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1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1화
61화 케임브리지에서 생긴 일 (2)
밤새 킴 필비에 대한 고민으로 잠을 설친 나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생각에 빠졌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내 얄팍한 두뇌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좀처럼 그럴싸한 계획이 안 떠올랐다.
다른 작품 속 주인공은 길게 고민도 안 하고 잘도 떠올리고 바로 실행했을 텐데.......
하도 오랫동안 가만히 누워있던 탓일까.
갑자기 방안이 닭장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공기도 좀 탁해진 것 같고.
답답한 마음을 환기할 겸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형, 어디 가는 거야?"
거실에서 책을 읽던 빌리가 물었다.
"산책."
"설마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지?"
이번에는 마이클이 의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여전히 의심받고 있구만.
"그럴 리가. 그냥 산책 나가는 거야.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 거니까 그리 알어."
담담히 이야기하고 밖으로 홀로 집 밖으로 나섰다.
2월의 영국은 생각보다 많이 쌀쌀했다.
내가 군 생활을 했던 경기도 양주보다는 따뜻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춥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두껍게 입고 오는 거였는데.
근처 카페나 펍에 들릴까 했지만, 집을 나오면서 지갑도 놓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킴 필비 생각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가장 기본적인 것도 까먹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는 수 없이 나는 칼바람을 몸으로 견뎌내며 주변을 조용히 거닐었다.
이전의 아서 그레이의 기억이 남은 덕분에 분명 처음 와보는 곳임에도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 곳곳에 방공호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고, 벽에는 각종 포스터와 표어로 가득했다.
'등화관제를 지킵시다'부터 '해군은 당신을 원한다', '승리를 위해 전시 국채를 사자!'까지.
그중에서 가장 압권은 바로 이거다.
'무심코 흘린 말, 적의 스파이에게'
마치 내가 여길 지날 것을 알고 붙여둔 것만 같다.
그나저나 포스터 한번 잘 그렸네.
20세기라고 해서 마냥 무시해선 안 되겠어.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한가하게 포스터나 구경하자고 밖에 나온 게 아니었지, 참.
킴 필비를 어떻게 잡느냐도 문제지만, 그자가 간첩이라는 증거를 잡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첩자나 탐정도 아니고, 일개 육군 중위에 가진 거라곤 머리에 든 미래 지식이 전부다.
애초에 그자가 어디에서 사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리고 휴가가 끝나면 다시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
킴 필비 문제에 쓸 시간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깊은 허무함과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머리에 든 게 많으면 뭐 하나 눈앞에 있는 간첩도 잡을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그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계속 마음에 걸린다.
나중에 어떤 짓을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
잡자니 잡을 방법이 없고, 내버려 두자니 찜찜하고.
진퇴양난이 따로 없군.
길을 걷다 보니 경찰서가 눈에 들어왔다.
공습의 여파로 창문이 깨진 건지 나무판자로 창문을 막아놓았다.
경찰서를 보니 갑자기 인내심이 바닥으로 꺼지는 게 느껴진다.
진짜 미친 척하고 경찰서로 가서 말해버려? 킴 필비가 간첩이라고.
사람들이 안 믿어도, 결국 수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전쟁영웅이 한 말이니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라도 조금은 경찰들도 귀담아듣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경찰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러섰다.
애초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증거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데 겨우 심증이나 증언 하나만으로 수사가 시작될 리 없다.
"어?!"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들었던 목소리.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레이 씨 아닙니까? 이거 참 우연이군요!"
***
아침조차 거르고 밖으로 나간 필비는 곧장 그레이 남작가로 향했다.
일단, 주변을 배회하면서 아서 그레이에게 수상한 기색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아서 그레이가 집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그것도 혼자서.
필비는 거리를 둔 채 그를 조용히 미행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표정을 봐선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은 따라가 보는 수밖에.
필비는 아서가 멈추면 멈추고, 걸으면 걸었다.
그렇게 따라다니기를 30분.
아무래도 누군가를 만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왜 밖으로 나온 것일까?
단순히 산책하러?
'아냐. 분명 뭔가 있어.'
아서가 멈춘 곳은 경찰서 앞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경찰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설마......?"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인지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가만히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정말로 내 정체를 알고 있다면 나는 끝장이다.'
경찰서 앞까지 와서 무슨 이유로 망설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필비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걸 느꼈다.
"어?!"
필비는 자연스레 손을 들고 상대를 향해 소리쳤다.
아서는 고개를 돌리더니 그와 눈이 마주치곤 무척 놀랐다.
"그레이 씨 아닙니까? 이거 참 우연이군요!"
***
예상 밖의 일이다.
길을 가다가 마주치다니, 이 무슨 우연이 다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뭐든 간에 당장은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필비는 쾌활한 어조로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잘 구슬려서 집으로 초대를 한다던가, 아니면 이 자의 집으로 간다면 어떨까?
그럼 혹시 있을지 모를 간첩 증거를 얻을지 모른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흥분해선 안 돼. 침착하게.
이자가 눈치라도 챈다면 곤란하니까.
"아서 씨는 뭘 하고 계셨습니까? 저처럼 산책을 나온 겁니까?"
"예, 뭐."
"아, 혹시 누구와 만나려는 데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닌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그냥 혼자서 산책을 나온 거거든요."
그런가요. 필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웃으면서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럼, 제가 추천하는 카페로 가시렵니까? 이 근방에서 홍차 맛이 가장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그러죠."
나는 잠자코 필비의 말에 따랐다.
그가 앞장서서 걷고, 나는 뒤따라갔다.
"꽤 유명한 곳인데, 모르시는가 보군요. 건물 자체는 낡고 아담하지만, 주인장도 친절하고, 가격도 괜찮아서 저 같은 사람들에겐 아주 최적의 장소지요."
걸으면서도 필비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거 참 말 많은 양반이구만.
이쯤 되면 지칠 만도 한데.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군대에 계속 남아계실 건가요?"
음, 그건 아직 생각 못 해 봤는데.
"아직 고민 중이에요."
"그런가요?"
그 뒤로 필비는 내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우린 한참을 걸었고, 어느새 인적이 거의 없는 외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소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갑자기 나온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이번엔 또 뭐야?
무슨 의도를 가지고 내게 저런 질문을 한 것일까?
현 위치에선 필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그가 무슨 의도로 내게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야 뭐......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죠."
"구체적으론?"
"무자비한 독재국가라는 것...... 정도?"
음. 필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조용히 걸었다.
"제가 MI6에서 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
"음, 뭔데요?"
뭐긴 뭐야, 빨갱이 첩자 노릇을 하고 있지.
그런데 갑자기 그걸 나한테 왜 묻는 거야?
......어?
질문의 의도를 눈치채는 찰나, 필비는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내 목을 가격했다.
목의 통증을 느낄 틈도 없이 나는 녀석에게 밀려나 벽에 부딪혔다.
정신을 차리니, 내 목을 겨누고 있는 펜촉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평범한 펜촉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군."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굳어있었다.
"네놈은 정체가 대체 뭐지?"
녀석은 당장이라도 펜촉으로 내 목을 찌를 기세였다.
X 돼도 진짜 제대로 X 됐다.
씨발,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조용히 지낼 걸 그랬다.
괜한 오기로 나섰다가 대낮에 죽을지 모른다니,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묻겠다. 네놈은 정체가 뭐야? 뭔데 나를 알고 있는 거야?"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진짜로 목을 찌를 기세였다. 펜촉과 목 사이의 거리는 이제 종이 한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입을 열었지만 긴장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억지로 쥐어짜듯이 말해야 했다.
"......대영제국 육군 중위."
"아직도 날 속이려고 하는군. 너는 날 알고 있어, 그렇지?"
아씨,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난 필비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했지만, 녀석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이 말은 진짜인데.
필비는 내가 어딘가에 소속된 비밀 요원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젠장, 사실대로 말했는데 믿지 않으면 나보고 어쩌라고.
......아니, 잠깐만.
놈은 내가 육군 장교가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내가 아무리 사실을 말해봤자 놈은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 네 말이 맞아."
필비의 표정이 더욱 매서워졌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떠올랐다.
원하는 대답을 얻었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 조직은 정식 명칭이 없어.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거든. 천하의 소련 간첩도 그 사실까지는 몰랐나 보지?"
필비의 눈동자에서 동요와 혼란의 기색이 일었다.
즉석에서 지어낸 거짓말이 먹힌 것이다!
"침착해, 필비. 나는 널 위협하려는 게 아냐. 그냥 좀 떠본 거지."
"떠본 거라고?"
필비는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지만, 얼굴은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녀석은 펜촉으로 내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녀석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를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최대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도록 나는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예상대로 보통 상대가 아니군. 아주 훌륭해. 역시 우리 보스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갑작스러운 칭찬에 그는 더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칭찬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녀석은 여전히 내 목덜미를 붙잡고 있었지만, 펜촉은 조금 멀어졌다.
"원하는 게 뭐야?"
"난 원하는 게 없어."
"그러면?"
"반응을 보아하니 테스트는 처음인가 보군."
"테스트라고?"
"몰랐나? 그러면,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당신을 무작정 믿을 줄 알았어?"
"네,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지. 물론, 그에 따른 책임도 네 몫이고."
필비의 눈동자는 이제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좋아,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다.
"네 친구들은 이미 다 통과했어. 너만 마지막으로 남았지. 그러고 보니 친구 아니랄까 봐 버지스도 처음엔 너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
가이 버지스.
킴 필비와 함께 소련의 간첩으로 활동했던 케임브리지 5인조의 일원이다.
아는 이름이 나오자 필비는 내 말을 믿기 시작했다.
"크렘린으로부터 새 지령을 전달하겠네. 우선 이거나 놓고 말해. 슬슬 숨쉬기 힘드니까."
그제야 놈은 내 목을 풀고 내게서 물러섰다.
아직 기다려야 한다. 아직.
나는 그가 펜의 뚜껑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펜을 코트 안주머니에 넣은 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내게 물었다.
"그래, 새 지령은 뭐지?"
"아, 그건 바로─."
나는 잽싸게 녀석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녀석의 안면을 정수리로 들이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