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0화
90화 사자와 여우 (1)
모스크바, 크렘린.
소련의 '살아있는 신' 스탈린은 휘하 장성들과 함께 지도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록 리보프(리비우)와 오데사를 적들에게 내줘야 했습니다만, 아군이 그럭저럭 잘 방어하고 있습니다. 독일군 중부집단군은 여전히 민스크 앞에서 진격이 막힌 상태고, 남부집단군도 빈니차 앞에서 가로막힌 상태입니다."
"흐음."
주코프의 설명이 끝나자 스탈린은 손에 든 보드카 잔을 살짝 흔들었다.
"아직까진 예상대로구만."
스탈린은 전쟁이 시작될 경우, 독일 국경에서 가까운 도시들을 잃는 것쯤은 예상했다.
그의 예상대로, 국경과 가까운 도시들-리보프, 카우나스, 빌뉴스, 오데사 등-은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허나 이 정도면 아직까진 인내 가능한 피해였다.
미리 경계령을 내린 덕분에 붉은 군대는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상대로 나름 호각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비록 소련군은 느리긴 해도 밀려나고 있고, 독일군이 느리지만 전진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리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래서 파시스트 놈들은 믿을 게 못 돼. 겉으론 웃는 낯을 하고 있어도 등 뒤에선 태연스럽게 칼을 가는 놈들이거든."
"맞습니다, 서기장 동지."
회의의 참석자들은 스탈린이 히틀러의 동맹 제안이 도착했을 때, 어린아이처럼 기뻐 날뛰던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명하게도, 입 밖으로 그 사실을 내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쯤 놈들의 진격이 멈출 수 있겠나?"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잘하면 겨울이 오기 전에는 파시스트들의 진격을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주코프의 보고에도 스탈린은 성이 차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입을 열자 구두솔만큼이나 두터운 콧수염이 실룩거렸다.
"그걸론 부족하지. 늦어도 첫 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저 더러운 독일 놈들을 모두 소비에트의 영토 내에서 몰아내야 하네."
"예?"
스탈린의 어처구니 없는 요구에 주코프는 깜짝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왜? 힘들 것 같나?"
"하, 하지만 서기장 동지. 외람되오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왜지?"
"붉은 군대 장병 개개인의 용기와 투지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파시스트들을 연말까지 영토 밖으로 몰아내는 것은 무리입니다. 아직 붉은 군대는 그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직설적인 성격의 그답게 주코프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지만, 이는 오히려 스탈린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그럼 자네는 저 더러운 파쇼 돼지들이 소비에트의 영토에서 활개 치는 꼴을 가만히 두고만 볼 생각이란 말인가?"
"서기장 동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현실에 대해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스탈린의 호통에 움찔한 주코프였지만, 그래도 그는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진격이 더디다고 하나, 적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는 적들의 저력이 어디까지인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당장은 상황을 관측하면서 추후 계획을 논의하는 편이 옳습니다."
"적들을 막아낼 수 있으면서 몰아낼 수 없다는 건 또 뭔가? 우리의 군대는 적들에게 전혀 꿇릴 게 없네. 지레 겁먹고 어영부영하다간 파시스트 놈들만 이롭게 될 거라고!"
주코프의 설명에도, 스탈린은 막무가내였다.
장군들이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스탈린은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명령하네. 지금 이 순간부터 붉은 군대는 단 한 치도 물러서지 말고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싸우라고. 충분히 싸울 수 있는데도 퇴각하거나 퇴각을 건의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엄벌에 처하겠네. 알겠나?"
스탈린의 폭탄선언에 두려움을 모르던 주코프조차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화에 끼지도 못한 장군들의 낯빛이 창백해진 것은 덤이었다.
***
독소전쟁은 내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원 역사보다 한 달 일찍 처들어간 독일군이었지만, 소련군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침공 3주째에도 겨우 민스크 언저리에서 투닥거리고 있는 걸 보니, 이 세계에선 소련군이 원 역사보다 상태가 멀쩡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스탈린이 빙탈린이라던가.
소련이 독일을 잘 막아내고 있는 것은 꽤나 긍정적인 소식이다.
독일군이 동부전선에 고전할수록 히틀러는 더 많은 병력을 동부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만큼 우리의 부담도 줄어들 테고.
빨갱이는 싫지만, 로스케 형님들이 열심히 나치들과 싸워서 이집트에 올 독일군을 한 명이라도 더 줄여줬으면 하는 심정이다.
후속 부대에게 인수인계를 마틴 대대는 이집트로 가기 위해 길고 지루한 여정을 시작했다.
다시 제리들과 싸우러 간다는 소식에 걱정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몇 주 동안은 전장에서 벗어나 쉴 수 있다는 사실은 만족스러웠다.
습기 때문에 눅눅하고, 들끓는 해충들과 날마다 사투를 벌여야 했던 우리는 기차의 편안한 침대에 누워 인도를 가로질렀다.
뭄바이에 도착해 열차에서 배로 갈아타고, 인도양 위에서 열흘을 보냈다.
우리가 인도양을 건너는 동안, 영국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던 라시드 알리 정부는 이라크를 떠나 이란으로 망명했다.
아군은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친영 내각을 구성했고, 그렇게 이라크는 다시 '평화로워졌다'.
아군은 이라크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에서도 공세를 감행했는데, 본국과 떨어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탈리아군은 아군의 공세에 연패를 거듭했다.
처칠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늦어도 8월에는 이탈리아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에티오피아를 해방할 것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경우, 이곳도 이곳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100% 확신할 수 없다만, 정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롬멜은 아직도 독일에 있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 놈이 아직도 독일에 있는지는 모르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지금 제리들에겐 롬멜이 없다는 거야."
브랜슨 대령은 이어 본래 크기의 몇십 배로 확대한 흑백 사진을 가리켰다.
"아군 정찰기가 찍은 제리들 후방 기지의 모습일세. 보다시피 전차와 차량은 얼마 없고, 대다수가 보병들이지. 이탈리아군은 말할 필요도 없고. 소련 침공으로 보급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탓에, 한 달 가까이 녀석들은 전차나 자주포 같은 기갑차량들을 단 한 대도 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트럭 몇 대와 대전차포만 받았지."
"즉, 놈들의 전력이 약화한 지금이야말로 공세를 펼칠 최적의 시기란 말이지."
지휘봉의 끝은 후르가다(الغردقة, Hurghada)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를 지목했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집트의 유명한 휴양지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1980년대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작고 별 볼 일 없는 어촌에 불과했다.
"후르가다에 아군이 상륙하면, 틀림없이 제리들의 시선은 이곳으로 향하게 되겠지. 놈들은 아군이 북진하여 카이로를 노린다고 판단, 남쪽을 방어하게 되겠지. 그렇게 적의 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 수에즈 운하를 돌파, 그대로 카이로까지 달리는 게 이번 작전의 목표다. 이해했나?"
"예!"
이른바 성동격서로군.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에서 공격하는 기본 중의 기본 전술.
브랜슨 대령의 말대로 작전이 순조롭게 풀릴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양동작전으로 적들의 시선을 끌고, 전력이 양분되는 즉시 공세를 펼친다는 계획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마치 장사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을 보는 기분이랄까.
"마지막으로, 아서 그레이 대위!"
"예? 아, 예!"
한창 생각 중인데 브랜슨 대령이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몇 대의 전차를 잡았지?"
"한...... 30대 정도 됩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잡은 전차들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대략 30대 정도는 나온다.
차량과 화포까지 합하면 그보다 더 많을 테고.
"그렇군. 그럼 이번에는 몇 대의 전차를 잡을 생각인가?"
표정을 보니 분위기 전환 좀 하게 적당히 맞장구 좀 처달라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이번에는 약소하게 500대 정도 잡을까 고민 중입니다."
회의실 곳곳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브랜슨 대령은 내 답변이 만족스러웠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모두 들었지? 자네들도 노력해서 500대는 아니더라도 일 인당 100대는 잡을 수 있도록. 모두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
영국군의 후르가다 상륙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상륙을 저지하는 추축군의 움직임은 없었다.
후르가다에는 독일군도, 이탈리아군, 이집트군도 없었다.
본래 이곳에 살던 어부들과 그들의 가족들만이 전부였을 뿐.
후르가다에 무혈상륙한 영국군은 아시유트(أسيوط, Asyut)를 향해 진격했고, 그제야 추축군은 반응을 보였다.
"영국군이 아시유트를 향해 진격 중이라고?"
"나일강을 막아 물 공급을 차단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릅니다."
"카이로를 남부에서 위협한다는 계획일지도."
"우리의 눈을 돌리기 위한 양동작전일지도 몰라."
"하지만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라면?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추축군은 영국군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군 2개 보병사단을 보냈다.
애당초 영국군이 예상했던 전력보다 훨씬 작은 규모에, 그것도 독일군은 한 명도 없었지만 별수 없었다.
추축군의 시선이 어느 정도 남부로 분산되었다는 것과 수에즈 전선을 지키던 전력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7월의 첫날, 오킨렉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작전명은 자유.
"쏴!"
전선에 늘어선 수백 문의 25파운더가 연달아 불을 뿜고, 하늘에선 250파운드 폭탄을 장착한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들이 적진으로 날아가 폭탄을 투하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포탄의 비에 독일과 이탈리아 병사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운하 건너편 시나이반도에 있던 영국군은 서둘러 운하를 도하할 준비를 했다.
"다들 준비됐지? 좋아. 가자!"
영국 본토에서 만들어져 수송선 편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을 돌아 도착한 수백 척의 보트들이 운하 위에 띄어졌다.
포병대가 적진을 향해 묵직한 25파운더 포탄을 쏟아붓는 동안,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더, 더 빨리! 제리들이 코앞에 있다!"
"빨리 새끼들아! 손이 보인다?!"
포격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첫 보트가 건너편에 닿았다.
보트에서 내린 병사들은 지체없이 뛰어 적의 참호를 향해 돌격했다.
곧 참호에선 치열한 백병전이 일어났다.
포격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격해온 영국군 병사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독일군을 상대로 선전했다.
독일군도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병사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제1선의 참호가 거의 다 정리되자, 보트를 타고 운하를 건넌 공병들이 서둘러 부교를 놓았다.
작전의 성패는 기갑부대가 얼마나 빨리 운하를 건너느냐에 달려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