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11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2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11화
111 은휘성녀(銀暉聖女)(4)
정파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사천에 감락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산이 하나 있는데 구름이 자주 머물러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백운산이라 부른다.
“이상하군.”
백운산의 아래쪽에 있는 감락의 유서 깊은 장원인 운무장(雲武莊)의 정원에서 백운산을 근심스러운 얼굴로 보는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운해비룡검(雲海飛龍劍) 구당도(瞿唐島). 운무장의 장주이자 감락의 패권을 쥔 자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청해를 휩쓸고 있는 마교의 준동을 막고자 제자들과 함께 사천의 요충지인 도강언(都江堰)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장주님, 떠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당도는 백운산을 보며 연신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운무장의 제자도 백운산을 보았으나 그가 보기엔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장주님, 제자가 보기엔 이상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저 산에 걸린 구름 아래와 그 주위를 자세히 보거라.”
“예.”
“너무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제자는 다시 한번 산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조금 어두운 것 같기도 하다.
“혹시 먹구름이 아닐까요?”
“이 녀석아, 오늘 같은 날씨에 무슨 먹구름이냐?”
구당도의 말이 옳았다. 날은 화창하여 구름을 찾아보기도 힘든 날이었고 백운산에 걸린 구름도 짙은 구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어두운 구름은 없지 않습니까?”
“흐음.”
구당도는 제자들이 출발할 준비를 마치자 그들을 이끌고 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장원의 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백운산에 들렀다가 가도록 하자.”
장주의 명령에 따라 운무장의 제자들은 걸음을 돌려 백운산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자주 찾아가던 산이라 운무장의 무사들은 어렵지 않게 산 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제껏 보지 못했던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검은 안개? 검은 구름인가?”
“먹구름이 저렇게 검은색은 처음 봅니다.”
숲 사이에 펼쳐진 검은색의 안개를 살펴보던 구당도는 자신을 검을 뽑았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모두 검을 뽑고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여라.”
“예.”
운무장의 공격진인 운영소요진(雲影小搖陳)을 펼쳐 검은 안개를 향해 다가가던 그들은 그 안개가 산의 중턱까지 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람에 미동조차 없는 안개는 내가 본 적이 없다. 이게 무슨 사술인지 모르니 조심하여라.”
장주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리자 제자들도 얼굴을 굳힌 채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끈적끈적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는 듯했고 호흡을 할 때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고 있던 운무관의 무사들은 그들의 앞을 막는 자들을 만났다.
“저, 저게 뭐야?”
“괴 괴물…….”
그들의 앞을 막아선 자들은 산 사람의 껍질을 벗겨 놓은 듯 혈선이 온몸을 가득 메우고 있고 기괴하게 뒤틀려 사람이라 보기 힘든 자들이었다.
그러나 운무관의 제자들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바로 눈으로 짐작되는 붉은색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살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구당도는 괴물들을 향해 날듯이 달리며 소리를 쳤다.
“모두 전력을 다해 이 기괴한 것들을 몰아내라!”
“예!”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백운산에 이러한 괴물들이 있다는 것은 운무장의 명성에 타격이 될 것이다. 그것을 떠나 어릴 때부터 항상 마음에 둔 백운산에 이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괴물들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구름이 흐르는 듯한 유검(柔劍)술을 펼치는 운무장의 무사들이 그들에게 쇄도하자 괴물들은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푸욱!
사람의 모양으로 생겼기에 심장의 위치에 검을 찔러 넣은 넣었으나 움직임에 영향이 없자 황급히 검을 뽑고 뒤로 물러서던 무사는 갑자기 눈앞이 온통 붉은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끄아아아아!
무사가 본 붉은색은 그가 찔렀던 괴물의 손바닥이었다. 괴물은 한 손으로 무사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뽑았다.
그것을 본 다른 무사가 검을 휘두르며 괴물의 팔을 노렸으나 가슴이 뜨거워져 시선을 내렸다.
왼쪽 가슴을 꿰뚫은 괴물의 손에 심장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다른 괴물이 등 뒤에서 심장을 뽑은 것이다.
털썩!
다른 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몸을 피해도 괴물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와 무사들의 머리와 심장을 뜯어내고 있었다.
심장이 찔려도 공격을 하고 팔이 잘려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괴물의 손에 제자들이 한 명씩 시체가 되어 가는 것을 본 장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우리 운무관의 정예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그들의 모습을 보던 장주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제자들의 움직임보다 부서진 나뭇가지가 더욱 빠르게 날아간다는 것이다.
장주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나뭇가지뿐만이 아니었다. 발에 채인 돌멩이도, 떨어져 내리는 낙엽도 무사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설마 이 안개가……? 모, 모두들 후퇴하라.”
‘이 안개가 우리의 감각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음이 틀림없다. 안개 밖으로 나가야 해.’
이미 괴물들에게 질리고 있던 운무관의 무사들은 장주의 명령이 있자 즉시 몸을 돌려 안개를 빠져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뒤쪽에서는 운무관의 무사들이 지르는 비명이 계속 메아리쳤다.
“문주님, 사형제들이…….”
“안 돼. 검은 안개 속에서는 이길 방법이 없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안개 밖으로 나가야 해.”
그러나 장주는 그들의 앞을 막는 자들을 보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괴하게 뒤틀린 곳도 없다. 그리고 좌우도 비슷하게 생겼다. 다만 팔이 4개였고 키는 9척에 달하는 거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과 입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지옥이었던 것이냐?”
운혜비룡검 구당도는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검을 고쳐 쥐고 괴물을 향해 날듯이 달려가는 구당도의 검을 잡아챈 괴물은 여러 관절이 있는 팔로 가슴을 꿰뚫고 그의 머리를 뜯었다.
운무장의 무사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에 킬킬거리며 보는 자들이 있었다.
“기대 이상이군요.”
“그렇군. 이 정도가 되니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을 기다려 온 것이 아니겠나?”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더욱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무림이 마교의 중원진출로 떠들썩할 때 가이오스트의 빛의 연합국도 혜성처럼 나타난 영웅과 자신을 희생하여 영웅을 불러낸 성녀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러니까 미라크네의 붉은 성녀가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고대의 황토인 전사를 불러냈다는 건가?”
“그렇다니까? 그 전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최전방의 성들을 초토화시킨 네 명의 마인들을 상대로 벌써 두 명이나 쓰러뜨렸다고 하지 않나? 게다가 악마의 안개도 기백만으로 흩트리고 있다 하던데?”
“하지만 성녀가 너무 불쌍해요.”
“맞아. 나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생명을 바꾸는 짓은 안 해.”
무혼에 대한 많은 것이 극비에 부쳐졌기에 항간에는 온갖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붉은 성녀가 탈피를 했다는 둥, 실제로는 드래곤인데 황토인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라는 둥,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미라크네의 붉은 기류의 성녀가 고대의 황토인 전사를 불러낸 것이 정설로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고대의 황토인 전사는 어떠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 모르는 채 지금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 정도의 무술 실력도 부족하나? 자네가 쉬고 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군.”
무혼은 호흡을 다듬으며 검을 거두어들였다.
“다음 목표가 정해졌나요?”
“아직 안 정해졌네. 자네가 둘이나 쓰러뜨려서인지 동맹군도 진격을 멈추고 조용히 있다네.”
“최전방의 성을 되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서둘 필요는 없네. 게다가 이건 내 생각인데…….”
검을 다듬고 있던 무혼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세팜 후작의 얼굴이 보인다.
“아무래도 남은 두 마인이 모이고 있는 듯하네. 게다가 자네가 처치한 두 마인보다 아직 남아 있는 마인들이 더 강한 자들인 것 같고.”
“각오는 했던 일입니다. 그들에게 이기지 못한다 해도 아이네스 공주님에게 약속한 이상 전 싸워야 합니다.”
“그래 공주님은 잘 지내시나?”
“예, 제가 살던 곳도 지금 한창 전쟁 중인 듯합니다.”
“어느 곳이든 싸움은 끝이 없군.”
그 말에 무혼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후작님은 가이오스트에서 위치가 높으신 분으로 아는데 이렇게 저에게만 모든 시간을 할애하셔도 되겠습니까?”
“허허.”
카세팜 후작은 슬쩍 웃었다. 지금 후작은 지코네아 성을 다른 자에게 맡기고 무혼과 같이 다니며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돕는다고 해도 마인과의 싸움에 나설 수는 없었지만 아이네스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최강의 고대 황토인 전사를 도와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나?”
무혼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보니 후작은 대륙에 퍼지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무혼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왜 그러나?”
“그 소문을 들으면 제가 단단히 야단맞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무혼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후작을 쳐다보았다.
“우선 그 마인들을 처치한다면 더 이상 걱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게다가 그 안개만 없앨 수 있다면 빛의 연합국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데 동맹국을 정복할 생각은 없습니까?”
“정복?”
카세팜 후작은 다시 웃었다.
“서로 다른 계열의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일세. 같이 살아봤자 서로 괴롭기만 할 뿐이고 서로를 이해하기도 어렵다네.”
“하지만 동맹국은…….”
“그들도 마신에게 계시를 받았기에 전쟁을 시작한 것일세. 벌써 40년이 넘게 총력전을 벌이고 있으니 그들도 지쳐가고 있을 게야.”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혼이 보기에 이곳의 사람들은 이들의 방식대로 흑과 백이 공존하는 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형태가 양쪽으로 완전히 양분된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이들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런데 자네 동맹국을 정복하고 싶나?”
그 말에 무혼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정복에는 관심 없습니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네. 자네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
후작이 가고 나자 무혼은 엘라드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에요, 무혼 경?”
“아이네스 소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곳의 생명체나 물건이 다른 세계로 간 적이 있습니까?”
“다른 세계요? 어디를……?”
“제가 살고 있던 세계. 바로 중원에요.”
“글쎄요? 제 기억에는 없는 것 같아요.”
“중원에서 엘라드가 알려준 소환 마법과 비슷한 마법진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엘라드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건 꼭 확인해야 할 문제군요. 저에게 시간을 좀 주셔야 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엘라드.”
같은 시간에 동맹군 3군단의 군단장실에는 베트란이 보고서를 읽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벌써 두 명의 마인이 소멸되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저 공간에서 마인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있지? 그것도 마신을 믿지 않는 자가?”
베트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이미 전선을 가득 채운 검은 안개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 병사들은 안개를 조금 불편해했지만, 고급 검기를 사용하는 장교들과 사제들은 환영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동맹군 사이에서는 마신의 축복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검은 안개는 빛의 연합군을 무너뜨릴 최고의 무기였다.
하지만 지금 받은 보고서를 보면 오히려 안개를 역이용하여 황토인 검사가 연합군 쪽에 있다고 한다.
베트란은 마인을 소멸시키는 황토인에 호기심이 갔다. 마인이 된 후 안개에서 나가지 않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로이 나타난 황토인은 검은 안개 속에서 마인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벌써 두 명의 마인을 소멸시켰다고 했다.
“호레이스.”
“예.”
“연락을 하라. 아직 남아 있는 마인을 이쪽으로 보내준다면 그 황토인의 전사를 갈기갈기 찢어주겠다고 해라.”
“알겠습니다.”
호레이스는 군례를 붙이고 군단장실을 나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술잔을 한 손에 쥔 베트란은 그의 의자에 몸을 맡겼다. 천천히 술을 들이켜던 그는 보고서에 시선을 던졌다.
보고서를 읽으며 이를 갈고 있는 베트란의 눈에는 기묘한 희열이 스쳐 지나갔다.
“이 황토인이 나에게 죽음의 공포라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