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0화
60화 케임브리지에서 생긴 일 (1)
킴 필비.
리하르트 조르게와 더불어 스파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
부유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내가 아는 역사에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당시에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이윽고 소련 측 정보조직과 만나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다.
킴 필비를 포함하여 소련에 포섭된 이들은 모두 5명.
훗날 '케임브리지 5인조'라는 명칭이 붙는 거물 간첩들이 된다.
그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낸 이는 단연 킴 필비였다.
MI6에 들어간 그는 영국이 나치 독일의 암호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해 얻어낸 독일의 정보들을 다시 소련에 전달하는가 하면, 전후엔 MI6와 CIA의 고급 정보들을 소련으로 유출했다.
참고로 미국과 영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놈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 당시, 킴 필비는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과 소련 및 중국과의 확전을 두려워한다는 정보를 소련에 전달했다.
소련은 이 정보를 중국에 알렸고, 미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우려하던 마오쩌둥은 마음을 바꿔 한반도에 개입하기로 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21세기에 들어서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되고 말았으며, 수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김 씨 돼지들의 패악질에 고통받고, 고문과 공개처형이 일상화된 처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내가 인생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군대에 갖다 바친 것에도 이 작자의 간첩질이 제대로 한몫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
한국인이었던 내 입장에선 그야말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작자다.
그런데 그런 작자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킴 필비는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지만,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는 생각뿐이었다.
이놈을 어떻게 하면 좋지?
마음 같아선 당장 대갈통에 총알을 처박아주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선 넘은 짓이다.
대놓고 그런 짓을 했다간 역사를 바꾸기 전에 내 인생을 다시금 폐급 이하 범죄자 신세로 전락시키겠지.
그렇다면 평범하게 정보부나 경찰에 신고하는 방법도 있다.
다만, 내겐 그가 간첩이란 명확한 증거가 없다.
현재 시점에서 킴 필비가 간첩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킴 필비 본인과 그의 빨갱이 동료들, 소련 고위층, 그리고 미래에서 온 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간첩이라고 주장해 봤자 진지하게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
내가 사실은 미래에서 왔고, 저자의 행적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해봤자 누가 믿어주겠어?
정신병자로 의심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따라서, 나는 눈앞의 작자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신고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처구니없지만, 이게 바로 현실이다.
역사적 흐름을 바꾼다는 건, 웬만한 준비와 결단 없이는 가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레이 씨? 아서 그레이 씨"
킴 필비는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미심쩍은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무 내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듣고 계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이 나서 말이죠."
내가 서둘러 둘러대자, 킴 필비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손에 든 마티니를 홀짝인 뒤 지나가는 고용인의 쟁반에 잔을 내려놓았다.
"하하하, 이해합니다. 저도 가끔 한창 일을 하는 도중에 옛 생각에 잠길 때가 있거든요."
"그런가요? 옛 생각이라면 주로 어떤 생각인가요?"
"음, 소련에 있을 때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군요."
필비는 자신이 과거 소련을 방문했을 때의 일들에 대해서 내게 열심히 떠벌이길 시작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필비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반공주의자란 인식을 심기 위해 소련에 대해 실망했다는 말들을 하고 다녔지.
하지만 이 작자의 정체를 아는 내겐 이런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사람도 골라가면서 속여야지.
"소련은 무척 야만적인 곳입니다. 제대로 된 학교도, 병원도 없고, 교회는 모두 파괴되었죠. 정말이지, 사람이 살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딴 나라를 위해서 조국을 배신했냐, 이 새끼야?
아주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하던가.
그가 열심히 떠벌리는 동안,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칵테일을 홀짝였다.
이놈의 얘기는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열심히 떠들어대는 동안 열심히 칵테일을 마셔댔고, 몸에 취기가 도는 게 느껴질 즈음 아버지가 나타났다.
"어이, 아서. 여기, 있었냐?"
아버지도 술을 좀 마신 모양인지 코끝이 붉었고, 발음도 부정확했다.
그는 나와 함께 있던 킴 필비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음? 아, 대화 중이었냐? 이거 실례했구만, 젊은 양반."
"하하, 아닙니다. 마침 대화도 거의 끝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필비는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 성함이?"
"킴 필비라고 합니다, 그레이 남작님."
그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물러가겠다는 시늉을 했다.
킴 필비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참, 저 친구. 뭐 하는 양반이냐?"
"아, MI6에서 일한답니다."
그리고 소련 간첩이기도 하지요-라고 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잠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아버지의 두 눈은 놀라움과 감탄으로 빛나고 있었다.
"MI6라고? 대단한 친구로구만!"
젠장. 술김에 그만 말이 헛나오고 말았다.
킴 필비가 MI6에서 일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MI6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MI6에서 일한다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다.
게다가 킴 필비는 아직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4, 5m 정도로, 이쪽에서 하는 얘기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다.
설마...... 들었으려나?
하지만 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듣진 않았나 보군.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먼저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돌아오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킴 필비.
그 작자를 어떻게 해야 골로 보낼 수 있을까?
전에도 얘기했듯이, 그가 간첩이라는 확실한 증거-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라곤 머리에 든 지식뿐이니까-가 없는 이상 고발할 수도 없다.
간첩이란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증거가 없어서 그냥 냅둬야 한다니.
웃기는 현실이다.
집안의 연줄을 이용해 뒤를 밟는 방법은...... 힘들겠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뒷조사하는 걸 아버지가 퍽이나 들어주겠다.
이젠 과대망상증까지 걸렸냐고 욕이나 처먹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전의 아서가 만들어놓은 평판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튼,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좀처럼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못 본 셈 치는 게 나으려나.'
그냥 저자를 그대로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오히려 내버려 뒀다가 원래 역사 이상으로 깽판을 치는 바람에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저놈이 뭘 하던 간에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아주 환장할 노릇이다.
***
파티에서 돌아온 킴 필비는 흥분과 초조함으로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어째서 저자가 내가 MI6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아서 그레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레이 남작가의 장남이라는 것과 프랑스 전장에서 거둔 전과로 총리와 대면하고 뉴스영화에 출현한 전쟁영웅으로 최근 유명세가 생긴 인물이라는 것 정도다.
애초에 그와 만난 것도 우연의 결과다.
지역 유지들이 모인다는 걸 알고 참석했지만, 거기서 전쟁영웅을 만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물론 처음에 좀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
전쟁영웅으로 알려지긴 했으나 실제 본 그는 평범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편하게 살아온 부잣집 도련님, 딱 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필비는 이상한 기운을 강하게 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아서 그레이는 겉으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형식적인 맞장구만 치면서 술을 마실 뿐, 전혀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늘 허공을 향해 있었고, 웃긴 이야기를 해도 그는 미동도 없었다.
단순히 흥미가 없거나, 파티에 지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필비는 알고 있었다.
그랬다면 어떻게든 자신과의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렸을 테니까. 그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내였고, 설사 대외 이미지를 신경 쓴다고 해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오늘 처음 본 남이나 다름없으니까.
노련한 스파이인 그는 아서라는 남자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아버지의 질문에 필비가 MI6에 일한다고 말했다.
넘겨짚은 것도 아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말이다.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기 힘들었다.
'내가 말한 적이 있었나.......'
무엇보다 MI6 요원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받는다.
필비는 자신이 MI6라고 아서에게 밝힌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실수로 신분을 드러낼 정도로 허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위장 신분인 잡지사 편집장이란 신분도 전혀 진짜 신분을 알아차릴 요소도 없었다. 그만큼 MI6 요원의 위장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게 아니다.
술에 취해서 한 이야기 중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단서를 잡아냈을지 몰라도...... 왜 많고 많은 것 중에 MI6가 나왔을까?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아무튼, 실수든 고의든 그의 말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점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스파이의 직감이 필비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서 그레이란 남자는 아주 수상하다고.
필비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방안을 서성거렸다.
소련의 스파이라는 사실이 탄로 나면 그는 목숨이 위험했다.
현재 이 나라 정부는 소련을 나치만큼이나 위험한 적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그 잠재적 적국에 협력하는 스파이를 잡았다?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못해도 그 즉시 즉결처분이고, 설사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고 해도 철저히 정보를 빼앗기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제거될 게 분명하다.
'절대 들켜서는 안 돼.'
스파이의 세계에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 원칙이 있다. 정체를 들키지 말 것.
정체를 들킨 순간부터, 스파이는 스파이가 아니게 된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보다 스파이에게 중요한 일은 없다.
본래 정보를 빼낼 때는 되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살고 죽고 문제가 걸렸으니까.
고민하던 필비는 그레이 남작가의 저택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걸어서 10분 거리.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