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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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8화
88화 작전의 신 (3)
끼익.
초조 반, 흥분 반의 심정으로 밖에서 기다리던 나는 츠지의 심문을 맡은 장교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곤 냉큼 뛰어갔다.
그도 나를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예상대로 적당히 협박 좀 하니까 다 불더군요. 심지어 제가 묻지 않은 것까지도 말입니다."
"그렇군요."
역시나.
말로만 황군의 정신 운운하며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다가 본인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라면 적에게 기꺼이 협력했던 작자답구만.
포로로 잡힌 것도 본인 입장에선 어질어질할 텐데, 죽기는 더더욱 싫겠지.
살기 위해선 애국심이고 나발이고 협력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네? 뭐가요?"
"어떻게 한눈에 저자가 중요한 놈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셨습니까? 남들 같으면 그냥 지나칠 텐데 말이죠."
"뭐, 그냥 느낌이 조금 쌔 하더라고요. 입고 있는 군복도 다르고. 평범한 놈은 아니라는 직감이 팍 들더라고요, 하하하."
"관찰력이 대단하시군요."
관찰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그저 미래의 지식 덕분이지만.
지금쯤 놈은 완전히 멘붕 상태일 것이다.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송환된 장교들한테도 황군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자살을 강요했던 인간쓰레기인데, 정작 자신이 포로로 잡혔으니 제정신이 아니겠지.
게다가 우리는 저놈이 싱가포르에서 저질렀던 짓까지 알고 있다.
당장에라도 우리가 자신을 총살대로 끌고 가진 않을까 걱정하며 벌벌 떨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저자가 싱가포르에서 저질렀던 짓을 알고 계셨습니까? 상부의 높으신 분들 몇 명만 알고 있던 사실인데."
"아, 그거야 제가......."
......하마터면 미래에서 왔다고 말할 뻔했네.
침착하자, 침착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생각해둔 말이 있잖냐.
"......본국에 있을 때, 연회장에서 우연히 높으신 분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눴거든요.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됐죠. 이 이상은 조금 말씀드리기 곤란한지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아, 물론이죠. 오히려 제가 곤란한 질문을 한 것 같군요."
높으신 분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눈 것은 사실이지만, 저자에 대해서 들은 적은 없다.
아무튼 저놈이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나뿐만이 아니라 높으신 분들도 알고 있어서 다행이군.
일본은 물론 독일군의 암호까지 꿰뚫어 보고 있던 영국이라 그런지, 일본의 무전을 감청하던지 무슨 방법을 썼던지 놈들이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까지 알고 있었다.
하마터면 '우리도 몰랐던 사실을 어째서 네가 알고 있냐'고 역으로 의심을 받을 뻔했다.
지금도 몇 명 정도는 나를 의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문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일개 대위가 남들은 알 수 없는 것들까지 알고 있으니,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앞으로 한동안 말과 행동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저놈은 이제 어떻게 됩니까?"
"본인 입으로 자백했으니, 당장 총살해도 이상할 거 없죠. 제 일은 어디까지나 놈을 심문하고 그 결과를 윗선에 보고하는 것뿐이라, 뒤처리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그냥 죽이기엔 영 아까운 놈이 아닙니까?"
"뭐, 그렇죠? 일반 병사나 하사관 포로들은 많아도, 영관급 장교 포로는 흔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상부에 건의 한 번 드릴 수 있겠습니까?"
"무슨 건의 말입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
"그러니까, 이게 아서 그레이 대위의 의견이라고?"
"그렇다고 합니다."
"흠, 자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나?"
"제법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그래?"
"예. 츠지 마사노부의 심문을 맡은 폴머 중위도 좋은 의견이라며 적극 찬성했습니다."
"그 친구가? 하지만 이런다고 저 영악한 놈들에게 별 소용이 있을까? 듣자 하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한 놈들이라 하던데."
"물론 큰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해 볼 만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흐음. 그렇구만."
***
구석에 누워 잠을 자던 츠지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이윽고 발소리가 멈추더니, 굳게 잠겨 있던 철문이 열리면서 3명의 군인이 나타났다.
앞의 장교는 전에 그를 심문했던 장교였다.
뒤의 두 명은 병사였는데, 츠지가 난동을 부릴 것에 대비하여 권총과 곤봉을 휴대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몸짓을 보였다간 곤봉이 그의 뼈를 박살 낼 터였다. 아니면 권총이 바람구멍을 만들어놓던가.
그러나 그들의 걱정과 달리, 츠지는 난동을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의 목숨줄이 저들에게 있는 것을 알기에 그는 최대한 조용히 있을 생각이었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으니까.
평소에 그가 줄기차게 말하고 다니던 황군의 명예와 마음가짐 따윈 이미 새까맣게 잊은 후였다.
남들에게 황국의 명예를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 죽으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그였지만, 본인의 목숨만큼은 예외였다.
"무, 무슨 일이오?"
츠지는 설마 이들이 자신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당신은 지금 당장 총 맞고 죽어도 할 말 없어."
폴머 중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츠지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상부에서도 널 죽이라는 말들이 많거든. 하지만, 특별히 당신한테 기회를 주지. 우린 너희처럼 야만인들이 아니거든."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에 츠지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기, 기회라고?"
"그래."
"말만 하시오! 내 무슨 말이든 다 따르리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
"어이, 요시오. 밥은 다 되어 가냐?"
"예, 앞으로 3분만 있으면 끝납니다."
쌀밥 짓는 냄새가 코에 닿자 귀신같이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바야시 모토노리 조장(曹長, 상사)은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혔다.
덥구나, 더워.
그의 고향인 후쿠시마도 여름이 되면 무척이나 더웠다.
하지만 이곳, 남국의 버마에 비하면 고향의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더운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고바야시는 그것이 궁금했다.
이렇게나 덥고, 습하고, 벌레가 많은 곳에서 사는 이들의 선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오지에서 살기로 한 것일까?
"이렇게 더운 날에는 빙수 한 그릇만 한 게 없는데."
고바야시는 여름이 오면 항상 빙수를 먹었다.
잘게 간 얼음 위에 단팥과 시럽을 뿌린 다음 크게 한술 떠서 먹는 그 맛이란!
극락이 있다면 이곳이 극락이지 싶을 정도다.
"자아, 다 됐습니다."
요시오 타데 일병이 갓 지은 쌀밥을 반합에 담아 가져왔다.
반찬은 물에 불린 무말랭이와 완두콩 통조림, 간장이 전부였다.
일본에서는 빈민층이나 먹는 식사였지만, 전장에서는 이게 일반적인 밥상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운이 제법 좋은 날이었다.
갓 지은 쌀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평상시에는 물에 불린 쌀알을 씹으며 허기를 달래야 했고, 전투가 한창일 땐 그냥 굶어야 했다.
비록 반찬이 부실하긴 하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음, 밥이 잘 지어졌군. 제법이구만?"
"감사합니다."
간만에 칭찬받은 요시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이제 밥을 먹기 위해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려는 찰나, 공습경보가 울렸다.
"비상! 적기다!"
"이런 썅!"
고바야시는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빌어 처먹을 영국 놈들, 하필이면 밥 먹으려는 때에 나타나다니!
고바야시는 서둘러 반합 뚜껑을 닫고, 반찬은 철모로 덮어두었다. 그런 다음 서둘러 참호로 뛰어들었다.
참호에는 고바야시처럼 밥을 먹다가 황급히 대피한 병사들로 가득했는데, 일부는 손에 반합이나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난 적기를 향해 3년식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요란한 총성이 버마의 밀림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적기가 삐라를 살포했다.
"?"
폭탄이 투하될 줄 알고 가슴을 졸이던 일본군 병사들은 폭탄 대신 삐라를 살포하고 황급히 돌아가는 적기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무를 완수한 영국기는 어느새 티끌만 한 크기로 변해 있었다.
적들에게 뿌린 적은 있어도, 본인들이 받아본 적이 없는 일본군 병사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삐라를 주워 읽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병사들에게 줍지 말라고 소리쳐야 하는 고바야시도 호기심에 삐라를 주워서 읽기 시작했다.
앞면은 일본어로 된 글이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웬 사진 한 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게 뭐지?
읽어 내려가던 고바야시의 두 눈은 이내 충격으로 커졌다.
"이, 이게 대체......."
***
남방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전쟁을 결의한 일본 군부조차 놀랄 정도로.
버마와 말레이시아에 있던 영국군은 황군이 입김만 불자 먼지처럼 쓸려나갔고,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군은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처럼 산산 조각 났다.
필리핀의 미군은 아직도 항복을 거부하며 끈질기게 저항 중이었지만,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 그들이 백기를 드리란 것은 자명해 보였다.
무적의 황군은 동남아 전역을 석권했으며, 이제는 뉴기니를 공격 중이었다.
곧 그곳도 버마와 보르네오처럼 황국의 일부가 될 것이다.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이 그려진 지도를 바라보던 도조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기세라면, 아시아와 태평양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아예 미국까지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히라누마 전 총리의 말대로, 우리 황국이 백인놈들까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가슴 뛰는 일이란 말인가!
미래에 대한 환상에 젖어있던 도조는 문밖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부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부관은 뛰어왔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 느긋하던 친구가 무슨 일인가? 간만에 체조라도 했나?"
도조의 농담에도 부관은 웃지 않았다.
"각하, 츠지 마사노부 중좌에 대해서 들으셨습니까?"
"응? 츠지라면......."
츠지 마사노부는 도조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 장교였다.
남방 작전을 기획한 것도 그였고, 싱가포르 전투에서 공적을 세워 그 공을 도조로부터 직접 치하받았다.
허나 버마로 간 뒤, 전투에 참여했다가 실종-사실상 전사-되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참 유능하고 눈치 빠른 친구였지. 안타깝게도 지금은 실종되었지만.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왜?"
"이걸 봐주십시오."
부관이 건넨 봉투에는 인쇄된 종이와 사진이 들어있었다.
이게 뭐람?
서류를 읽기 전, 도조는 부관을 흘끗 쳐다봤다.
부관은 얼굴이 경직된 채 입을 다물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드는데.......
부관이 건네준 서류를 천천히 읽어가던 도조의 손이 이내 파르르 떨렸다.
화룡정점으로 함께 첨부된 사진까지 보자, 입에서 분노에 찬 괴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개 같은 새끼가!!!"