다살다 유치장 신세도 져보고, 참 오묘한 기분이었다.

 

1시간 후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선 내 이름과 소속을 밝힌 뒤, 경관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적당히 각색'해 얘기했다.

 

죽은 남자의 이름은 킴 필비이며,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전향'을 권유했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거부하자 갑자기 날 죽이려고 했다는 것까지 전부 다.

 

당연하게도, 처음에 경관들은 내 얘기를 좀처럼 믿질 못했다.

 

나를 조사하던 형사는 처음엔 깔아뭉갤 듯이 노려보다가, 내 얘기를 듣곤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도저히 현실 같지가 않거든.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MI6에 일하고 있는 인텔리가 알고 보니 소련 첩자에, 파티에서 만난 부잣집 도련님에게 '님 간첩 할래요?'하면서 꼬시다가 수틀리니까 살인을 시도했다는 말을 누가 믿겠어.

 

내가 형사여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본다.

이 새끼 일단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게 아닌가 하고.

 

"당신,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뇨?"

 

이 질문을 받았을 땐 조금 찔렸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솔직히 적당히 둘러댄 부분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적어도 킴 필비가 소련 간첩인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이어서 킴 필비가 자신의 친구들도 소련의 지령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중이라고 내게 얘기했다고 진술했다. 왜냐고?

 

킴 필비가 죽어도, 나머지 4명이 같은 일을 저지를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거든.

 

아무튼 경찰들은 내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곤, 자기들끼리 모여서 나를 정신병원에 먼저 보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쑥덕거렸다. 그것도 나를 앞에 두고.

 

하지만 사흘 뒤, 상황은 반전되었다.

 

유치장 문이 열리더니, 어제 나를 조사했던 형사가 들어와 공손한 태도로 내게 사과하면서 풀어주는 것이 아닌가.

 

경찰서 밖에는 아버지가 친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라이 이 새끼야!"

 

그리고 거침없이 들어온 스매시.

코가 부러지지 않은 게 기적이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먼저 내게 말을 했어야지! 이게 얼마나 큰일인데 혼자서 감당하려고 해?!"

 

아버지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나는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빽으로 내가 풀려난 줄 알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셨다.

 

정확히는 가문의 힘을 빌릴까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내가 곧 풀려난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킴 필비가 소련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뜻일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걸 알 수 없었다.

 

내겐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조건 함구하라는 지령이 내려졌을 뿐.

 

***

 

일련의 보고서들을 받아든 처칠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게...... 정말로 사실이란 말인가?"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처칠의 앞으로 배송된 보고서에는 며칠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MI6 요원 킴 필비에 관한 조사 결과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였던 여러 수상한 행적들에 관해서도.

 

보고서 한 장 한 장이 어마무시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처칠은 손의 떨림을 멈추려고 연신 시가를 피워 댔다.

 

세상에...... 어쩌다 이런 일이.......

 

아서 그레이 중위가 킴 필비와 다툼 끝에 그를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까지만 해도, 처칠은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랐다.

 

이어 킴 필비가 자신을 소련의 스파이라고 밝히며 그레이 중위를 포섭하려다가 실패하자 그를 죽이려 하다가 역으로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더더욱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최전방에서 각종 공훈을 세웠던 장교가 무슨 이유로 MI6 요원을 살해했을까?

 

단순한 말다툼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그 둘은 파티에서 한 번 마주친 사이에 불과했으니까.

 

거기다 현장에서 발견된 만년필이 평범한 만년필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다.

 

만년필 안에는 건장한 성인 남성을 5분 이내에 죽임에 이르게 하는 강력한 신경독이 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MI6에서는 이런 물건을 만든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구한 물건인가?

 

거기다 킴 필비가 전에 보였던 수상한 행적들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킴 필비의 아내인 앨리스 프리드.

 

그녀는 필비와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사이로 둘은 1930년대에 결별했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부부 관계였으며 최근까지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었다.

 

수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킴 필비는 대학생 신분일 적에 열렬한 공산주의 추종자였다.

 

하지만 소련을 방문한 뒤부터 반공산주의로 선회했다.

 

생전 킴 필비의 말에 따르면 소련의 현실에 실망했다는 이유에서였지만, 그게 기만이었다면?

 

겉으로는 반공을 외치면서 공산주의자인 여자와 결혼한다는 게 평범한 일이던가?

 

거기다 아서 그레이가 말한, 킴 필비의 동료들은 모두 4명.

 

가이 버지스, 앤서니 블런트, 도널드 매클린, 존 케인크로스.

 

이 모두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으며 서로 절친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다 현재 정보부나 정부의 중요한 요직을 담당하고 있다.

 

죽은 킴 필비와 가이 버지스는 MI6에, 앤서니 블런트는 MI5에, 도널드 매클린은 외무부에, 존 케인크로스는 암호 해독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모두 영국의 중요한 기밀 정보들을 담당하는 부서들이다.

 

이 4명 중 한 명이라도 간첩인 게 사실로 드러날 경우 그 여파가 어마무시한데, 4명 모두 다 간첩이라면.......

 

처칠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머지 4명에 대한 조사도 현재 진행 중인가?"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4명 다 자신은 절대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자기 입으로 자기가 간첩이라고 말하는 간첩은 없지. 사실일 수도 있지만, 현재로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네. 조사를 계속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비서가 나간 후, 처칠은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맙소사. 이게 정말로 현실이라고?

 

아직 사실로 밝혀진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까지 나타난 정황들과 증거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아서 그레이의 말대로 그들이 모두 소련의 간첩이라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소련으로 빼돌렸을까?

 

더욱 더 최악은 소련이 첩자들로부터 넘겨받은 정보를 독일에 전달했을 가능성이었다.

 

반공을 표방한 나치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분명 물과 기름처럼 서로 상극이었지만, 저 둘은 2년 전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어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피에 굶주린 독재자들끼리는 사상이 달라도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이해관계의 일치 때문일까?

 

처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 나라는 폴란드를 양분했으며, 지금도 소련은 나치가 필요로 하는 각종 광물과 식량, 기름을 제공하고 있었다.

 

자원과 식량까지 퍼주고 있는데 거기다 정보 좀 몇 개 얹어서 줘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어쩌면, 지금 나치가 저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도 소련이 건네준 정보들 때문일 수도 있다!

 

충격은 곧 공포로 바뀌었고, 공포는 분노로 바뀌었다.

 

"천벌 받을 빨갱이 새끼들 같으니라고!"

 

처칠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탁자를 내리쳤다.

 

재떨이가 뒤집혀 재가 책상으로 쏟아지고, 서류들이 나폴 거리며 바닥으로 낙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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