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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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09화
109 은휘성녀(銀暉聖女)(2)
“저, 저것을 빨리 없애버려라.”
욱단백은 흰색의 기운을 보며 머릿속이 온통 좋지 못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수일을 버틸 수 있을 성이 일거에 무너질 듯한 생각에 조급함마저 느껴졌다.
욱단백의 명령을 들은 무림맹의 무사들이 활과 암기로 흰색의 기운을 공격했으나 연기인 듯 그저 통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혈랑검의 수정에서는 계속 빛이 나고 있었고 성문 위의 공중에 머물고 있는 흰색의 기운도 커져갔다.
주위의 사람들의 숨소리가 작아져 갈 때 드디어 흰색의 기운에서 강렬한 빛이 나며 사라져갔다.
“실패한 것인가?”
“그냥 사라졌네?”
마교의 진영에서 아쉬움이 섞인 소리가 나오고 있을 때 정파의 무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항상 성공하라는 법은 없지. 하하.”
“두 번 중 한 번은 실패하는 술법인가 보군.”
그러나 정파의 무사들은 점점 추워지는 공기를 느꼈고 바람 사이에 햇살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회오리가 일어나며 흰색의 바람이 성문 주위를 강하게 몰아쳤다.
“우아아악!”
“이게 뭐야?”
“웬 얼음 조각과 바람이냐?”
삽시간에 성문 위에서는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눈을 뜨기 힘들게 하는 바람과 함께 암기처럼 날카로운 얼음들이 거세게 몰려오자 무공수위가 낮은 무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성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빙계 최고의 대공간 마법은 아니지만, 블리자드 뒤를 잇는 강렬한 마법을 처음 접하는 자들로서는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
“전원 공격하라!”
마법을 한동안 정신없이 보던 마교의 무사들은 교주가 내력을 담아 공격 명령을 내리자 일제히 앞으로 돌격해갔다.
그러나 아직도 멈추지 않은 마법으로 인해 성 위에서는 화살과 암기를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성문 위로 활을 든 자들을 집중 배치했다가 아이네스의 마법에 의해 완전 무력화가 되었기에 막을 만한 장거리 무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성벽 주위에 설치된 방해물과 기관 진식들도 급작스럽게 얼어버림으로써 본래의 위력을 내지 못했다.
지부의 지휘를 맡고 있는 욱단백은 이를 갈았다.
“제길, 마녀의 주술에 성의 유리함을 잃어버리다니?”
본래 중병기가 없는 강호에서 두터운 성벽을 가진 성은 아주 요긴한 방어구였다.
게다가 무공의 특성상 위에서 아래를 공격할 때 더욱 효과적이라 성벽의 이점을 믿고 새까맣게 모여든 적들을 보면서도 비웃음을 흘렸던 그였다.
“이미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없다.”
이미 기관진식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욱단백은 조금 전의 흰색의 기운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 기운은 보이지 않고 얼음과 바람만이 매섭게 쏟아져 내릴 뿐이다.
“제기랄, 아무것도 없잖아?”
챙챙챙.
으악!
“적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욱단백은 외성을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내성에서 지킨다 해도 내성의 성벽 위에도 적의 술법이 쏟아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럴 경우 스스로 덫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저 술법에 대해서 알리고 조사를 해야 해.”
지금 이곳에는 청해를 지킬 대부분의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이 모두 쓰러진다면 청해에서 마교를 막을 무사들은 찾기 힘들 것이다.
“며칠만 기다리면 사천에서 지원을 하러 올 터인데.”
마교의 중원진출을 막기 위해 지어진 성이기에 다른 곳에 비해서 가장 많은 공을 들여 만든 곳이다.
그런 곳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 억울했다.
그러나 빼앗긴 성은 다시 찾으면 되지만 죽은 무사들은 다시 되살리지 못한다.
“모두들 후퇴한다. 전력을 다해 감덕(甘德)을 향해 달려라.”
그의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성안에 울리자 정파의 무사들은 진을 이루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안으로 들어온 마교의 무사들이 후퇴하고자 하는 정파의 무사들을 쉽게 놓아주질 않았다.
이미 후퇴하기 시작한 정파의 무사들은 숫자가 줄어드는 데 반해 마교의 무사들은 계속 숫자가 늘어갔다. 한 번 탈출에 실패하면 도망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상급의 마법을 두 개나 연속적으로 시전한 아이네스는 혈랑검에 몸을 기대어 쉬고 있었다.
“미안해, 동생. 다른 분들께도 미안해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주위에 남은 무사들을 보며 아이네스가 사과를 하자 고명우는 손사래를 쳤다.
“아이네스 소저는 조금 전의 술법만으로 흑도의 무사 수백 명을 살리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고명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난관이라 지목된 것 중의 하나인 무림맹의 덕령합 분타였다. 그 분타를 혼자의 힘으로 무력화시킨 것이다.
예소소는 그녀의 옆에서 혈랑검에 기대어 힘겨워하는 아이네스를 보았다.
‘강력한 주술사.’
성을 공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부탁했지만 이렇게도 강한 주술을 펼쳐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공야 소협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겠지?’
아이네스를 보며 예소소는 자신도 무혼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분명 어제까지는 그 물음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지만 아이네스를 보고서 그 자신감이 약해졌다.
‘나도 좀 더 노력을 해야겠어.’
예소소는 아이네스에게 손을 뻗어 약간의 내력을 밀어 넣었다.
아이네스는 천근처럼 무거워진 몸을 지탱하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따스한 기운이 들어오며 몸이 가벼워지자 뒤로 돌아보았다.
“예 동생?”
“언니, 힘을 내세요.”
예소소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은 아이네스는 다시 몸에서 내력을 이끌어 가볍게 운기를 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예소소를 이끌었다.
“예 동생, 우리가 할 일은 아직 남았잖아?”
예소소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드는 분타를 향해 달렸다.
뒤에 있던 능미류와 은소예도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서 뒤따라가기 시작했고 다른 무사들도 함께 달렸다.
‘아무래도 저 아이네스 소저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지?’
두 여인은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은발을 휘날리고 있는 아이네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모두 죽여라!”
아이네스와 예소소가 성안으로 들어섰을 때 많은 살육이 시작되고 있던 중이었다.
“안 돼요.”
아이네스가 급히 날린 매직 미사일이 정파 무사들의 목숨을 노리던 흑도의 무사들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빠른 속도가 아니었고 위력도 없었기에 매직 미사일에 다친 자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네스가 원했던 목적인 정파 무사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성공할 수 있었다.
“왜 그러시오?”
제지를 당한 흑도의 무사는 노여움에 얼굴이 벌게졌지만 거대한 술법으로 성문을 부순 여술법사라는 것을 알고 화를 삭였다.
“싸움이 끝난 뒤, 항복한 자들과 부상자들을 죽인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에요. 어디에서도 그런 야만스러운 행위를 하는 곳은 없어요.”
“하지만 백도의 놈들은 항복을 한 우리 가족의 목숨을 살려두지 않았소.”
“그렇다고 정파의 비열한 자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하실 생각인가요?”
예소소가 아이네스의 말을 거들며 나오자 마교의 무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뒤쪽에서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분타에 울려 퍼졌다.
“투항하거나 저항의 능력이 없는 자들은 혈을 짚고 사로잡도록 하라.”
마교의 교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파의 무사들을 노려보았으나 중손면인의 말을 떠올려 사로잡을 것을 명했다.
‘흥! 이따위 조무래기들의 목을 쳐봤자 소용없는 일. 혈채를 내야 할 자들은 따로 있지.’
그러나 아직도 불만에 찬 눈으로 보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알자 예소소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혈채를 받아내고자 함이지 살육을 하기 위해 중원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소소가 주위의 무사들을 설득하는 동안 아이네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사람은…….’
구석에 누워져 있는 흑도의 무사의 모습은 처참했다. 다행히 급소는 벗어난 듯하였으나 몸 전체에 걸쳐 길게 베어진 상처 사이에 내장마저 보였다.
아이네스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고 있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자는 이미 틀렸소이다.”
아이네스를 본 마교의 의원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했다. 그도 의원인 이상 환자를 치료해 주고 싶었으나 금창약으로 메울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아이네스는 무사의 얼굴을 보았다. 스무 살 남짓한 나이로 보이는 젊은 무사는 그의 옆으로 다가와 준 아이네스에게 힘없이 웃어주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아이네스는 혈랑검을 품었다. 그리고 간절히 기원을 했다.
대지의 괴로움을 흰색의 눈으로 부드럽게 덮어주는 스노샤니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눈앞에 있는 젊은이의 인생이 계속되기를 염원했다.
“힐(heal).”
몸은 힘들고 심장의 마나는 가늘어졌지만, 그녀의 몸에 퍼져 있는 신성력은 충만했다.
부드러운 그녀의 시동어가 나직이 울리자 혈랑검의 수정이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듯 따스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이네스는 혈랑검의 수정을 상처 가까이 가져갔고 수정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무사의 상처에 머물렀다.
“도와주세요.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아이네스의 말에 무사의 친구인 듯한 다른 무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이네스의 말대로 친구의 상처를 두 손으로 모은 그는 손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빛을 신기한 듯 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놀랬다.
너무나도 길고 너무나도 깊숙이 베였기에 의원들이 고개를 흔들었던 친구의 상처가 그의 눈앞에서 급속히 아물고 있는 것이다.
무사에게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짧게 느끼는 시간이었으며 옆에 있는 의원이 눈을 떼지 못해 멍하게 보고 있는 동안 무사의 상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의원은 말까지 더듬으며 그의 볼을 잡아당겨 보았다.
상처를 치료받은 무사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고 아이네스는 옆에서 도와준 무사를 보았다.
“상처가 봉합되었을 뿐이에요. 무리하게 움직인다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어요.”
아이네스를 멍하게 보고 있던 무사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의원들도 놀라서 달려왔다. 아이네스는 그들을 보며 물었다.
“이곳에는 내상을 돌보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알고 있어요.”
아이네스의 물음에 의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처를 봉합할 수 있을 뿐이에요. 내상은 의원분들이 도와주셨으면 해요.”
그러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의원이 나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상은 무공이 높은 분들도 도와주기에 어렵지 않소. 오히려 길게 베어진 상처를 봉합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라오.”
아이네스가 살짝 웃고서 의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당장 상처를 봉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사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흑도와 백도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아이네스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아이네스를 지켜보던 흑도의 무사들은 그녀에게 치료를 받은 무사들은 정사를 가리지 않고 옮겨 주었다.
의원들이 말하는 급한 환자의 치료가 거의 끝날 무렵 아이네스는 등 뒤에 들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이 아이를 치료해 주실 수 없을까요?”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이 아직 스무 살이 넘지 않았을 소녀를 데리고 있었다.
미녀라고 하기엔 어렵지만 깔끔하고 청순했을 소녀의 얼굴은 둔기에 맞은 듯 얼굴의 반이 짓이겨져 있었다.
“아, 어째서 이렇게 어린 소녀가…….”
그 말에 중년의 여인은 얼굴을 굳히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어렸을 때 정파 놈들의 흉계에 이 애의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었기 때문이지요. 말려도 스스로 뛰어들었다가…….”
아이네스는 소녀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 소녀의 얼굴과 마음이 함께 치료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소녀는 아이네스의 손과 혈랑검의 수정을 잠시 거부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고 떨리는 눈으로 아이네스의 눈을 보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혈랑검의 끝에 달린 수정의 빛이 점점 환히 빛나며 소녀의 얼굴을 덮기 시작했고. 아이네스의 손은 빛에 잠긴 소녀의 얼굴을 계속 쓰다듬었다.
따스한 느낌을 주는 수정의 빛이 사라졌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둔기에 짓이겨진 곳을 찾기 힘들었고 소녀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듯 고운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오오.
그 모습을 본 여인들은 너도나도 아이네스에게 달려와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번의 싸움에서 얼굴과 팔등에 상처를 입은 여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기적인 생각이라 할지 몰라도 아이네스는 같은 여인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인에게는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매력과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것이리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네스는 주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여성분들을 먼저 치료하도록 할게요.”
그 말에 어떠한 사람도 뭐라 할 수 없었다. 불평을 말한다면 아이네스에게 간절한 눈길을 보내는 여인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