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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5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1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5화

55화 어둠의 시간 (5)

 

 

1시간 뒤.

 

"끝났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걸 보면, 끝난 게 아닐까?"

"그렇겠지?"

 

10분 넘도록 폭음도, 진동도 느껴지지 않자 우리는 지상이 안전해졌다고 판단하고 밖으로 나갔다.

 

방공호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습 종료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공습이 확실하게 끝난 것인지 긴가민가하던 우리는 이제야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보통 영화나 소설 같은데선 방공호 밖으로 나간 사람들의 앞에 으레 폐허가 펼쳐져 있기 마련이지만...... 천만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막사와 식당 모두 멀쩡했다.

기껏해야 창문에 살짝 금이 간 정도?

 

폭격이 부대가 아닌 도심 쪽에 주로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옥스퍼드 시내에는 독일군이 투하한 폭탄으로 인해 다소 피해가 있었지만,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독일군의 공습이 런던을 비롯한 남부 도시들에 집중된 탓에 런던보다 북쪽에 위치한 도시들의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진짜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자, 막사의 모든 이들은 동시에 눈을 떴다.

 

"공습이다, 공습!"

"하필이면 지금!"

"문 열어!"

 

첫 공습 이후, 독일군은 2, 3일에 한 번 꼴로 공습을 감행해왔다.

 

루프트바페(Luftwaffe)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는데, 어떤 때는 대낮에 어떤 때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공습을 가해왔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방공호로 부리나케 뛰어가야만 했다.

 

그나마 낮이면 상관이 없는데, 자고 있는 새벽에 공습 경보가 울리면 반사적으로 입에서 욕부터 튀어나왔다.

 

수면을 방해받는 것보다 빡치는 일은 없는 법이거든.

게다가 하필 푹 자고 있는 순간을 꼭 노려서 공습이 오는 것 같고.

 

공습으로 잠을 설친 우리는 한낮이 되어서도 수면 부족으로 인해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걸어 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1941년을 공습과 함께 맞이했다.

너무나도 최악의 신년 맞이였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얘들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소대장님."

 

소대원들과 사이좋게 덕담을 나누며 공습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신세라.

 

새해의 시작으론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어쩌겠나. 저 망할 제리 새끼들이 툭하면 폭탄을 던져대는데.

 

설마 이걸 새해 인사라고 던지는 건 아니겠지. 이 빌어먹을 제리놈들.

 

공습이 끝나고, 밖으로 나간 우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매캐한 화약향을 맡으며 1941년을 시작했다.

 

"소대장님, 저건......."

"음, X됐군."

 

안 좋은 일은 연달아 터진다더니, 이제까지 공습에도 무사했던 막사가 끝내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우리가 거주하던 4층짜리 막사는 루프트바페가 투하한 폭탄을 맞아 불타오르고 있었다.

 

소방호스와 양동이로 물을 퍼 날라 화재를 진압했지만, 그런다고 이미 숨을 거둔 막사가 되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막사가 무너졌으니, 이제 어디서 자냐고?

 

걱정 마시길, 이런 때를 대비한 군용 텐트(24인용)가 수십 개나 있습니다!

 

......X발.

 

"어째 올해는 작년보다 더 고달플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중위님."

"그러게 말입니다, 상사."

 

게이츠 상사도 화재로 시꺼멓게 타버린 막사를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새해 첫날부터 막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텐트 생활이라. 이보다 더 최악이 어디 있을까 싶다.

 

"전에 마누라 몰래 경마장 갔다가 걸렸을 때보다 더 착잡합니다. 허어......."

"......."

 

아니, 그거랑 비교할 일이야?

 

***

 

함부르크 공습 이후, 독일은 보복으로 영국 본토 공습을 감행했다.

 

수도 런던은 물론, 포츠머스, 캔터베리, 콜체스터, 옥스퍼드 등 이름 좀 알려진 저명한 도시들도 공습을 당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이들 도시들의 피해는 '그리 큰 수준'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독일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 국민들의 여론에도 서서히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독일과의 강화, 전쟁 중지를 외치는 시민들의 수는 많고 많았지만, 공습으로 집이나 가족을 잃곤 전향하여 복수를 외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되려 공습이 잦아질수록 여론은 반전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제리들의 공습으로 우리 아버지가 죽었는데, 히틀러와 평화협상을 하자고? 너 이 새끼 나치스지?"

"히틀러가 니 애미 따먹어도 평화 같은 소리가 나오냐?"

"나치의 똘마니 같은 새끼들!"

"반전을 외치는 놈들은 나치의 첩자들이다!"

"나치를 몰아내자!"

 

분노로 눈이 뒤집힌 사람들에게, '나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자는 것일 뿐', '진작에 평화협상 맺었으면 공습도 없었을 일'이란 말은 통하지 않았다.

 

반전파가 시위를 벌이면 주전파가 떼를 지어 몰려가서 시위대를 두들겨 패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이전처럼 반전파는 대놓고 반전을 외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여론의 극적인 변화를 반기는 이가 있었다.

 

"국민들도 드디어 내 뜻을 알아주는구만! 아주 좋았어!"

 

처칠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비난의 화살들이 반전파를 향하기 시작하자 만면에 웃음을 띄었다.

 

처칠의 반대파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국민들이 죽어나가는데, 정작 총리라는 인간이 전쟁 계속할 수 있다고 기뻐하냐'고 치를 떨었겠지만, 그들은 이곳에 없었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한편, 독일이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되레 그 반대였다.

 

총통의 지시에 따라 영국 본토 공습에 나섰지만, 영국의 전쟁 수행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생각 이하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영국은 독일의 공습에 대비해 레이더 기지 등 만반의 준비를 해둔 상태였고, 레이더에 독일군의 폭격기가 포착되는 즉시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가 벌 떼처럼 출격했다.

 

공습이 계속될수록 폭격기들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조종사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공격하면 할수록 점점 피해가 커지는 건 공격에 나선 독일 쪽이었다.

 

"공습을 중지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히틀러의 매서운 눈빛에 괴링은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얼마나 욕을 퍼먹든 간에 할 말은 해야만 했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어째선가? 설명해보게."

"예, 총통 각하. 저희 용감한 루프트바페는 연일 출격을 감행하여 영국에게 타격을 주고 있지만, 손실이 너무 극심합니다. 폭격기들의 손실도 문제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조종사들입니다. 영국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조종사들이 격추되면, 9할은 전사하거나 영국 놈들에게 포로로 잡히지요. 폭격기야 공장에서 생산하면 되지만, 실력 있는 조종사들은 공장에서 무기를 찍어내듯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초짜 조종사라고 해도, 양성에는 족히 몇 년은 걸립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조종사들의 손실이 늘어만 가면......."

"그만."

 

히틀러는 알겠다는 듯 손을 뻗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래, 한 번 잃은 조종사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지."

"그렇습니다."

 

히틀러는 생각에 잠겼다.

괴링의 말대로 폭격기야 격추당해도 공장에서 새로 만들면 그만이지만 조종사들은 그렇지 않다.

 

실력은 고사하고, 비행기 조종간이라도 잡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

겨우 몇 시간 배운 것으론 비행기라는 세밀하고 복잡한 기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다.

 

겨우 조종을 할 수 있게 된다하더라도 이젠 이걸로 공중에서 적과 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하기 위해선 다시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자연스레 조종사 양성에는 많은 시간과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다. 굶어가면서 훈련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거기다가 입힐 옷이랑 잠을 잘 막사도 필요하고).

 

실력 있는 조종사 한 명의 가치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히틀러는 모르지 않았다.

 

하늘의 별이 되어 사라져가는 조종사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독일의 영공을 지킬 조종사들은 줄어든다.

 

거기다가 이번 여름에 있을 소련과의 전쟁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랑스런 대독일의 육군이 핀란드 같은 소국을 상대로 낑낑거리는 슬라브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전쟁은 육군의 힘만으로는 종결지을 수가 없다.

 

현대전에서 공군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공군이 지금 타격을 입어버리면 소련과의 전쟁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건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우리 도시들을 폭격하는 영국인들은 어떻게 할 건가? 우리들이 공습을 멈춘다고 해도 그치들이 공습을 멈출 것 같나?"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영국인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 영공에 나타나면 격추시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영국인들도 손실이 커지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처럼 그렇게 쉬울까?

히틀러는 의문이 먼저 들었지만, 그렇다고 괴링의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 방법 외에 당장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영국인들이 우리 영공에 나타나기 전에 격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게."

"노력하겠습니다."

 

빌어먹을 처칠 놈.

 

히틀러는 처칠 두 글자만 떠올라도 치가 떨렸다.

더욱이 그 돼지 같은 작자에게 보복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현실이 더욱 쓰라렸다.

 

어떻게 하면, 조종사들의 손실도 최소한으로 하면서 영국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로켓이라도 날리지 않고서야...... 잠깐만, 로켓?

 

"그래, 바로 그거야!"

 

히틀러가 소리치자 괴링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총통 각하? 무슨......."

 

괴링이 말하거나 말거나 히틀러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무슨 일이십니까, 총통 각하?

 

"그 친구, 그...... 로켓을 연구하던... 그래, 발터 도른베르거! 그 친구를 당장 이곳으로 데려오게나! 지금 당장 할 얘기가 있네!"

 

히틀러는 전쟁 전에 발터 도른베르거를 만난 적이 있었다. 로켓에 미친 괴짜.

 

히틀러의 눈에 비친 도른베르거는 문자 그대로 '로켓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도른베르거는 열심히 히틀러에게 로켓의 우수함과 그 미래에 대해 역설했지만, 이미 다른 병기-전차와 비행기-에 관심이 쏠려 있던 히틀러는 도른베르거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게 세기의 천재와 독일의 총통 간의 만남은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

 

조종사들의 피해 없이 적국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겠는가.

 

도른베르거가 주장한 로켓 병기야 말로 히틀러의 이상에 아주 들이맞는 무기였다.

 

폭격기들이 할 일은 로켓이 대신하고, 조종사들은 폭격기 대신 전투기를 몰게 하면 루프트바페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된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그 친구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히틀러는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서 뼈저리게 후회했다.

 

허나 지나가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 없는 법.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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