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7화
57화 발명은 사소한 발견에서 시작된다
"중대, 일제 사격!"
일렬로 늘어선 12대의 전차들이 거의 동시에 주포에 불을 당겼다.
요란한 포성이 들리고, 적의 벙커는 침묵......하지 않았다.
역시 2파운더로는 저 두꺼운 콘크리트 벙커에 처박힌 적들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었다.
더 크고, 더 강한 포라면 몰라도 이런 이쑤시개 같은 주포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못해도 75mm는 되야지, 겨우 40mm가 뭐냐고 대체!
하지만 무어 대위는 언제까지고 같은 위치에서 포격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중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고, 전차들 뒤편에서 대기하던 보병들도 함께 돌격했다.
"전진!"
"앞으로!"
장교들도 호루라기를 불며 병사들의 선두에서 돌격했다.
총성이 울려도, 뜀박질을 멈추거나 몸을 움츠리는 병사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멧돼지처럼 함성을 지르며 돌격할 뿐.
"잭슨, 11시 방향과 12시 방향 사이에 적 기관총 진지다. 토마스, 유탄 장전!"
"장전 완료!"
"조준 완료!"
"쏘아!"
펑!
"목표 제압!"
"좋아. 다음 목표로 간──."
쾅 소리가 나더니 별안간 뿌연 연기가 시야를 채웠다.
전차 궤도 아래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쳇, 지뢰다."
누가 뭐래도 이건 지뢰였다.
폭발음이 큰 걸로 봐선 대전차지뢰로군.
나는 할 수 없이 잭슨에게 주포를 최대한 아래로 내리게 한 뒤, 각자 무기와 소지품을 챙겨 밖으로 나오라고 일렀다.
"으, 추워."
전차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한기가 엄습했다.
전차 내부도 그렇게 따뜻한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바람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맨몸으로 칼날 같은 찬바람을 묵묵히 견뎌내는 수밖에.
우리 전차 외에도 몇 대의 전차들이 추가로 지뢰를 밟았고, 지뢰를 밟은 전차의 전차병들은 밖으로 나와 전차 뒤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전차와 보병들은 달리기 바빴다.
전차들이 전진하면서 추위로 굳어진 땅에 애벌레 모양의 궤도 자국을 냈고, 그 위로 새하얀 눈송이들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온 세상을 순백의 크림색으로 물들였다.
***
"모두 잘했네. 아주 좋았어."
브랜슨 중령은 만족한 듯 박수를 쳤고, 우리는 훈련이 별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난 것에 자축하며 서로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번 훈련은 육군의 높으신 분들이 참관하는 대규모 훈련인지라 브랜슨 중령은 각별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훈련 자체는 무난하게 마무리되었고, 이제 사후강평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저나 왜 지뢰를 밟으면 바로 '격파 판정'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KCTC 훈련에서도 전차가 지뢰를 밟았다는 이유로 바로 격파 판정이 뜨지 않는데.
훈련 직전 나는 통제관들에게 지뢰를 밟았다고 전차가 바로 격파되지 않으며, 기동을 못하는 대신 고정 포탑으로 아군 전차들과 보병들을 지원할 수 있으니 격파 판정은 부당하다고 건의했지만, 통제관들은 내 의견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지켜진 훈련 규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애꿏은 전차들을 그냥 죽여버리다니, 해도해도 참 너무하는구만.
무어 대위와 브랜슨 중령도 내 의견에 동조하긴 했지만 저들도 이번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훈련장에선 계급에 상관없이 통제관들이 왕이니까.
"격파 판정만 아니었어도 조금 더 실전 같은 훈련이 가능했을텐데 말이죠."
"뭐, 어쩌겠냐? 여기선 쟤네들 말을 들어야지. 그래도 모의전투 자체는 우리가 이겼으니,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무어 대위는 그래도 전투에서 이겼으니 나름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만약 이 격파 판정들로 인해 전투에서 패했다면 정반대의 말이 나왔겠지만, 그 말대로 일단은 우리가 이겼으니 굳이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기도 했다.
아무튼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니 당번병들이 홍차를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느긋하게 잡담이나 나누거나 담배를 피우던 장교들이 모두 쟁반에 몰려들어 홍차를 한 잔씩 가져갔다.
이 사람들, 누가 영국인들 아니랄까봐 정말로 홍차에 진심이구만.
"자, 중위님도 한 잔 하시죠."
"고맙습니다, 상사."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내 입맛에는 홍차가 별로 맞지 않다.
못 먹을 맛은 아닌데, 이 오묘한 단맛과 쓴맛의 조화가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단 말이지. 거기다 우유까지 들어가서 그렇잖아도 미묘한 맛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한국에서 마시던 믹스커피가 그립다.
그나마 이 시대에 믹스커피는 없어도, 콜라는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음, 맛이 예전과 다른 것 같은데......."
홍차를 홀짝이던 무어 대위는 뭔가 성미에 맞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게이츠 상사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맛이 전보다 더 연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확실히 전에 먹었던 것보다 맛이 조금 연하다.
홍차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나조차 느낄 수 있는 정도인데, 홍차라면 환장하는 이 시대 트루 영국인들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거기다가 향도 예전 같지 않군. 옛날에 마시던 것들은 멀리서도 향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진했는데, 요즘 것들은 코를 잔에 대고 맡아도 그렇게 강하게 와닿지가 않네."
그 정도냐.
단순히 당번병들이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맛이 연해진 것일수도 있지만, 전시라서 물자가 부족해진 것일수도 있다.
원 역사에서도 영국은 독일 해군의 유보트들 때문에 물자공급이 곤란해졌다.
다행히 미국의 랜드리스 덕분에 1차대전 당시의 독일과 달리 기아에 시달리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커피나 홍차와 초콜릿 같은 사치품들은 더더욱 귀해져서 일반 시민들이나 병사들은 한동안 구경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홍차라면 환장하는 영국인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말이겠지만, 한동안 이러한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당연히 홍차의 질도 점점 더 나빠지겠지.
어쩌면 지금 마시는 이 홍차가 '마지막으로 마시는, 그나마 제대로 된 홍차'일지도 모른다.
"모두 차렷!"
장군님들께서 행차하시자, 이제까지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장교들은 모두 일어서서 기립 자세를 취했다.
"아아, 그럴 필요 없네. 편히들 있으라고."
지휘봉을 든 인자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아저씨가 손을 휘휘 저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기는커녕 숨 쉬는 것조차 벅찰 정도다.
왜냐고? 저 아저씨의 계급장을 보라.
자그마치 원수다, 원수!
"이번 훈련은 잘 봤네. 다들 열심히 하더군. 너무 생생해서 여기가 전쟁터인 줄 알았네, 허허."
"감사합니다, 각하!!!"
원수 나리의 한마디에 우리 같은 미천한 무지렁뱅이들은 벌벌 떨며 목청껏 소리를 쳤다.
참고로 저 원수는 나도 아는 사람이다.
이름은 앨런 브룩.
알렉산더나 몽고메리, 해리스 같은 쟁쟁한 인물들과 비교하면 그리 유명한 인물이 아니지만, 저 사람이 남긴 업적 자체로만 따지면 몽고메리나 해리스는 가뿐하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다이나모 작전을 구상하고(비록 여기선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이탈리아 침공 작전 수립, 거기다가 무명이나 다름없던 몽고메리를 영국 제8군 사령관으로 적극 추천한 이도 바로 앨런 브룩이다.
얼핏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어마어마한 전공들이다.
정작 브룩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사령관에 취임한 몽고메리가 훗날 인지도에선 브룩을 압살해버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군.
브룩 원수는 일렬로 도열한 우리 앞을 거닐며 장교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했다.
그리고 몇 마디 질문을 던졌는데, 대부분이 이름이 뭐냐, 나이가 몇이냐, 군대에 몸담은 지 얼마나 되었냐 같은 사소하고 간단한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내 차례에 와서는 달랐다.
"아, 자네가 바로 아서 그레이 중위로군?"
"예, 그렇습니다!"
어느새 내 앞에 당도한 브룩 원수는 나를 알아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라스에서 자네가 거둔 전공은 나도 들었네. 거기다 자네가 나온 영화도 봤지. 실제로 보니 더 늠름하게 생겼구만."
"감사합니다!"
여기서 끝내고 빨리 다음 사람한테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영감님께선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셨다.
"총리께 진언해 유탄을 보급하자고 한 것도 자네의 의견이었다며? 아주 훌륭해. 나 같은 늙은이들도 감히 생각 못 한 것을 자네 같은 젊은 중위가 생각해내다니, 장래가 아주 우수한 친구야."
나는 지난번 처칠과의 만남에서 유탄 보급을 건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닙니다, 각하.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 생각 자체가 대단하다는 걸세. 참, 자네를 만나고 하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몇 개 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각하."
하지 마세요, 제발.
심장마비가 올 것 같단 말이야.
"자네가 보기엔, 우리 군의 마틸다 전차의 단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생각했던 것보다 쉬운 질문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화력과 기동성입니다."
"기동성이야 원래 보병전차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네. 화력은 왜 단점인지 설명할 수 있나?"
"예, 2파운더의 관통력은 뛰어난 편이나 포탄의 크기 자체가 작기 때문에 산개한 상태에서 돌격해오는 적 보병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의 샤르 B1이나 독일군의 4호 전차의 경우, 2파운더보다 대구경인 75mm 주포를 장착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보병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 전차가 적 보병 제압이라는 면에서 봤을 땐 적보다 확실한 열세에 있습니다."
"완벽해. 정확히 짚었구만!"
브룩은 내 대답이 아주 만족스러운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흘끗 주변을 쳐다보니, 브랜슨 중령과 무어 대위, 게이츠 상사 등 모두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훈련 내내 그 생각뿐이었네. 2파운더로는 콘크리트 벙커 같은 강화된 적 진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없지. 화력을 늘릴 방법이 필요한데, 무슨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게. 아무나 좋아."
대열 중간에 위치한 한 중위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브룩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음, 말해보게."
"예, 각하. 우선, 기존의 포탑에 2파운더 대신 대구경의 화포를 탑재하는 것입니다."
"나쁘지 않은 발상이군. 하지만 포탑 자체의 한계 때문에 탑재가 불가능하다면, 그땐 어떻게 하겠나?"
브룩의 물음에 그 장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장교가 손을 들고 말했다.
"신형 포탑을 개발해서 차체에 결합한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군. 문제는 시간이 제법 걸릴 텐데, 그럴 바엔 차라리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의 시선은 다시 내게로 향했다.
원수는 눈을 반짝이며 시험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레이 중위?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무슨 방법이 있을 것 같나?"
아씨, 뭐라고 말해야 하지?
여기서 우물거렸다간 조금 전에 쌓았던 점수를 다 까먹게 될 텐데.
안 그래도 대대장부터 중대의 모든 장교가 나를 기대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중이다.
거기다가 눈앞의 원수까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고.
엄청 부담된다, 엄청.
무슨 좋은 발상이...... 그래! 그게 있었지.
"폭뢰를 사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폭뢰라면, 해군에서 쓰는 그 폭뢰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각하."
폭뢰를 사용하자는 말에 브룩 원수 뒤를 졸졸 따라오던 높은 분들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해군에서 잠수함 잡는데 쓰는 폭뢰를 전차에 사용하자니, 이게 뭔 개소리냐고 생각하겠지.
얼핏 들으면 개소리처럼 들리지만, 놀랍게도 2차대전 당시 마틸다 전차에 폭뢰를 장착한 물건은 실제로 개발되었다!
2차대전 말기, 일본군의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호주군이 개발한 놈으로, 마틸다의 후면에 대잠폭뢰인 헤지호그 발사대를 장착한 녀석이다.
하지만 실전 투입 전에 일본이 항복해버려서 그대로 창고로 직행한 비운의 무기이기도 하지.
일본이 항복하지 않아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다면 전장에서 꽤 활약했을 게 틀림없다.
그런 괴물을 일찍 개발해서 전장에 투입한다면?
저 간악한 나치들에게 불벼락을 선사하는 게 가능해진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브룩 원수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발사봉식 박격포인 스피곳 박격포(Spigot Mortar)를 전차 후면에 달아 적 벙커까지 다가간 뒤 폭뢰를 발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처음엔 날 반쯤 미친놈처럼 쳐다보던 장군들도, 내 설명을 듣자 서서히 얼굴이 변했다.
그들의 눈에서 독기가 빠지는 것을 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중에 뭔 쓸데없는 소리를 했냐고 욕먹을 일은 없겠군.
"아주 기발한 발상이군. 훌륭해. 자네 설명이 무척 자세해서 이미 아군에게 그런 무기가 있는 줄 착각했을 정도라네."
"과찬이십니다, 각하."
지금은 당연히 없지만, 훗날 만들어질 물건이거든요.
내 발상이 아주 그럴듯했는지 그는 참모들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내 생각으론 매우 괜찮은 발상이라고 생각되네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각하."
"현실적인가를 떠나서 발상 자체는 훌륭합니다."
"한 번 시도해볼 만한 무기입니다."
원수와 참모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누가 내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대대 간부들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