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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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2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07화
107 새로운 만남(5)
“대체 네놈은 어디서 온 놈이냐.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연합군과 한패이면서 마계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냐?”
흑백이 확연히 나누어져 있는 가이오스트에서 마신을 믿는 자가 연합군에 있을 이유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법칙을 깬 자가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알 것 없다.”
무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대한 기운으로 둘러싸인 검을 혈랑벽력의 검로로 이끌어 마인에게 몰아쳐갔다.
쿠쿠쿠쿠쿵!
성벽까지 온통 먼지에 뒤덮이게 할 정도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색채가 성벽 앞의 벌판을 뒤덮었으며 하늘에 구름들이 밀려나고 있었다.
망토로 먼지들을 피한 지휘관들은 먼지가 가라앉자 나타난 눈앞의 풍경을 아연하게 보았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사라졌고 단지 평평한 대지만이 보였다. 며칠 전의 전투의 흔적도 깔끔하게 사라졌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대지 위에 무혼만이 검을 쥐고 서 있을 뿐이었다.
“저자가 적이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멸망당하겠지.”
한 지휘관이 중얼거리듯이 내뱉는 말에 후작이 대꾸를 하며 엘라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혼 경이 우리를 배반하고 동맹군 측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없나?”
“없어요.”
“그걸 어떻게 장담하나?”
“무혼 경은…….”
엘라드는 후작과 지휘관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절대로 아이네스 공주님을 배반하지 않소. 연합군이 아이네스 공주님의 적이 되지 않는 한 무혼 경은 연합군 쪽으로 검을 겨누지 않을 것이오.”
엘라드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위엄에 후작과 지휘관들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엘라드는 성문을 열고 있었고 무혼은 성문 앞에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혼 경.”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옷이 엉망이 되었군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요?”
엘라드가 보니 무혼의 옷은 여기저기 마구 찢어져 있었고 무사한 것은 아이네스의 마법 지팡이 뿐이었다.
엘라드는 크게 웃으면서 무혼의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가리켰다.
“검은 안개의 악마를 처치해 주신 분이시니 옷 정도는 문제로 삼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말을 전해드릴 테니 우선 가서 쉬고 계세요.”
“고맙습니다, 엘라드.”
흘러내릴 듯한 옷을 살짝 잡고 걸어가는 무혼의 모습을 지코네아 성의 장병들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수천 명의 연합군을 대지가 피로 적셔질 때까지 도륙했던 악마가 평범해 보이는 황토인 한 명에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언제나 검은 안개의 해결책이 나타나기를 고대했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었지만 마인과 싸우던 무혼의 모습을 되새기며 절대로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있었다.
지코네아 성을 눈앞에 보이는 벌판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고 마인처럼 산산이 분해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벽 위에서 후작이 중얼거리듯 옆의 장교에게 말했다.
“빨리 옷을 가져다주고 목욕물을 준비해 주어라. 옷은 아주 넉넉히 가져다주도록.”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문은 열려 있습니다.”
목욕을 하고 운기를 마친 후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던 무혼은 문밖에서 들리는 후작의 목소리에 대답을 했다.
방안으로 들어선 후작은 일어선 무혼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오늘 고맙네.”
“아이네스 공주님이 원하셨던 일입니다. 제겐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요.”
“그런가.”
후작은 다시 한번 아이네스에게 감탄을 했다. 무혼 경이라 불리는 이자는 분명 빛의 신을 믿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오히려 어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데도 연합군을 위해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준 그녀의 능력에 놀랐던 것이다.
“흠.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 말까지 했을 때 무혼은 손을 들어 후작의 말을 잠시 제재했다.
“무슨 일인가?”
속으로 불쾌한 생각도 들었으나 무혼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자 무혼을 잠시 기다렸다.
- 후작님과 이야기 중이셨네요?
- 아이네스 소저, 잘 지내고 계십니까?
- 예, 오랜만에 오게 되네요.
- 아무래도 세계가 바뀌면 서로에게 찾아가는 것이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아이네스도 동의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무혼과 만나지 못한 것은 무혼이 명계로 떨어졌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이번 소환을 하고서 서로의 세계로 옮겨 갔을 때다. 이제야 무혼을 만날 수 있었다.
- 검은 안개를 없앨 방법이 있었나요?
- 오늘 지코네아 성 앞의 검은 안개를 상당수 없앴으며 이곳에 있던 마인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와아. 고마워요, 무혼 경.
아이네스의 목소리에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자 무혼은 마인과 대결을 벌이며 쌓였던 모든 피곤이 날아가는 듯했다.
- 아이네스 소저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기쁘시다니 저도 기쁩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쉽게 하게 되었지?’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네스의 흥분에 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렇다면 그 마인은 도망을 간 것인가요?
- 아닙니다. 저와 대결을 벌이다 소멸되었습니다.
- 무혼 경, 너무, 너무.
이젠 감격하는 목소리까지 들리자 무혼은 왠지 쑥스러운 느낌에 얼굴을 살짝 문지르다 곧 자신의 앞에 후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 아이네스 소저, 지금 카세팜 후작님이 앞에 계십니다. 저에 대해서 궁금한 점도 걱정도 많은 듯합니다.
- 아! 무혼 경, 잠시만 제가 대신 이야기를 할게요.
무혼이 끄덕이자 아이네스는 무혼의 몸을 바로 세워 후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에요, 후작님.”
갑자기 여성스러운 말투에 후작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눈앞의 황토인은 분명 약간 어색한 발음에 딱딱한 남자의 말투를 사용해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혼 경, 갑자기 무슨 일이 있소?”
“지금 말하고 있는 저는 아이네스 공주에요. 의심이 나신다면 며칠 전 저에게 하셨던 맹세를 말해드릴 수도 있어요.”
후작은 잠시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수습하고 무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분명 황토인의 얼굴이지만 새침한 분위기와 표정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설마?”
“맞아요. 지금 무혼 경의 몸에 제가 와 있어요.”
그 말에 후작의 얼굴이 환해지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후작은 눈을 살짝 떨고 코를 실룩이며 말했다.
“다행이오. 아이네스 공주님, 난 공주님이 목숨을 버리고 무혼 경을 소환한 거라 생각했었소.”
“그렇지 않아요.”
빙그레 웃어 보이는 얼굴을 보며 후작의 눈가에는 이슬이 살짝 걸렸다.
“그래 지금 잘 지내시오?”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지금 지내는 곳이 어디요? 무혼 경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것이오?”
“아니에요. 이제부터 말하는 것을 비밀로 해주세요. 카세팜 후작님.”
“물론이오.”
아이네스는 무혼과 자신의 세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후작은 탄식을 하였다.
“그렇다면 공주님이 가이오스트로 다시 돌아올 방법은 없다는 말이오?”
“아직까지는 없어요. 하지만 혹시라도 방법을 찾게 된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무혼 경이 없다면 영영 돌아갈 수 없답니다.”
그 말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장담을 하듯 말했다.
“공주님을 위해서라도 무혼 경을 꼭 지키도록 하겠소.”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이네스 공주님, 안녕히 가시오. 다음에 또 볼 수 있기를.”
무혼이 숙였던 고개를 드니 후작은 아직도 신기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저에게 하실 말이 있으셨던 듯한데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이네스 공주님이 오셨기에…….”
무혼의 무뚝뚝한 듯한 말투가 다시 나오자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뒤에 몸을 기대었다.
“아니오. 내가 원하던 물음에 대한 답을 다 얻었으니 더 이상 물어볼 말은 없소. 불편한 것은 없소?”
“불편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마인이 있는 곳으로 빨리 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개인 수련장이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겠소. 아니 그렇게 해준다니 정말 고맙소. 아직 안개는 다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 악마만 없다면 여기서 더 이상 밀려나지는 않을 것이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내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주겠소.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후작은 무혼의 방을 나갔다.
- 무혼 경, 저 때문에 너무 무리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 아이네스 소저,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큰 무리도 아니니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아이네스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무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큰 행운이라는 생각도 했다.
- 무혼 경, 이곳은요.
아이네스는 무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무혼에게 수다를 떨 듯 이야기를 했다.
- 그럼 보름 내로 정사대전이 시작되는 것입니까?
- 예. 그래서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그리고 새로 합세한 신성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연환구진(連環九陣)이라는 것을 수련하고 있어요.
무혼은 끄덕였다. 급하게 진을 익히기 위해서는 진의 위력이 작고 각자의 기량에 의존하는 진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이다.
연환구진은 아홉 명의 무사들이 서로의 공격과 방어가 원활하고 서로를 쉽게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데 목적을 둔 진으로 진이 깨어진다 해도 그 구성원들에게 충격은 없다.
한동안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아이네스가 작별 인사를 하면서 끝나갔다.
- 무혼 경,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이곳은 걱정 마십시오. 아이네스 소저.
- 참, 그리고 무혼 경.
- 예?
- 여기에 아리따운 숙녀분들이 무혼 경을 몹시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만나러 오세요.
쿨럭.
그 말을 끝으로 아이네스의 느낌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겠지만, 무혼에게는 벌써 몇 해나 보지 못한 중원의 사람들이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니, 붉은 명계의 하늘과는 다른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가이오스트로 온 후, 제대로 하늘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원의 하늘과도 다르지만 그래도 많이 닮았어.’
창문에 기대어 하늘을 보며 부모님과 두 누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차례차례 떠올리던 무혼은 자신과 아이네스가 처한 현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 편의 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경추풍운향신(異境秋風運鄕信)
계락정운사여진(界樂靜韻思餘塵)
남아웅지현궐인(男兒雄志泫闕刃)
녀희화영함탑신(女噫化零涵塔神)
객지의 가을바람은 고향 소식을 전하고
시조의 조용한 운율은 옛사람을 기리니
남아의 큰 뜻은 칼끝의 이슬 되어 빛나고
여인의 탄식은 조용한 비가 되어 서낭당을 적시네.
- 作. 不良會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