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9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9화
59화 그레이 남작가(男爵家) (2)
"세상에, 이게 누구야!"
해가 뜨기 무섭게 나를 반기는 사람이 있다.
"맙소사, 군대에 가더니 애가 얼굴이 반쪽이 됐네! 거기 음식이 입맛에 안 맞니?"
"하하, 뭐......."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건 팩트긴 합니다만.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면서 나를 반기는 이 사람의 정체는 바로 '아서 그레이의 친모', 바버라 그레이 여사.
과묵한 남편과 달리, 바버라 여사는 아들을 매우 끔찍하게 아끼는 조금 호들갑이 심하고 말이 많은 여성이었다.
"참! 전에 네가 영화에 나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란 줄 아니? 우린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언젠가 이렇게 큰 인물이 될 줄 알았어!"
"가,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어째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은데."
"진짜 군대 가더니 사람이 변했네, 변했어."
"처칠이랑 만났다면서? 진짜야?"
여기 이렇게 쪼아대는 녀석들은 바로 내 동생들이다.
이름이 샬럿, 마이클, 그리고...... 빌이었나? 아, 그래, 빌리였지.
샬럿과 마이클은 나와 나이 차이가 3살밖에 되지 않고, 빌리는 이제 막 11살이다.
전생에 형제라곤 형 한 명뿐이었던 내게 갑자기 동생이 그것도 3명이나 생겨서 조금 당황스럽다.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다. 어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나 한 번 들어보자."
"어...... 지금요?"
'어머니'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럼. 안 될 게 있니? 아직 저녁까지는 시간이 많이 있는데."
"맞아, 맞아! 나도 들을래!"
결국, 나는 꼼짝없이 가족들의 손에 붙잡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줘야만 했다.
대충 내가 이곳에 눈을 뜬 날부터 프랑스에서 독일군과 싸우고, 총리와 만나 사진을 찍고, 다시 북아프리카 전장에서 프랑스군과 치고받은 일까지 전부 다.
얘기하는 동안 가족들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1941년의 영국에선 군대 얘기가 어느 정도 먹히는구나 싶었다.
한 세기 뒤인 한국에선 사람들이 군대 얘기라면 학을 떼던데.
"......해서 그렇게 된 거죠."
얘기가 끝났을 땐 벌써 오후 2시였다.
아니, 한 일이라곤 그냥 얘기밖에 안 했는데 뭔 놈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
"엄청난걸! 마치 소설 같구나, 애야!"
"그 얘기, 전부 다 사실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사실 같지 않은데......."
"몇 개는 상상으로 지어낸 것일지도 몰라."
어머니는 그저 감탄만 하며 손뼉을 치기 바빴다.
반면, 샬럿과 마이클은 내 얘기가 도무지 실화 같지 않다며 주작(.......)을 의심했고, 빌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해. 몇 개는 구라지?"
"군대 가더니 거짓말만 늘어서 왔어."
아니, 진짠데.
애초에 나는 원래 니들 친오빠도 아니었어.
사실 훨씬 미래에 태어난 평범한 군필 대학생이란 말이다.
자다가 난데없이 니들 오빠가 된 것도 황당한데, 문제는 그게 실화란 거다.
말해봤자 믿지 않겠지만, 그전에 정신병 걸린 게 아니냐고 의심하겠지.
"그건 그렇고, 확실히 군대가 사람을 만드는구나. 예전에는 가족끼리 차 마시는 것도 꺼리고 밖에 쏘다니기만 했는데."
"맞아. 아버지가 오라버니한테 나 반만 닮으라고 맨날 말씀하셨지."
"용케 군대에선 별로 사고 안 쳤나 봐."
"하하하......."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 진짜 오라버니 맞아? 다른 사람 아니고?"
"크흡!"
샬럿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는 마시던 홍차를 그만 내뿜고 말았다.
코로 튀어나온 홍차 방울을 뒤집어쓴 샬럿은 오만상을 쓰며 서둘러 손수건으로 홍차를 닦아냈다.
"야, 너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게 가능한 일이냐?"
"생각 좀 해봐. 아무리 군대 가면 철든다고 하지만 180도 바뀌었잖아. 넌 오라버니가 그럴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건 맞는데......."
"허허......."
어이, 아서.
참 눈치 빠른 동생들을 뒀구만.
하지만 아무리 눈치가 좋은 애들이라 하더라도, 진짜로 내가 자기들 친오빠가 아니란 사실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정상인이라면 좀처럼 하기 힘든 생각이긴 하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누가 하룻밤 만에 사람의 영혼이 바뀌리라고 생각하겠느냐고.
그냥 군대 가더니 정신 좀 차렸다고 생각하지.
문제는 그 어처구니없는 가정이 내 경우엔 진짜라는 거지만.
"너희들도 그만 둬라. 뒤늦게 철들었으니 다행이지, 사람이 바뀌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니. 듣는 사람 빈정 상하게."
어머니가 나서서 점잖게 한마디 하자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동생들도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우리 아서가 전에 좀...... 되먹지 못한 짓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엿하게 잘 자라주었잖니. 너무 과거를 들먹이는 것도 안 좋단다."
"저, 어머니? 전 괜찮습니다."
빈정 상한 게 아니라, 그냥 놀랐을 뿐이니까요.
"거봐. 저, 저 말투! 진짜 오라버니가 아니라니까!"
"확실히! 일리 있어!"
"너희들 진짜!"
***
그렇게 평화로웠던 오후가 지나고,
해가 저물었다.
"준비 다 끝났느냐?"
"아, 예!"
"그럼 어서 나와라. 시간 늦겠다."
"당신도 참. 시간은 아직 충분하잖아요."
"원래 부지런한 사람은 시간이 충분하다고 늦장 부리지 않는 법이오."
채비를 끝내고 나온 나는 부모님과 함께 대기하던 차에 올라탔다.
샬럿과 마이클, 빌리는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집에 남았다.
문이 닫히자, 운전기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떨리냐?"
"예? 아뇨."
예전 같았다면 조금 떨리고 흥분도 되고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냥 그저 그런 느낌.
전쟁터에서 총질도 해보고, 총리도 만나본 마당에 떨리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번만큼은 부디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무, 물론이죠."
"그만 해요. 애 무안하게시리."
"전과가 있으니 하는 말이오. 내가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하겠소."
등화관제 대문에 모든 집들이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두꺼운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놓았다.
가로등조차 불이 들어오지 않아 거리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그런데도 노년의 운전기사는 헤드라이트 불빛만 가지고도 차를 능숙하게 운전했다.
"다 왔습니다, 주인님."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운전기사는 내려서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저택이었는데, 입구에 정장을 차려입은 건장한 성인 남성 여러 명이 서 있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공손한 말투로 초대장을 보여줄 걸 요청했다.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보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찰스 그레이 남작님."
"고맙네."
문이 열리자, 황금색 불빛이 쏟아지며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바이올린 소리가 귀에 닿았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수십 명의 남녀가 모여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영화에서나 보던 상류층들의 파티구나.......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취해 머뭇거리는 나와 달리, 부모님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사람들 사이에 끼여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 그레이 남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도 반갑소. 그동안 별일 없으셨소?"
"여사님도 오셨군요. 갈수록 미모가 더욱 빛을 발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너무 과한 칭찬은 심장에 좋지 않아요."
"이쪽은, 내 아들이오. 아서 그레이. 현재 육군에서 중위로 복무 중이라오."
"아, 아드님이십니까?"
"반갑습니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상대방이 내민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번 파티는 케임브리지의 여러 유명 인사들과 거물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연 행사였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 모두 방귀 좀 뀌는 집안 출신들로, 그래서인지 얼굴에서 부티가 줄줄 흘렀다.
"그 유명한 아서 그레이 중위로군. 자네의 활약상은 잘 들었네. 굉장하더군."
"감사합니다."
"총리와 만나서 사진도 찍었다면서? 정말 대단한 친구야! 자네 같은 용감한 장교들 덕분에 이 나라가 독일에 맞설 수 있는 거겠지."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파티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간단했다.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만나 덕담을 나누고, 악수하고, 다시 다른 사람들과 만나 인사하는 것.
"아들아, 인사하거라. 여기 이분이 바로 전에 얘기했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허허허. 나도 만나서 반갑다네."
아버지는 발이 뭐가 그렇게 넓은지 거의 분 단위로 새로운 사람에게 나를 소개했고,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조금 전에 들었던 말과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인사만 하며 파티장을 돌아다니길 2시간.
몸도 마음도 지쳐갈 즈음에서야 기나긴 신고식이 끝났다.
"힘드냐?"
"아닙니다."
"아니긴 뭘. 얼굴에 살려달라고 떡 쓰여있구만."
"......조금 지치긴 해요."
"군대도 간 놈이, 그것도 장교라는 놈이 이것조차 힘들다고 하면 어쩌냐?"
"......."
내가 입을 다물자,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내 등을 소리 나게 때렸다.
"아무튼 고생 좀 했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구만. 이제 구석에 가서 조용히 쉬고 있어. 아는 척하는 사람 있으면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고."
"예엡."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칵테일 한 잔을 들고 적당히 구석진 곳에 가서 앉았다.
이 칵테일, 이름은 모르겠는데 맛은 제법 괜찮네?
레몬향이 나는데 정작 맛은 자몽에이드에 위스키를 탄 듯한 맛이다.
배가 출출한 탓에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집어먹었는데, 생각보다 역한 맛에 그만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건 또 뭐야?
크래커에 삶은 계란과 올리브를 올린 놈인데, 맛은 식초에 푹 담근 것처럼 엄청난 신맛을 자랑했다.
뒤늦게 나는 내가 먹은 음식이 그 유명한 피클드 에그(Pickled Egg)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삶은 계란을 오랫동안 식초에 절여서 만들어낸 요리인데, 식초에 오래 절일수록 신맛이 올라간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삶은 계란처럼 보여서 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넌 탈락이야, 탈락.
달디단 스콘으로 신맛에 오염된 혀를 중화시키고 있는데, 웬 남자와 그만 어깨가 부딪히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먼저 다가와서 부딪힌걸요."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가르마를 탄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나이는...... 한 서른 정도 되었으려나?
그런데 이상하게 이 남자, 왠지 낯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본 거 같은 기억이 있는데.......
"오, 당신이 그 유명한 아서 그레이 중위로군요! 이거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자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가 웃으며 손을 건네자, 나도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함이......?"
"이런, 제 소개를 깜빡했군요."
남자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이름은 킴 필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