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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2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4화

54화 어둠의 시간 (4)

 

 

신문들은 저마다 RAF가 함부르크 공습에서 거둔 성과를 보도하느라 난리였다.

 

'우리 공군이 거둔 놀라운 성과!'나 '불바다가 된 함부르크'까지는 이해가 가진 하는데, '독일군 산업역량 8%나 감소!'라던가 '독일 서부에 대량의 피난민 발생, 사실상 서부지역 일대 마비!' 같은 기사들은 또 뭐냐고.

 

암만 생각해봐도 사실이 아니라 구라 같단 말이지.

 

게다가 신문 그 어디에도 이번 작전으로 인해 아군이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피해가 적었다면 틀림없이 정부에서 발표했을 터. 아무래도 피해가 적지 않은 탓에 함구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지만, 모처럼 독일에 한 방 먹였다며 기뻐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그래서인지 다들 들뜬 분위기로 저녁 만찬이 되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크리스마스 만찬으로 평상시엔 구경조차 하기 힘든 진귀한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과와 자두로 속을 채운 뒤 구운 로스트 치킨부터, 그레이비 소스를 발라서 구운 거위 통구이, 소시지, 치즈, 과일 파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마치 귀족의 연회를 보는 것 같았다.

 

"여단장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특별 만찬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빵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 치우도록."

"예!"

 

브랜슨 중령 본인도 배가 고팠는지 말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식사에 돌입했다.

 

"무어 대위, 잔 받게."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브랜슨 중령은 뿌듯한 표정으로 무어 대위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이번 기사들이 사람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준 모양이야. 덕분에 연대장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시더구만."

"이게 다 대대장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무어 대위의 말에 브랜슨 중령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나를 향했다.

 

"자아, 우리 영웅 나리도 잔 받게."

"가, 감사합니다."

 

다른 거 좋은데 제발 그놈의 영웅 나리란 말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괜히 사람 민망하게시리.

 

내 간절한 바람과 달리, 브랜슨 중령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참! 자네 그거 알고 있나?"

"?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모로코에서 찍었던 뉴스영화 말일세."

"......!!!!"

"아직도 영화관에서 툭하면 틀어준다고 하던데. 사람들한테 인기가 그렇게 많다더군. 척 봐도 억지로 연기하는 게 다 티가 나는데 말이야. 참 이해할 수가 없어."

 

맙소사, 그때 그 정신 나간 중위가 찍어간 필름이 아직도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다고?

 

하마터면 손에서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직도 그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단 말이다!

 

"그걸 아직도 상영한단 말씀입니까? 얼마나 볼 게 없었으면......."

 

게이츠 상사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브랜슨 중령은 말도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지금쯤이면 영국인의 절반이 그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싶네."

 

아니, 이 시대의 영국인들은 죄다 정신병잔가? 군바리 여러 명이 발연기를 펼치며 대충 전쟁놀이 하는 영상이 그렇게까지 인기가 좋다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축하하네, 그레이 중위. 이젠 길을 가다가도 자네를 알아볼 사람들이 넘쳐날테니 말이야."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그냥 다 꺼졌으면 좋겠다.

 

***

 

어둠이 깊게 내린 추운 밤에 한 무리의 강철 독수리들이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면서 모습을 드러낸 달은 강철 독수리들을 환하게 비추었다.

 

통나무처럼 길쭉한 동체에 반사된 달빛이 어둠을 갉아댔다.

 

"이제 영국 상공이다.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

 

Ju88 폭격기에 탑승한 독일군 조종사들은 도버 해협을 지나 영국 본토의 상공에 접어들자, 조종간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조종사들 다수는 실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이었지만, 몇몇은 이번이 첫 실전인 신참들이었다.

 

신참 조종사들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영국 전투기들을 우려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고참 조종사들은 프랑스 상공을 비행하는 것처럼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축제가 곧 시작된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릴 수 있도록."

 

편대장 헬무트 쇤케르크 소령은 이번 임무에 참여한 조종사들 중, 그 누구보다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고향은 함부르크였으니 말이다.

 

스페인에서 첫 실전을 경험한 이후로, 그는 4년 동안 전장에서 싸워왔다.

 

스페인에서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전투에서 살아돌아올 때마다 그는 진급을 거듭했고, 지금은 목에 1급 철십자훈장을 어깨엔 소령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쇤케르크의 가족들은 그 누구보다 그의 승진과 전공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도.

 

쇤케르크에겐 오래 전부터 마음에 담아온 여자가 있었고, 여자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둘은 전쟁이 끝나면 함께 결혼을 하기로 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이탈리아? 덴마크? 아니면 프랑스?

 

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영국에 가고 싶어 했다.

 

왜 영국이야? 영국은 지금 독일과 전쟁 중인 적국인데.

 

당황해하는 쇤케르크에서 그녀는 예전부터 영국에 가보는 것이 꿈이었노라고 수줍어하며 말했다.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빅 벤을 직접 보고 싶어서.

 

결국, 쇤케르크는 그녀의 뜻대로 신혼여행으로 영국에 가기로 했다. 물론, 전쟁이 끝난 뒤에 말이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이 독일인 관광객들의 입국을 허용해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없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함부르크에 공습이 있던 날, 쇤케르크는 모처럼 휴가를 받아 함부르크의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열차가 하노버를 지날 즈음 함부르크는 공습을 받았고, 함부르크에 도착한 쇤케르크는 자신이 태어났던 집이 터만 남기고 완전히 파괴된 광경을 목격했다.

 

쇤케르크는 즉시 피난민 구호소로 향했다. 실날같은 희망을 안고서.

 

하지만 그곳에 그의 가족들은 없었다. 그리고 쇤케르크의 그녀도.

 

다급해진 그에게 담벼락에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담벼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하얀색 페인트로 적혀 있었다.

 

'실종자들을 찾는 사람들은 공원으로 오십시오. 공원에 사망자들의 유해를 모아뒀습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공원으로 뛰어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잔인한 현실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들 중에, 그녀와 가족들도 있었다.

 

처음엔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랬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억 속의 그녀였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소방관이 때마침 근처를 지나다가 쇤케르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하얀색 벽으로 된 3층집 지하실에서 그녀는 공습으로 집이 무너질 때, 하체가 깔려 과다출혈로 죽었다. 가족들은 방공호 내부에 차오른 물 때문에 익사했다.

 

쇤케르크는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땅에 묻곤, 바로 부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번 임무에 지원했다.

 

상관과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마음을 추스리고 쉴 것을 권했지만, 쇤케르크의 의지를 도무지 꺾을 수 없었다.

 

"제리들이다! 공습이야!"

"경보! 경보!"

 

하늘에 나타난 독일군 폭격기들을 본 영국군 방공부대 병사들은 서둘러 대공포를 조준했다.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는 가운데 대공포들이 불을 뿜었다.

 

"대공포입니다!"

"나도 알아! 속도 그대로 유지해!"

 

격렬한 대공포화에도, 폭격기들은 편대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비행했다.

 

아직이다, 아직. 조금만 더 있으면.......

 

대공포가 터질 때마다 육중한 기체가 조금씩 흔들거렸다.

유리창에 금이 가고, 뒤쪽에서 볼트가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쇤케르크는 미동도 않았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한 그는 폭탄창을 개방했다.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쇤케르크는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

 

"투하!"

 

***

 

만찬은 거의 끝물에 다다르고 있었다.

 

접시를 가득 채웠던 음식들은 이제 부스러기와 볏조각 밖에 남지 않았고, 눈이 내린 설원처럼 새하얀 식탁보는 소스 자국과 기름이 얼룩이 졌다.

 

굶주린 야수들의 위는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에 터지기 일보 직전인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덩달아 아랫배도.

 

"그으~래서, 내, 내가, 금마를, 팍! 하고 어? 그렇게......."

 

브랜슨 중령은 술이 잔뜩 들어간 탓에 이젠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지경이었다.

 

"아휴,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무어 대위도 딱히 정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게이츠 상사는 어떨까?

 

"내가 인마! 어? 느그 애비랑 같이! 어? 같이 밥도 먹고! 어?"

 

......이쪽은 더 심각하군.

 

모처럼 맛보는 술이라고 엄청 퍼마시더만, 결국 저 지경이 되고 말았다.

 

물론 나 역시 술을 좀 마신 상태지만, 아직까진 정신이 비교적 말짱한 상태다.

이전의 경험들 때문에 술을 퍼먹다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서다.

 

겨우겨우 쌓아올린 이미지를 다시 말아먹을 수 없지 않은가.

 

뭐, 지금이라면 사고 좀 쳐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지만.

 

"제니야, 사랑했다, 이 X발년아!"

 

헤어진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놈,

 

"제가, 여기서, 딱 5분만 보여드리면!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의자 위에 올라가 바지 내리는 놈,

 

"......카하아악."

 

바닥에 드러누워 자는 놈까지,

 

그야말로 개판이 따로 없다.

 

천벌이 내리기 전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나저나 1940년의 영국군의 회식이 이 정도로 막가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구타와 비리가 대놓고 판을 치던 20세기의 국군도 회식 때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과도할 정도로 즐기고 있을 때, 창문 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그토록 시끄럽던 실내가 정적을 맞이했다.

 

설마 훈련인가?

지금 밤 10시가 넘었는데?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아니, 애초에 훈련이 있다면 병사들은 몰라도 장교들까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브랜슨 중령조차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비상! 비상!"

"모두 방공호로! 당장 뛰어가!"

 

사이렌 소리가 귀에 닿자마자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는 너 나 할 거 없이 즉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가 방공호를 향해 돌진했다.

훈련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사이렌이 계속해서 울리는 가운데 포성이 들렸다. 아군 대공포대들이 밤하늘의 불청객들을 향해 쏘아대는 소리였다.

 

대공포까지 동원되었다는 건 절대로 훈련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중위님, 얼른 들어오십쇼!"

"아, 네!"

 

게이츠 상사의 뒤를 따라 방공호 안으로 들어간 나는 두꺼운 철문이 닫히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철문이 닫히기 직전, 땅이 울리면서 가느다란 폭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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